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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2

은사자가 주의할 점 / 허운석 선교사

LNCK 2013. 2. 4. 14:16

 

◈은사자가 주의할 점                고후12:10, 삿8:27                     12.11.12.  출처보기

                                                                                 뉴저지 가스펠 휄로우십 #4

◑은사를 받고서, 오히려 타락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욕심과 무지에 의해서, 사탄에게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는 귀한 은사를 받고서, 주님과 멀어지게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이 귀중한 은사가, 오히려 자기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그러한 불상사를 발생시키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입니다.

 

저처럼 방언을 많이 말하는 사람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저는 사람에게 말을 하려고 해도, 방언이 먼저 튀어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런 은사가 제 안에 뜨겁게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무수한 긴 세월동안, 처절하게 고민하고 슬퍼하고,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왜 내가 은사를 받고,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더 멀어질까?’

하고 혼동 속에서 괴로워하며, 고통 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과,

<주님께서 자기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 인도되고, 어떤 사람은 계속 무지에 머무르게 되는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여러분들도 고민을 하고 계실 줄 압니다.

 

그래서 제가 고민하고 슬퍼했던 일들에 대해서, 이 시간 여러분과 나누기 원합니다.

제가 방언하는 사람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방언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주께 방언을 받은 사람으로서, 내 마음에 탐심과 욕심과 무지가 계속 있다면,

즉, 은사는 받았으나, 자기 죄성이 십자가에서 회개를 통해 처리되지 않은 사람은,

이 은사가 오히려 나를 교만하게 하고, 말씀에서 나를 떠나게 하는,

그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유익하게 할 것(은사)이, 나로 주님을 떠나게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루는 제가 인터넷에서 성목사님께서 쓰신 칼럼을 읽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빌립의 딸들이 예언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수족이 결박될 것이다..’ 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예언을 들었으면서도, 그 예언대로 예루살렘 행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런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언으로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담대히 올라갔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결박되고 체포될 것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예사 일이 아닙니다. 또한 그 빌립의 딸들의 예언도 그대로 맞았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무모하게, 성령의 예언을 거스르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뭘 그렇게 고통 받는 것, 죽음을 두려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죽음이 나를 기다린들, 그게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데 있어서,

내 죽음이, 그게 뭐가 그렇게 두려운 일이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예언이나 이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대체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유익 중심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언과 방언을 위시한 여러 은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나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것인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귀한 은사를 받아서, 놀랍게 은사를 시행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과 멀어지고, 오류에 빠지는 것이,

그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이 결박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예언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그는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그 곳을 향해 돌진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예언을 해석했습니다.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으니, 준비 단단히 하고 올라가자’ 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예언의 은사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선교사님, 병도 났으니까, 아마존에 가지 마세요.’

이렇게 저를 위해 준다고 염려의 말을 해 줍니다.

 

그런데 저는, 죽음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늘 생각합니다.

 

제 소원은, 제가 하루라도 빨리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더 기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와이나 갈라파고스 같은 지상낙원.. 얼마나 가고 싶어 하십니까?

그런데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천국.. 왜 빨리 가고 싶어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하루라도 더 속히,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제가 그토록 사모했던 내 주님께 간다는데,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직 여러분이 ‘죽느냐/안 죽으냐’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면,

아직 땅에 것에 미련이 충만하고, 예수님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내게 닥쳤을 때, 의사로부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등,

죽음 때문에 내가 슬퍼한다면, 내 신앙이 가짜임이 들통 난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한 애착이 너무 우상처럼 강했다는 데 대해서,

즉,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충분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왜 하나님이 저를 더 살려주시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얼마나 무지한 인간이고, 얼마나 악독한 인간인지.. 좀 더 깨달으라고.

그것을 좀 더 깨닫고,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그 회개의 고백을 더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저를, 아직까지 살아남게 하신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제 처절한 악함,

주님을 내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 철저히 악독한 인간,

이것 때문에 나는 더 회개하고, 

주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너무나 감격스럽고,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이 은혜를 어찌 감사할꼬!

 

이것 때문에, 제가 아직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복음전파는.. 두 번째 목적입니다.

 

저는 주님께 ‘더 오래 살려 달라. 생명을 더 연장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니 나 같은 인간이 더 살아서 뭘 하려고요?

