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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 앞에 엎드려져야

LNCK 2013. 1. 30. 20:40

◈오늘 주님 앞에 엎드려져야               계1:17~19                    출처보기

 

 

 

 

 

녹취문입니다. 내용이 있습니다.

교정은 시간 관계상 생략합니다. 각자 하십시오.

 

 

▲몇 해 전에, 한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한강에 던져서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멀쩡히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자식은 죽이면서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자살할 수가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기자가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메이면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아니 기독교인이라면서 어떻게 그것도 살인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자 더 끔직한 대답이 튀어나왔습니다.

‘살인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살은 용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교회에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이 살인 면허를 준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하게 된 것입니다.

 

▲정말 암울했던 그 중세시대의 최대의 타락이 뭐였습니까? 면죄부였어요.

어떤 죄를 지어도 돈주고 면죄부를 사면

그리고 헌금을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이 악법 때문에

유럽은 암흑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수많은 범죄로 인해서

그냥 면죄부만 사면 죄가 사해진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악법이였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에 우리가 한번 구원 받으면

우리의 죄로 인해 멸망 받지 않는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큰 해독이 되고

현대 기독교인들이 지탄을 받고 O독교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되었습니까.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을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키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제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여기에 35절에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란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오는 핍박이었어요.

 

그런데 그 핍박도 절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장래일이나 현재일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어떤 사탄의 세력도

그리스도 그 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그 끊을 수 있는 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죄입니다.

 

여기에 만약에 어떠한 죄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면은

우리가 살인 면허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까?

그 무엇도 사랑의 끈에서 끊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죄는 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죄라는 말이 여기 롬8장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바울은 이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라는 말이 안 들어갔어요.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죄를 밥먹듯이 지으면서도 나는 구원을 받았다

나는 한번 받은 구원은 잃어 버릴 수 없다.. 고 하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잘못)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은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이 없었다.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지 못한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 지니라’

 

그래요, 이 말씀을 우리가 보면서

요한은 ‘형제 사랑’이라는 열매로 영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류의 가르침은, 성경이 일관되게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받으러 오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자기는 택함을 받았고, 자기들은 선민이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아무리 외쳐 봐도

열매가 없으면 버린자다.. 라는 거에요.

 

열매를 맺지 못하면, 나무 밑에 두어진 도끼로 잘라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나는 선택받은 자고,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자라고 감히 얘기 할 수 있습니까?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알 수 있어야 되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뭐라고 했습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과 선한 열매 사이에 그 어떠한 분리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우리가 생명을 얻고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으면, 우리는 그 빛을 감출수가 없어요.

 

어둠가운데 나타나고 그 생명력은 나타나는데

열매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마치 면죄부를 받은 거와 같고, 살인 면허를 받은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여러분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저는 그 줄거리를 봤어요.

그런데 그 밀양이라고 하는 그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내용이 뭡니까?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하나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에 이제 아들을 학원에 보냈는데

그 학원 원장이 이 여자가 돈이 많은 줄로 착각하고, 아들에게 인질로 잡아갑니다.

그리고 돈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돈을 갖다 줬는데도 며칠 후에 아들은 싸늘한 시체로 발견됩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무너지는 겁니다.

남편도 잃었지, 자식도 잃었지.. 홀로된 마음으로 약국에 가서 진정제를 사 먹는거에요.

신경 안정제를 사먹는 거에요.

 

그런데 약국에 계신 약사 집사님이 ‘이 약만 먹으면 중독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주님께서 치료함을 주실 수 있습니다. 교회 다닙시다.’

그 전도를 받고 교회에 가가지고, 통회자복하고 회개를 합니다.

그 허전한 마음은, 그 아팠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함을 받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도 자기 아들을 죽인 학원 원장을 미워하는 증오심이 막 계속 있는 거에요.

 

‘하나님 용서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주셨으면, 나도 그를 용서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기도 하다가, 드디어 이분이 용기를 냅니다.

정말 용서하기 힘들지만, 내가 감옥에 찾아가서,

살인자를 만나가지고 ‘당신을 용서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한다’고 고백하기로 작정합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잠도 안 오죠.

그런데 용서해야 된다는 주님의 명령을 받고

이 여자는 정말 힘든 길을, 주님이 하라고 했으니까 순종하고 가요.

교도소에 가서 면회를 신청하고 그 살인자 앞에 둘이 앉습니다.

 

물론 가운데 유리를 두고 그 구멍 뚫린 유리 앞에서 서로 얘기를 합니다.

‘저가 여기 오는 길에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 거기까지 얘기를 하는데

 

그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할렐루야! 나도 예수 믿고 구원 받았어요.

나한테 와서 용서구할 것도 없어요. 나 구원 받았어요.’

너무 쉽게 얘기해버리는 거에요.

 

정말 그 얘기를 했을 때, 안에 있는 사람이 ‘제가 당신의 아들을 죽였어요.

제가 돈에 눈이 어두워갔고 살인을 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얼마나 가슴 아프게 통회 자복을 해야 되는데,

자복도 없고, 회개도 없으면서, 구원 받았다는 거에요. 얼마나 편리합니까!

 

이 자매가 거기서 충격을 받은 거에요.

‘이게 진정한 용서인가? 이게 진정한 구원인가?

하나님 앞에 고꾸라지지도 않고, 회개도 안하면서

나 구원 받았다고, 나 세례 받았다고, 나 성령 믿는다고

그렇게 쉽게 살인죄까지도 넘겨버리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됐다. 기독교의 구원론에 문제가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교회에는 가요. 교회 뒷자리에 앉아가지고 목사님이 용서의 설교를 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 라고 하는데

그 여자가 갑자기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라고 유행가를 불러대는 거에요.

