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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부흥만이 참 부흥 / 허운석

LNCK 2013. 1. 25. 10:51

 

십자가 부흥만이 참 부흥                   고전1:18~19                     2012.11.09.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w_nAwfcaaM&list=PLqj2NNjP3q8gkj0PeeP46WGiRdnDLqlyY&index=19

◑십자가 부흥만이, 참 부흥입니다.

 

 

 

 

 

십자가가 몰아내어진 상황.. 그러면 내 구원이 위험합니다.

 

아마존이란 땅에서 살아오면서, 제가 늘 그 분을 찾아갔던 곳은, 나사렛입니다.

 

저희가 처음에 아마존에 도착했을 때, 저희 집은 양철 지붕에 판자로 된 집이었습니다.

 

6미터x8미터 집이었습니다. 약 15평입니다.

 

온도는 40~50도가 넘고, 습도는 90%가 넘는 날씨였습니다.

 

 

 

 

 

제가 아마존에 있다가, 한 번은 미국을 방문해서, 어느 집에서 잠을 자는데,

 

그 침대가 너무 좋고 낯설어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방바닥에 내려가서 잠을 잤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제게 너무나 어색하고, 혹시 제 땟국물이 묻을 것 같아서,

 

차라리 내 신세는 방바닥에서 자는 것이 훨씬 더 알맞은 것 같아서,

 

그래야 잠을 편히 잘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마존에서 사랑하는 의자가 있습니다. 그 의자는 오랜 세월동안 우리 집에 있었습니다.

 

 

 

 

 

등받이도 없는 그 나무의자에 앉아 있을 그 때가, 저는 가장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과거에 이런 의자에 앉아 계셨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를 부요하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는데,

 

저는 평소에 그 분을 찾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자에 앉을 때도, 그 볼품없는 의자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에 가 보면, 나사렛 예수님이 사라지시고,

 

목수 되셨던 그 분이 사라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던 그 분이 사라지시고,

 

위대하시고 왕으로 임하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 존재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고전1:18~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 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즉, 그 십자가를 미련하게 생각하는 오늘날의 내가

 

멸망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면서 신앙생활 해야 됩니다.

 

 

 

 

 

‘구원,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섭습니다.

 

우리는 심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네 소유를 다 팔아라.. 하실 정도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신지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십자가의 메시지가 사라지고,

 

대신에 만사형통하는 그러한 메시지로 대체되어 졌습니다.

 

죽음(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주님, 부활만 주십시오. 십자가 같은 것은 주님 우리에게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고통은, 크리스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의 자세는, 나중에 멸망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한국 교회가 몰아내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굉장히 놀라워해야 됩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

 

아담이 왜 타락했습니까?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의 자리를 넘봤던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의 종자인 나는, 틀리겠습니까, 같겠습니까? 아담과 같습니다.

 

 

 

 

 

이렇게 나는 아담에게서 나온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면 내 세포속에서, 내 피속에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싶은 생각이

 

분초마다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이 육신이 멸망할 때까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신이 되고 싶은 그 도전을,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도 몰아내 버리고, 고난.. 이런 것은 마치 필요 없는 것처럼,

 

듣기도 싫어하고, 언급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리고 다,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서, 모든 영광을 받으면서 살아가려 합니다.

 

 

 

 

 

왕처럼 옷을 입고, 왕처럼 고급 차를 몰고 다니고,

 

왕처럼 화려한 음식을 먹고, 왕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을 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실들을, 여러분들은 깨달으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왕(하나님)처럼 되려하는 아담은 쓸데가 없습니다. 아담은 고쳐서 쓸 만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예 죽여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늘 신이 되고자 하는, 그런 것을 매 순간마다 시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런 점들을 발견하지 못하십니까?

 

 

 

 

 

내가 누구에게 싫은 소리 조금만 들어보십시오.

 

‘감히 네까짓 것이 내게 도전하는 거야?’ 하면서 우리는 즉시로 매우 노여워합니다.

 

 

 

 

 

‘내가 신인데, 네가 감히 내 자존심을 건드려?’ 하면서

 

즉각 입에서 쌍시옷 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담의 피를 유전 받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제가 워낙 원시적인 곳에서 살다가 보니까, 언어가 저도 모르게

 

원색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마존 원주들에게 이런 설교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자라라까’라는 아주 무서운 독뱀이 있습니다.

