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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21장, 브엘세바 우물 사건의 신약적 해석 3960

LNCK 2013. 1. 23. 11:13

 

 

 

◑1. 서론/ 예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만이 아니라..   (1~16분)

 

*아래 녹취문은, 위 동영상 설교를 17분부터~34분까지 녹취

 

 

◑2. 창21장, 브엘세바 우물 사건의 신약적 해석    창21:22~34, 왕상17:14~24

                                                                                                     12.04.29 로마서63강, 출처  


창 21장에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후손인 이삭이 태어난 장면이 나오고,

‘율법’을 상징하는 이스마엘이, ‘은혜’의 아들인 이삭을 희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은혜의 후손이, 율법의 자손에게 희롱과 조롱을 당하게 되어있음을 예표로 보여준다.

복음은, 율법에게 희롱과 조롱을 당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율법 또는 율법주의자들이, 은혜 또는 은혜 아래 사는 자들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고,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율법인 이스마엘이

하나님에 의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다.

결국 율법이, 은혜에 의해 축출되는 것을 보여준다. (창21:1~14)


▶문제 제기

그런데 바로 그 밑에 붙어있는, 본문 창21:22~34의 얘기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그랄 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방문한다.

이 장면은, 무슨 목적으로, 성경에 삽입된 것일까?


그 다음 장인 창22장에는, 아브라함이 언약의 후손인 이삭을 죽이려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것도 복음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사건’으로, 우리가 해석한다.

그 모리아 산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골고다 산이었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샌드위치의 고기(패티)처럼 끼인,

본문 ‘아브라함의 우물 사건’은, 왜,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끼인 것일까?

어쩌면 쓸데없는 내용이, 우연히 끼어진 것은 아닐까? 물론 아니다.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여기에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의 장면>,

<브엘세바 우물 사건>이, 성경에, 그것도 하필 이 자리에 등장하는 것일까?  해답은↓


◑‘물’은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 광야의 물은, 생명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광야의 물은, 종종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된다.


지금 <브엘세바 우물 사건>을 살피는 중에, 먼저 ‘물’의 의미를 살피는 중이다.


레마와 로고스의 차이를 잠깐 설명하면,

‘레마’는, 어떻게 말로 설명하거나 할 수 없는, 그 진리 자체를 이야기한다면

‘로고스’는 그것을 성문화(문자화)해서 담은 그릇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레마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로고스를 표피적으로 받아들여서, 성경을 (율)법처럼 읽게 된다.

(아니다. 성경은, 레마로 읽어야 한다. 그게 우선이다.)


거기서 레마의 동사형인 ‘레오’가, ‘말하다’ 라는 표피적 뜻도 있지만,

‘흐르다’ 라는 뜻이다.

레마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의 비’라고 말하면,

은혜의 말씀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씻겨지지 않으면, 부정한 자가 된다.

성경에 부정한 것은, 다 물에 씻으라고 했는데, 그것도 흐르는 물에 씻으라고 했다. 레15:13 등


그때 ‘흐른다’는 말이, '레오'인데,

거기서 레마가 파생되어 나온것을 보면, 흐른다/흐르는 물은.. 말씀을 상징한다.


그래서 성경에 ‘흐르는 물에 씻어라’는 말씀은,

그 상징적 의미가, ‘말씀에 씻으라’는 뜻이다.

말씀(의 흐르는 물)에 씻지 않으면 다 부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요단강(흐르는 물)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진입했고,

-나아만이 요단강(흐르는 물)에 들어가서 씻었던 것이다.

‘요단’ 이란 말이, ‘흐르다, 내려오다’ 라는 뜻이다.


창세기에 둘째 날, 물이 위, 아래로 갈라졌다.


위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를 뜻한다.

아래의 물, 즉 바다는, 저주와 심판을 상징한다.

그 물, 아래 바다는.. 종말에는 이제 멸해진다.


계시록에 가면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 그리고 유리바다만 천상에 남아 있다.’ 계21:1등

‘유리로 된 바다’란 뜻이 아니다. 진리의 말씀만 남는다는 뜻이다.

'위의 물'만 남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용이 입으로 물을 뿜어서, 여자를 떠내려가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아래의 물’, 즉, 비진리, 엉터리 말씀 이런 것으로

여자(교회)를 죽이려하는 마귀의 역사를 가리킨다.


아모스서를 보면,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다’ 라는 말씀이 나온다.  암8:11

그 말은, 이 세상에서 말씀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데,

정작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수가 없더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엉터리 말씀의 홍수는 곧 영적인 기근, 말씀의 기근이다.

그 홍수에, 그 아랫 물, 그 가짜 물에.. 다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와 사르밧 여인의 복음적 해석


엘리야 때 기근이 3년반 동안 일어난다.