나 같은 인간이, 더 오래 살아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히스기야는, 자기 죽을 목숨을 15년 더 연장 받아서,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가득 담긴 왕궁의 보물창고를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주면서

‘우리나라도, 당신 나라 바벨론과 견줄 수 있을만한 국력을 갖고 있습니다’하고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에 므낫세를 낳아서, 잘못 키워서, 자기 사후에, 므낫세가 왕이 되어서,

남유다 전체를 우상숭배로 몰고 가게 한 원인제공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히스기야는, 15년 더 산 것 때문에,

남유다 백성들이, 결국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에, 단초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크니까, *지금 ‘은사’에 대해 설교하는 중.

그것을 자랑하고, 대외에 내 보이다가,

그 남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이나 지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교만하게, 나도 모르게 부지중에 말하다가, 자랑하다가

우리가 그와 같이 사탄에게 늘 당하는 것입니다.

그 틈으로 사탄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주신 은사 때문에, 자기 자랑에 빠진다면..

차라리 아예 아무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의 형편이,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자랑은 교만에서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나는 이런 인간이야’ 하며 부지중에 나를 드러내고 싶어했기 때문에,

사탄이 그 교만에 금새 틈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를 파멸로 몰고 갑니다.

 

제가 더 살아서 뭐 하겠습니까.

뭐 육신을 더 즐길 일이 더 남았다고.. 그런 미련이 저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신이 더 즐길 일, 더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습니까?

그게 다 ‘자기중심적 우상’인 것입니다.

저처럼, 그냥 빨리 천국에 불러주시기를 소원 하십시오.

 

그러나 정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자원해서 가실 자신이 있으시면,

그제야 하나님께 더 오래 사는 것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인간이, 오래 살아서 뭘 어떡하겠습니까.

제가 더 성화되고, 주님을 더 닮아가는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 말고는,

제가 더 오래 살 이유가 없습니다.

 

회개하고 성화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은사보다 중요하고, 사역보다 더 중요합니다.

 

오히려 오래 살아서, 제가 더 미친 짓을 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 전에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그것도 복입니다.

 

여러분이 사사기에 보시면, 기드온은,

3백 용사로, 미디안의 10만 용사를 물리친 후에,

나중에 말년에 보면, 에봇 우상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음란하게 그 우상숭배를 하도록.. 방치했습니다.

 

삿8:27,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그가 에봇 우상을 만든 것은, 자기를 높인 것입니다.

그 에봇(제사 때 입는 예복)이, 여러 가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히스기야, 기드온 같은 훌륭한 사람도 말년에 넘어질 수 있는데,

저와 여러분은 오죽 하겠습니까.

한 가지 다행이라면, 우리는, 그들처럼 크게 유명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게 정말 다행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자기를 깨뜨려야 합니다.

 

처절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지 않으시면,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시면,

우리 자아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마음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주 조금도 약해지지 않습니다. 죽는 날 동안 나를 뒤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도, 그런 소리를 자꾸 듣게 되면,

그 신이 되고 싶은 내 잠재된 욕망이, 살살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말로가

처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성경에, 또는 교회역사에 많습니다.

 

그래서 은사를 받은 사람은, 끊임없이 십자가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하고, 성숙되지 않으면,

받은 은사 때문에, 교만해져서, 결국은 철저히 망하게 됩니다.

 

내 안에서 내면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 성숙하지 않으면,

내가 받은 은사 때문에, 교만해져서, 제가 주님께 버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또는 무슨 큰 일 하는 것을, 너무 구하지 마세요.

내 마음에 탐심과 욕심이, 십자가에 처리되지 못하고, 아직까지 무분별하고 미성숙한 상태에서

내가 은사와 능력을 크게 받으면, 그걸 내가 어떻게 쓰겠습니까?

 

-내 자랑하는데 쓰고

-나를 신으로 높이는데 사용합니다.

루시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은혜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진리로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들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14

 

그런데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거의 95%정도는,

은혜에만 머물고, 진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진리로 가려면, 자기를 부정해야 되니까요.

 

우리는 자기를 절대로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주님께 은사와 능력을 받아서, 나를 드러내고, 한 자리 하고 싶은 것인 나인데,

어떻게 그것을 부정하겠습니까.

그래서 은혜는 받았지만, 거의 진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명의 길을 가는 동안에, 수치와 모욕을 밥 먹듯이 먹되,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기뻐하고 맞이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못 갑니다.

 

<자아부정>과 <성령의 열매>는 아주 짝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를.. 기도만 해서는 못 받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 안에서 절대로 성령의 열매를 못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그저 40일 금식하고 그래서 절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40일 금식기도한 사람,

금식 마치고 며칠 못 가서, 그 은혜를 다 사탄에게 뺏기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습니다.