 

그 뱀에 물리면, 그 독으로 인해, 몇 초안에 실명이 되고,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곧 사망하고 맙니다.

 

 

 

 

 

그 뱀은, 또 복수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기를 좀 건드렸다 그러면, 꼭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가,

 

그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물어버립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자라라까를 탁 건드리면, 어떤 모습을 하지요?’

 

그러면 원주민들이 다들 ‘쉬쉬식’ 소리를 내면서, 그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모습을 흉내 냅니다.

 

 

 

 

 

‘그러면 그 자라라까가 어디에 있지요?’

 

원주민들은 다들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속에 있지요!’

 

 

 

 

 

자기 자존심만 툭 건드리면, 우리는 언제나 쉬쉬식 하면서 위협적인 인상을 씁니다.

 

그리고 형제를 반격하고,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그 본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십니까? 아멘이 적으신 군요.

 

우리는 솔직해야만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네 주님, 저도 그렇습니다. 나는 자라라까입니다.’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방문하면, 사람들이 사석에서 이렇게 간증하기를 좋아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엄청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명문대학에 갔습니다.

 

-우리 남편의 직장이 승진했습니다.

 

이런 것만 간증하는데요, 그런데 우리 아마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

 

 

 

 

 

-오늘 저는 달걀을 훔쳤습니다.

 

-선교사님 댁에 닭을 훔쳐다가, 정글에 가서 구워먹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죄를 간증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오셔서 확확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아무리 초청해도 잘 안 오실 때도 있습니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난리치고 뒹굴어도.. 안 오십니다.

 

 

 

 

 

십자가의 모습이 보이기 전까지는, 내 심령이 상해서 쪼개지기 전까지는

 

주님이 꿈쩍도 안 하시고, 노려보고만 계십니다.

 

우리가 오시라고 해서 오시거나, 가시라고 해서 가시는 분이 아니란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 다시 말하면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의 감격이 있는 그곳에

 

성령님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마존 사역지에 부흥이 왔었습니다.

 

그 전까지, 정말 17년 동안 무시무시한 싸움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물론 그들과 어마어마하게 싸웠습니다)

 

진정으로 나 자신과 싸운 기간이었습니다.

 

 

 

 

 

내가 형제를 섬길 수 없는, 형제를 위해서 내가 제물로 드려지지 못하는,

 

그 한탄하는 세월을, 17년을 보낸 것입니다.

 

 

 

 

 

내가 녹아질 수 없고,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없는 이 고통 속에서,

 

그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17년 후에, 주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당신께서 친히 오셔서, 십자가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마존에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신기하게 땅이 회복되면서, 그 동안 통 안 열렸던 망고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후에, 사람들이, 저를 데려다가 간증 시키는 이유가,

 

가만히 보니까 망고 나무에 관심이 있어서,

 

그 신기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망고 열매가 열린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형제들의 심령 속에 주님이 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하셨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워서, 그냥 춤추고 싶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만 열어서 간증했다고 하면,

 

형제들 가운데 일어난 원색적인 죄의 회개와,

 

그에 따른 새창조, 변화의 역사만 나눕니다.

 

 

 

 

 

그들이, 훔치는 죄, 상대방을 공격하고 상해를 입힌 죄, 또 여러 가지 성적인 죄,

 

이런 죄들을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베풀어주셨던 새 창조의 역사, 새 생명의 역사..

 

이런 것들을 제가 설교로 간증합니다.

 

 

 

 

 

오로지 십자가만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죄의 각성과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변화)가 없는 역사는, 다 거짓입니다.

 

종교적 융성은, 불교, 회교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종교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십자가의 역사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삶 가운데서 십자가가 역사하는가요?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가 하는 일은, 대적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신이 되고 싶어 하니까요.

 

대접을 못 받아 보세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 보세요,

 

눈에서 새파란 불이 나오면서, 금방 교회를 다른 데로 옮겨 버립니다.

 

우리는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든지, 인정을 해주는 목사님 곁에 얼마동안 있다가,

 

인정을 더 이상 못 받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자존심이라는 것은 사탄의 왕 같은 성품입니다.