3년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다.

로고스로 오신 예수, 그 분이 말씀을 홍수처럼 쏟아 내었는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다.

그것도 일종의 기근이다.


그러니까 엘리야의 3년반 기근은, 예수님의 공생애 3년반을 예표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에 성령의 비가 내리자, 비로소 사람들이 살아났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3년반 후에, 다시 비가 내린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아, 그게 그런 말이었구나’ 라고 깨달았다.

그런 말씀이 성경에 몇 차례 나온다.


성령이 생수처럼 단비로 부어지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를 이해하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 즉 교회가) 그 깨달은 말씀을 받아서, 뿌리니까,

첫 번째 시내산에서 죽었던 3천명이 살아올라온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에, 3천명이 믿은 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어겨서 죽은, 3천명과 연결되는 것이다.  출32:28

율법은 죽이고, 복음은 살려내는 것을 뜻한다.


오순절 날. 따라서 성령=생수=비=말씀 등은, 같은 맥락의 상징이다.

다시 말하면 ‘진리’이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셨다.

진리의 말이 성령이요, 그게 생명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반 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은혜의 비, 성령, 말씀을 내려주신 사건이었음을, 엘리야의 이야기가 힌트하고 있다.


그래서 귀신들이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닌’ 것이다. 마12:43

 

그런데 이제 이 땅에 성령이 오셨다.

우리는 광야 교회에서, 말씀의 비를 얼마든지 맞을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이 요한 계시록에서 말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이고,

= 3년 반= 42달의 기간이고= 1260일의 기간이다.


말씀이 떨어지는데, 그 말씀이 다 곡해가 되어서 기근인 상태인데,

그런데 그 중에 ‘레마’로 알아듣는 이들이 있다. *위로부터 흐르는, 살아있는 말씀


그래서 엘리야의 기근의 이야기 중간에,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 과부는, 밀가루 한 줌만 가진 완전히 비어진, 빈털터리 여자이다.

이제 그 밀가루 한 줌 먹으면 죽는다.


자기는 이것 먹고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그랬더니 그 기근의 와중에 그녀의 집에만 음식이 차고 넘쳤다.

기름과 밀가루가 차고 넘쳤다.


흉년과 풍년이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다.

세상 모두가 다 흉년, 기근인데, 그 여인의 집에만 풍년이 일어났다.


왕상17: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마지막에 완료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이제 은혜로 가득 차게 되는 나라가 오기 전에도,

이미 말씀으로, 은혜의 비로, 살아나는 이들이 소수, 일부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여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마지막 갖고 있던 밀가루를 하나님께 빼앗겨야 한다.


그것은 죽음을 뜻한다. ‘이거 먹고 나면 난 죽습니다’ 했는데 그것을 빼앗은 것은,

그녀를 죽인 것이다. ‘네가 죽어야 말씀의 풍년이 온다’는 뜻이다.


엘리야가 무슨 밀가루 떡에 환장해서 빼앗아 먹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죽어야, 거기에 부활과 생명의 풍년이 오기 때문이다.


성도는 예수에 의해 살아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의 생명의 근거는 다 빼앗겨야 한다.


‘이게 (세상 것이) 너를 살려주는 것 아니야’ 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밀가루 그 마지막 남은 한 줌을 빼앗아 버린다.


그래서 그 여자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십자가이다.

그 진리의 현실을, 그 여자가 정확히 깨달아 알게 된다.


왕상17: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줄 아노라 하니라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난다. 이 이야기는, 진리의 말씀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 이 모든게 나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것이 진리의 말씀, 복음, 이것이 십자가군요!’

그녀가 결국에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의 물, 은혜의 비’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브엘세바의 (우)물을 설명하기 위해서, 위 사르밧 과부 이야기를 보충적 예로 들었다.

다시 본문, 브엘세바 우물 사건으로 돌아가자.


◑브엘세바 우물은, 언약/ 말씀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막 한 가운데서, 그 우물을 두고서 언약을 맺는다.

여기서 우물은, 상징적인 의미로 살리는 물/말씀/레마이다.


그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로 짓는데,   창21:31

브엘세바는 히브리어로 ‘일곱 우물’이다. 세바가 7이고, 브엘은 ‘우물’


그런데 본문을 잘 보시면, 그 이야기 속에 우물이 하나밖에 안 나온다.

일곱 개의 우물이 나오지 않고, 그 본문에 나오는 우물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 당시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아직 없었다.

그래서 세바를 7로 해석하면 안 된다.

세바라는 단어에 7이란 의미를 부여한 것은, 훨씬 다음의 때였다.