 

금식할 동안에는 세상에 그 얼굴이 천사같이 빛나고,

세상에 예언 등의 은사가 충만한데,

금식이 끝나고 나서, 자기 자존심하면 한 번 탁 건드리니까,

확 하고 독사가 그 속에서 나와 가지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 40일 금식하며 받은 은혜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게 은혜만 받고, 진리로 아직 나아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아에 대해,

자아 처리를 하시는 하나님, 나의 옛사람을 처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사람들은,

굉장히 믿음이 견고한 사람들입니다.

 

만세만석 열린 곳(견고한 곳, 예수님)에 내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이란 반석위에 집을, 우리는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은사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짓는 사람입니다.

곧 무너집니다. 왜냐하면 아직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냥 제 감정에 의해서 교회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절대 순종을 못 배운 사람입니다.

 

순종이란 것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하기 싫은 것을 하라고 그럴 때, 내 속에 있는 본성이 뽀록납니다.

얼마나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나고, 아주 그냥 다 뒤집어엎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게 들켜져야 집니다. 그래서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회개할 줄 모르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시킬 때,

‘나는 누구 때문에 시험들었다’며 오히려 공격합니다.

 

자기의 죄성이 들켜지면, 겸손히 회개해야 될 터인데,

왜 거꾸로 나옵니까?

오히려 다른 사람을 잡으려(비난) 합니다.

 

이게 다, 은사/은혜만 바라고 신앙생활 하면서,

십자가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받은 큰 은사/ 큰 은혜 때문에, 나중에 크게 넘어진다니까요!

 

여러분 ‘내가 상처 받았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아주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면 받을수록, 기쁨이 샘솟듯이 내 가슴속에서 충만하게 올라와야 합니다.

그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핍박, 곤란, 가난, 멸시, 수치를 기뻐하는 단계,

사도바울이 나는 기뻐하노라. 내가 환란과 곤고와 이런 것으로 인해서,

내가 약해 질 때,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오시는 시간이므로,

내가 강해지는 시간이므로.. 나는 오히려 기뻐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런데 환란이 없으면, 어떻게 내가 확인이 됩니까?

‘주여, 하나님 환란을 없애 주세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만 계속 기도한다면,

그냥 절에 가시옵소서. 염불을 드리세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있어야 될 것을 아시는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환란과 궁핍으로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주님께서는, 나의 영원한 것에 관심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자식으로서 저 나라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는 것을 준비하는 기간이니까,

내가 너를 이토록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그래서 환란과 궁핍을 주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라고요!

 

절대로 하나님은, 뭘 달라는 우리 기도에, 응답을 잘 안 하십니다.

‘하나님 주시옵소서!’ 하다가, 너무나 내 기도가 응답이 안 되니까,

상처가 심해서 원한이 사무쳐서, 제가 한 동안 하나님하고 아주 원수가 되었다고요.

그래서 제가 자폭을 하고, 하나도 기쁨 없이 한동안 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날마다 주시옵소서, 문제 해결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여러분 마음에 쌓이는 것은 원한 밖에 없습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께 ‘쌍시옷’이 막 나옵니다. 하나님이 너무너무 내 간구를 안 들어주시니까요!

 

여러분이 남편에게 뭘 해달라고 부탁하는데도, 여러 번 부탁해도 안 들어주면

나중에는 이가 갈립니다. 쌍시옷 자가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어떻게 해서 악한 독사 같은 바리새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죄가 보이지 않고,

대신에 남의 죄가 보이는 사람은, 그래서 비판하게 되는 사람은,

예수 믿고서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여기까지는 은혜인데, 진리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삼천포로) 빠져버린 것입니다.

 

은사를 받으면.. 타락하기 쉽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런 사람은, 자기 의 때문에.. 타락하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여, 나는 저 죄인과 같지 않고..’

만약에 이런 마음 가지시면, 여러분은 바리새인입니다.

 

저는 과거에 맨날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여 저는 저 죄인과 같지 않사오며

저는 십일조도 드리고

저는 저 미친 인간과 같지 않사옴을 감사드리옵나이다.’

이게 바로 왕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내가 은혜로, 예수를 믿어도,

십자가를 통해 진리까지 나아가지 못하면.. 그 형편이 더 안 좋아지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바리새인이면, 예수님을 쳐 죽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을, 에서처럼, 핍박할 수도 있습니다.

이삭을 핍박했던 이스마엘처럼요.

 

항상 주님을 따라가는 그들을 놀리고, 비웃고, 조롱합니다.

‘아니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왜 만사가 안 풀리지?, 하는 족족 망하지?’

‘아니 저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면서.. 자식이 왜 저래?’