 

 

 

 

 

그 왕을 건드리면 죽을까요, 안 죽을까요? 당장 모가지 잘라집니다.

 

그 성품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왜 싸웁니까? 자존심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자리를 차고 싶은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열심히 하고, 금식 열심히 해서 은사를 많이 받고 싶어하는데,

 

왜 받고 싶어합니까?

 

 

 

 

 

그 사람보다 내가 좀 더 낫게 하기 위해서, 은사를 더 많이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옛 사람을 벗어버릴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아주 그 못된 근성을 그대로 갖고서, 은사만 많이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리는 심한 상처를 받습니다.

 

 

 

 

 

▶나는 가인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실 리가 없지요.

 

십자가에서 그 살이 찟겨지는 순종 속에서, 그 회개의 눈물이 없는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실 리 없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시는 그 부르심에 아무런 응답도 안 하면서,

 

십자가는 나하고 상관없는데,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생 동안 상처만 받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그래서 날마다 그냥 아내를 죽여 버립니다. 왜 죽이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나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내가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아벨 같은 성도)가 은혜를 받고 있으면,

 

그 강퍅해진 심령, 그 신이 되고 싶어하고, 왕이 되고 싶어하는 심령은,

 

반드시 그를 죽여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나보다 약한 자식들, 마누라, 작살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 자기가 받은 상처 때문에, 약한 자를 꽉꽉 눌러야죠.

 

 

 

 

 

그래서 그 아벨을 때려죽이는 일을, 우리는 아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우리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모함하잖아요.

 

‘저 웬수 때문에 내가 예수를 믿기 싫어.

 

저 원수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앞잡이야, 아주 마귀새끼야!’

 

 

 

 

 

그 사랑하는 자기 남편을 ‘마귀새끼’라고 그러잖아요?

 

저도 예전에 마음속으로 그렇게 자기중심적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잔인한 가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내가 가인이라고 하는 처절한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쏟으셨습니까?

 

 

 

 

 

‘주님 저는 살인자입니다. 나는 내 분노 때문에 나는 내 형제를 살해하는,

 

분초마다 살해하는 가인입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들은 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 회개의 눈물이 여러분들의 뺨에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그리스도의 보혈이 강같이 나에게 흐르시는 것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아벨을 죽이면서, 내 분노 때문에, 내 욕심 때문에, 내 탐욕 때문에,

 

내 미래에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은 다 죽여가면서, 자기 야심을 이루려고 합니다.

 

 

 

 

 

 

 

 

 

◑은사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십자가입니다.

 

 

 

교회에서 은사받은 사람들이 왕노릇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은사 만땅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아주 군사 같은 사람입니다.

 

 

 

저는 나이스한 사람이 아니고, 원시적으로 역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은사를 받고 사역을 하는데, 그러면서 제가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은 죄다 살려놓고, 정작 그 은사자는 죽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셔야 합니다. 너무 무시무시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불법한 자야,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 나를 떠나가라!’ 하십니다.

 

 

 

왜입니까? 은사의 시행은 화려한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회개, 변화)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는 길은, 오로지 나를 날마다 십자가에 죽음으로 넘기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그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은사는 혼에 옵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일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이십니다. 그런데 십자가 없이, 은사만 있으면,

 

가뜩이나 신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목을 기린처럼 빼는 우리에게,

 

신비한 은사까지 가져보세요.

 

 

 

그러면 다 컨트롤 하는 영, 이세벨의 영과 같이 컨트롤(조정)하는 영으로 변질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안 되면 잘라버리고, 내 마음에 인정이 되지 않으면,

 

그 시기심과 질투, 순종되어지지 않는 마음, 깨어지지 않는 마음,

 

이런 것들 때문에, 신 위에 신이 되어서, 면류관을 쓰려고 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가 면류관을 쓰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 면류관에는 참람한 이름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참람한 이름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바로 그런 음녀 행색을 할 수 있습니다.

 

 

 

신기한 은사를 나타내니까, 사람들이 막 추종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각양 탐욕을 이루어서

 

높이 한 자리 꿰어차고 싶은 야망, 이 욕망과 아울러

 

여러 가지 인간적 욕망들을 이루고 싶어하면서,

 

그 자기 면류관에 참람한 이름을 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이 아니고, 바로 만땅 은사자인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나아지고 싶은 마음,

 

그래서 이 야망이 이 속에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은사를 우리가 사용하면,

 

그 영광을 다 자기가 받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짧아졌던 한쪽 팔, 다리가 길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짧아졌던 한쪽 다리가 길어지면 좋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그런데 짧아졌던 다리가, 안 길어져도 좋을 수 있습니다.