따라서 우리는 브엘세바를 일곱 우물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되고,

거기서 7로 번역된 '세바'는, '일곱'과 동시에 약속, 맹세라는 뜻이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이 7을 언약의 수, 안식의 수, 진리의 수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브엘세바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맹세의 우물, 약속의 우물인데,

언약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는 개념이다.


▶숫자 7은, 맹세, 언약. 약속, 말씀을 의미.

하나님께서 창1장 천지창조 사건 때, 일곱 번 말씀하신다.

그 말씀이 진리라는 뜻이다. 언약의 말씀이란 뜻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교회를 완성하시면서, 가상칠언,

일곱 번의 말씀을 하셨다.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일곱 날 돌고, 성을 무너뜨렸다.


나아만이 일곱 번 요단(흐르는)물에 들어가서, 언약으로 문둥병이 나았다.


그러니까 6번 들어가서 안 나았다는 뜻이 아니고, 꼭 7번 들어가야 낫는다.

그 횟수가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의미가 ‘말씀으로/언약으로 낫는다’는 뜻이다.


계시록에도 7이란 숫자가 유독 많이 나온다.

다 언약의 숫자, 안식의 숫자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 우물을 두고서, 언약을 한 그 장소를 브엘세바 라고 이름 지었다는 것은,


본문 직전에 ‘이삭과 이스마엘 사건’이 나오는데,

그 은혜와 그 율법 사건을 통과하고 나니까,

‘아,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를 설명하기 위해서, 거기에 브엘세바, 언약의 개념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주제.


설교 서두에 이 내용이 생뚱맞게 들어가 있다고 운을 띠웠는데,

지금 그 답을 풀어드린 것이다.

생뚱맞은 게 아니라, 그런 의미로, 본문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약속의 후손을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의 후손을 언약을 일곱 번 하신다. 세어보시라.

'언약의 말'이란 뜻이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물을 파서, 하늘로부터 흘려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그 물을 창작하거나, 추론해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말을,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말을, 곡해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을 수도 있다.. 라고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너 왜 우리 우물을 빼앗아갔니?’ 라고 말했다. :25

그런데 아비멜렉은 ‘정작 내가 언제 빼앗아갔니, 나는 금시초문이야’ 그런다. :26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자기가 잘 믿는 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을 도적질 해 가면서도, 아비멜렉처럼,

나는 그런 적 없다고 우기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게 우물, 하늘로부터 흘려주는 언약의 말을 빼앗는 것인데,

거짓된 복음, 성공주의적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기는 복음을 빼앗은 줄도 모른다.


그때 아브라함이 일곱 어린양을 언약의 장소에 등장시킨다.

일곱은 세바, 언약이다.


그러면 일곱 어린양은, 언약의 어린양을 뜻한다. 일곱이 언약이나까.

그 언약의 어린양을 증거로, 이 우물은 내가 판dig 거야.. 라고 말한다. :30


하나님의 우물, 진리의 말씀은,

오직 십자가의 어린양으로만 증거될 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물은 내가 판 거야 라고 말하고는

어린양, 언약의 양을 들이대는 것이다.


거기서 우물을 도적질했던 아비멜렉에게 어떤 언약이 주어지는가?

‘제발 나를 배신하지 말아주세요’ 한다. 창26:29~31


하나님의 말(우물)을 도적질 한 자가, 제발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랬을 때,

언약의 어린양을 증거로 해서, 나 너를 안 버려! 한다.


즉, 창21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의 이야기이다.

그게 브엘세바의 아비멜렉의 이야기이다.


창21장이 어떻게 끝나는가 보시라.

창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불렀으며


부르다(카라)는.. 받아들이다, 초청하다 라는 뜻이며,

이름(셈)은.. 셈, 함, 야벳 할때의 셈인데, 빛, 말씀으로 해석해야 되는 단어이다. (참고로, 함은 어둠이다.)


그러니까 21:33절은,

아브라함이 영생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초청했다.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하다.


율법과 은혜의 사건, 이삭과 이스마엘의 사건을 통과해서,

진리를 그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게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 라는 말로 21장이 끝난다. :34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 계속 벧엘로 몰아가셨다.

‘벧엘에서 나가지마!’ 하신 것이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다.


그러나 벧엘은 상징적인 것이다.

‘아래’(땅)에 있는 하나님의 집, 옛성전, 율법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가 진리를 알고, 진리가 되자,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자,

‘아, 약속의 후손은 이렇게 오는 것이고, 그 아들에 의해 내가 살아나는 거구나’를 알게 되자,

그가 진리가 되었으므로, 그가 있는 곳이, 벧엘(하나님의 집)이 된다.


그래서 블레셋에서 머물게 놔 두신다.

벧엘에서부터 드디어 자유롭게 풀려난다. 옛 성전에서!

그게 사실은, 아브라함의 죽음이다. (며칠 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