‘아니 저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왜 병들어?’

그렇게 이스마엘, 또는 에서처럼.. 성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주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여, 제가 아주 마귀새끼임이 드러난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가야 하는데, 이 방향으로 가지 않고, ‘내가 안 그런 것을 감사합니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너무 기쁜 것입니다.

자기가 탄로 나는 것이, 너무 기쁘면서, 회개에 이릅니다.

 

‘오 주님, 진짜 나는 괜찮은 줄 알았더니, 아주 썩어 문드러졌네요.

전적으로 타락했네요. 아주 구제불능입니다. 저는 주님이 없이는 지옥 갈 인생입니다.’

이 고백이 항상 있어야 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판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아니라, (바래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나는 못 살 인간입니다!’ 하고서, 자기가 죄인의 모습으로서

그 분의 긍휼을 받으러 나아가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 쉬어가는 곳 ........................ 

 

  

◑신앙이 성숙되면, 영적 권위가 생깁니다.    

 

 

시105: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이 일찍 꿈의 계시를 받았지만,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발이 쇠사슬에 묵임을 받았습니다.

그 예언이 응할 때까지, 그런 고난이 계속되고,

십자가를 통해서, 성품이 변화되는 고난의 기간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꿈과 환상을 통해서, 좋은 예언을 받았다고,

하나님이 놀라운 비전을 주셨다고.. 그게 좋아만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꼬에 차이는 것 같은, 환란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과 비전이 다 이루어지는 기간까지,

묶이고, 환란을 통과하는 역사가 있어야 되는 것을 좀 아시옵소서.

 

그냥 ‘예언을 받았으니, 그대로 될 거야!’ 하면서 퍼질고 앉아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아부정의 단계를 통과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휴 내가 자아를 부인해야지, 내가 부인해야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신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회개 하면서,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

‘내가 염려를 안 해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제가 염려를 안 하려고 해도, 자꾸 염려가 되네요. 믿음이 없는 저를 용서하소서.

주님이 제 염려를 멈춰주셔야 되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그렇게 고백할 때, 어느 샌가 주님이 내게 임하셔서,

나를 그렇게 ‘믿음으로 염려를 극복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게 즉시 응답되지 않더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염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임하시면, 내 주위가 평정을 찾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 주위가 막 술렁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의 여파 때문 입니다.

 

내 마음이 출렁이면, 내 주위에 출렁이는 문제가 막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주님을 뵙고, 주님이 내게 임하시면,

먼저는 내 마음이 평정을 되찾고, (환경은 아직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더라도)

내 마음이 평정을 되찾으면, 그럴 때는 내 주위가 다시 평정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서 권세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나와 함께 역사하시니까

내게 그런 영적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지혜로, 모든 문제들을 처리해 나가게 됩니다.

 

주님이 응답하시는 방식은, 무슨 기적적인 환경의 급변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보통의 경우, 지혜로 응답을 주십니다.

 

내가 신앙이 어렸을 때는, 즉각 즉각 응답을 하시지만

조금 지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지혜 wisdom를 주시고

내가 그 지혜로, 당신과 함께, 막힌 담과 꼬인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야지 맨날 애기처럼 우유만 빨면서, 주님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직접 처리해 주시기만 기다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빌립의 딸들의 예언과, 바울사도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을 보면,

내면에 계신 주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그 예언을 <적용>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기했습니다.

 

빌립의 딸들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행21:11

그러나 자기 자신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것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바울사도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것이 나에게 뭐가 그렇게 큰 일이겠는가!’ 생각했던 것이지요.

평소에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만일 바울사도가 ‘결박 당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서

‘아 그래? 그러면 당연히 가지 말아야지! 가더라도 다음 기회에 가야지!’

그래서 가이사랴에 눌러 앉았으면..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세요!

 

그가 그렇게 피해서, 자기 목숨을 구했고,

하나님을 위해서 고난 받기를 기뻐하지 않았다면,

그가 그 후부터 사도로 귀하게 쓰임 받았겠습니까?

아마 마귀의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을 때, 분변하시기 바랍니다.

그 예언이 나를 위한 예언인가, 주님을 위한 예언인가..

-그게 만약 나를 위한 예언이라면, ‘거짓 예언’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뭐 사업 잘 되고, 부자 되고.. 그런 예언은 거짓 예언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성경을 읽다가, 자기 스스로 마음에 크게 부딪히는 말씀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게 <자기를 위한> 말씀을 받았다면, 잘못된 것을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분별의 척도를 아시겠지요?