 

다리가 길어진 후에, 자기가 믿음이 좋아서 남들보다 특별히 고침 받은 줄 알고,

 

자행자지하다가, 나중에는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기적을 본 사람들이, 나중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때려죽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기도해도, 자기의 짧아진 다리가 고쳐지지 않아서,

 

평생 기도하면서 겸손하게 사는 사람이.. 훨씬 더 은총을 받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믿음이 좋은 사람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실 수도 있지만,

 

반대로 주님이 특별한 은총을 주시면, 오히려 그를 안 고쳐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처럼요, 하하하!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좋으면, 고침 받는다/ 믿음이 약하니까 아직 고침 못 받는다’

 

라는 그런 단순한 공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암으로 고생하는 저를 보면서, ‘선교사님, 속히 나으셔야죠!’ 하는 말이,

 

나를 위해서 해 주는 말로 들릴 때도 있고, 간혹 다른 뜻으로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 많이 받은 사람치고, 성질이 더럽고 지랄인 사람이 많습니다.

 

또 못된 짓 잘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특별히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은사를 안 주면,

 

이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고 따라올 사람이 아닙니다.

 

‘우는 아이, 떡 한 개 더 주는’ 식입니다.

 

 

 

그 사람이 못되 먹어서, 당장 주님을 버릴 것 같으니까,

 

주님이 그에게, 은사를 확실하게 주셔서, 주님을 못 버리게 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괜히 믿었어. 손해가 막심해!’ 이렇게 씩씩 거리면서, 주님을 배반하려 하다가도

 

주님의 은사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고, 또 뭐 방언도 나오고 그러면..

 

(그 떡 한 개 더 먹고) 그는 주님을 못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은사자가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래서 교만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래서 은사를 하나님이 빼앗아가 버리시는데도

 

계속 은사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제는 은사를 지어내기까지 하면,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서도, 자기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그거라도 없으면, 이 인간이 교회도 안 나가고,

 

예수도 안 믿을 거니까, 하나님이 확 그를 은사(선물)를 줘서, 주님을 못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자기가 은사가 충만하다고,

 

인격이 변화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십자가 밑에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은사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너무도 못된 인간이고, 아주 막가는 인생이니까,

 

하나님이 제게 확실하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게다가 아마존까지 저를 끌어내시고, 그 옛사람을 벗기시고, 아들의 형상을 이루게 하시는데,

 

날마다 40~50도의 고열로 푹푹 찌는데서 고통을 받게 하시고

 

벌레들이 밤낮으로 물게 하시고,

 

벌레들이 몸 속에 들어가서, 이리저리로 옮겨 다닙니다.

 

 

 

여러분들은, 안 당해 보셨으면 안 믿는데..

 

머릿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정말 기가 막힙니다.

 

 

 

찬양을 하면 모기가 목구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찬양하면서 큭큭 하면서, 모기를 뱉어내면서 찬양합니다.

 

 

 

모기와 벌레들이 불빛있는 데로 모이는 습성이 있는데,

 

제가 강대상 앞에서 찬양을 리드하는데, 거기에 특별히 전깃불이 밝습니다. 전등을 여러 개를 켜니까요.

 

그러면 모기들이, 특별히 찬양인도자가 있는 곳으로, 집중적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주님은 많은 고난을 주셔서, 저를 십자가로/회개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 은총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나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데,

 

그 수많은 벌레들이 나를 물어뜯는 일도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은사도 필요했고요.

 

 

 

제가 도망가고 부인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가 너무 확실하게 있으니까,

 

제가 빼도박도 못하고, 거기에 눌러있으면서, 선교사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사를 증거로 주셨다는 말씀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표적과 기사가 증거..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십자가 안에서만 역사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꼭 알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것 하나를 알아차리기 위해서,

 

너무나도 긴 시간동안, 죽음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

 

 

29:30~  허운석 선교사 간증설교 2-2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