 

그리고 받은 예언, 받은 말씀을

<적용>함에 있어서도,

내 유익을 추구하며 적용하려고 할 때.. 엉뚱하게 적용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방향으로 적용하고,

내가 십자가를 지는 방향으로 적용하면.. 나중에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어떤 사람인가요?

나만 위하는 자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자인가요?

이것을 잘 분변하셔야 합니다.

 

사탄은 내 유익만 위해서 살게 하는데, 그것이 미혹입니다.

나만 잘 되고, 내 자식만 잘 되고, 그저 나에게만 집중하게 하는 것이

마귀의 역사입니다.

기도도 그런 식으로는 하지 마십시오. 그 나의 탐심에 마귀가 역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를 신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그게 바벨탑이고, 그게 가인이 되는 길입니다.

 

제가 미안한 얘기를 드리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은혜를 받으면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우리가 막 사업을 시작하고, 그럽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복으로, 다윗의 복으로 듬뿍 듬뿍 내게 부어주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려고 하니까, 주님이 저를 보시고 얼마나 예뻐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그렇게 사업/사역 시작한 사람치고, 안 다친 사람을, 나는 거의 못 봤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명분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내 실질적 이익이 함께 추구되어 지고,

거기에 내 영광도 함께 구해지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엄마들이 자기가 쉬고 싶을 때,

그저 아이들 데리고 어디 여행 떠납니다.

명분은 그럴듯 하지요. 아이들 여행 시켜준다고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위하기보다는,

먼저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께 순종을 배워가면서,

내 성품과 신앙인격이 성숙되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끌고 가시는가를,

그 주인되신 주님께 귀를 기울여야 되는데,

우리는 주체가 항상 “내가”입니다. 주체가 주님이 아니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리라 하는데..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가 내세워지면, 내 중심이 되면서,

‘내가 주님 영광을 위해서 사역을 확장했으니.. 축복해 주소서!’ 합니다.

 

그래놓고서는 우리가 주님께 한탄합니다.

자기 소원대로, 자기 마음대로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정반대로 결과가 나타나니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 사역의 성공이 아니라, 내 성품의 성숙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역/사업의 성공 대신에, 오히려 실패를 주십니다. 회개하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 치는데,

우리 사역/사업이 이렇게 잘 안 되게 하십니까?’ 하고 대듭니다.

 

그러면 주님은

‘내가 언제 너보고, 내 영광을 위해서 살아라고 특별히 지시했느냐?

네가 나를 이용해서, 어떻게 잘 되어 보려고, 내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자원한 것이지..’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굳이 우리가 변명을 하자면,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교육을 받았습니다.

 

신년이 되면 ‘주님을 위해서, 큰 일을 계획하라. 그리고 기대하라.

할수만 있으면 헌금도 많이 드려보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

이런 식의 설교를 들으면, 마음에 감동이 임하면서, 꼭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부흥사님께 날마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이것이 내 유익을 위한 것인가/ 내가 십자가 지는 길인가?

분명히 분변을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역이나 사업을 추진/성취하기 전에,

은혜에서 출발해서, 결국은 진리로 나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내 거짓된 것을 늘 책망하시는 그 성령님의 역사, 이것이 진짜 역사입니다.

아멘? 아멘!

 

◑노후 준비는, 물질이 아니라, 신앙성숙입니다.

 

우리는 내 유익을 위해서, 날마다 날마다 내 유익밖에 안 구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오셔서, 오늘도 나를 권면하시고 책망하십니다.

 

진리로 가게 하기 위해서, 진리로 가지 않으면, 우리는 은혜에만 머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우리가 쭉정이가 되어서, 버림을 받습니다. 아주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늙어서 쓰잘데 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아주 자식들에게도 원수가 됩니다.

자녀를 영적 권위로 축복하는 자가 아니라, 자녀에게 밉상만 됩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진리까지 나아간 늙은 부모는, 그 자손을 축복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이 성숙된 노인은, 돈이 수중에 많지 않아도, 어디를 가나 그 자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자식들 사이에 이간질도 안 합니다. 자녀들 사이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은혜에만 머물렀던 사람들은, 늙었어도 신앙이 어린아이인 사람은,

자식들도 오그라지고, 자기도 오그라지고,

가는 데마다 문제만 일으키고, 축복권도 없고, 그렇게 비참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부터라도

누가 나를 권면하거나 책망하거나 그럴 때 여러분들이,

‘주님 그렇군요. 정말 주께서 말씀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그 감사가 나올 때, 여러분은 그 사탄의 손에서 벗어나지고,

그 자유와 평화를 여러분들은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