아수라장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용서를 쉽게 할수 있다는 건가라는 거에요?

어떻게 주님 앞에 고꾸라지지도 않고

정말 주님 앞에 죄를 자백하지도 않고

그렇게 쉽게 머리로 이해하면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바라바가 살아난 바라바가 나다

그것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너무 쉽게 사탕발린 말을 외쳐대는 거에요.

 

모든 사람이 양심의 가책이 있고 죄에 대한 이런 것이 있었는데

아 목사님이 그 말을 들으면 할렐루야 나 구원받았네

나는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구나.. 이런 구원론은 잘못된 것이죠.

▲제가 익명으로 얘기 하겠습니다.

한 집사가 교회 반주를 했어요. 그 자매가 얼마나 교회에 충성한지 몰라요.

새벽기도도 반주하고, 주일날 금요집회도 반주를 하시는데

참 귀한 자매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반주를 하면서 눈물을 뚝뚝뚝 흘리면서 우는거에요.

 

무슨 사연이 있나보다 물어 봤어요. 남편은 그 교회 안수집사였어요.

전주에 살다가 제주로 이사와가지고 먹고 살게 없어가지고

이분이 정말 소를 키우면서 농사일을 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교회에 충성했습니다.

 

집사되고, 안수 집사도 되고, 교회 장로로 임명할 만큼 교회에서 인정을 받았어요.

그런데 이분이 학원을 다니면서 시험을 봐가지고

공무원 몇급 그 자격을 얻게 된 거에요.

그리고는 제주시에서 잘나가는 공무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깐 어떻게 그 조그만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 큰 교회로 가자..

그런데 부인은 내가 이 교회에 반주를 하는데 여기에 사명이 있는데 어디로 갑니까

그러면 당신은 그 교회에 가요, 나는 다른 데로 갑니다.

그리고 남편은 큰교회를 갔다가, 거기서 미스 성가대를 만납니다.

 

그 여자하고 사랑에 빠져요.

부인하고 결별을 하고, 부인이 그 얘기를 듣고,

‘당신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가!’

 

그때 남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온지 아세요? 내 앞에서도 그 말을 했어요.

‘나는 칼빈주의, 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습니다.

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고, 내가 어떤 죄를 짓던지 나는 멸망 받을수 없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천국 갈때까지 나의 삶을 지키실 것입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고 ‘정말 기독교가 문제가 있구나’.

성경에 어떤 그런 말이 있냐고요? 어디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저는 그때 마음이 슬퍼졌어요.

아 정말 한국 기독교 이러다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생각해 보세요, 미스 성가대하고 같이 살면서

그 교회의 성가대하고, 주일학교 교사고, 그렇게 교회 생활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어서, 그 교회 목사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세요?

부인을 놔두고 자식을 놔두고

부인은 얼마라 괴로운지 자살을 2번식이나 감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아픔을 주고 아내 자식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자기는 미스 성가대하고 같이 살면서 말이에요

그것이 정말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다 죄인이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지금도 그 교회 다니고, 지금도 성가대하고,

지금도 주일학교 교사를 해요.

 

▲성경은 구원과 선한 열매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결코 가르친 바가 없습니다.

사실 인간은 두 관계를 규정하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죄의 용서의 복음과 선한 열매를 맺음은 결코 분리 될수 없습니다.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금은 반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열매를 맺는다고 다 진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진리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열매에 기초해서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구분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열매도 없으면서

한번 받은 구원은 어떤 상황도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고 외치고만 있다면

사실 처음부터 구원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니 그렇게 구원의 열매도 없으면서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심만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삶은 구원의 열매가 따라오지 않았으면서

구원받았으며 하나님 자녀같이 살아야지..

 

어떻게 죄는 밥 먹듯이 지으면서, 타락은 타락대로 하면서

그렇게 죄악과 세상과 짝 하여 살면서 구원 받았다고

어떻게 감히 예수님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인지

감히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냐고요.

 

▲여러분 아까 제가 읽었던 로마서 8장을 보세요.

그래요 모든 것 사탄도 죽음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어요. 그러나 죄악은 끊습니다.

 

만약에 죄악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정말 이단이 나오는 거에요.

적그리스도가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떤 죄를 짓고도 살인면허를 가진 거에요.

면죄부를 가진 거에요. 여러분 그것이 기독교입니까? 방종이지 그것이 기독교입니까?

 

성경을 무시해도 그렇게 무시하는 바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신학자나 어떤 학자나 그 사람들을 따라가면 안 되요.

그들도 인간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되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저는 사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 였어요.

 

그래서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어서 ‘사랑받는 제자’라고 자기 자신을 익명으로 이야기 할만큼

그는 사랑의 사도 였습니다.

 

요한일서 이서 삼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그를 세 번씩이나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거에요.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만큼 그는 사랑의 사도 였습니다.

 

다른 제자는 다 도망갔지만 그는 죽어도 죽으리라 라고 끝가지 십자가에 따라갔던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마지막 유언했던 그 십자가의 유언을 직접 귀로 들었던 요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유언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유언까지도 그거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이란 핍박은 다 받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좋다하는 만큼, 그는 밧모섬에 유배당해서 그곳에서 노예생활을 합니다.

 

그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석수 일을 하면서

그 무거운 돌을 등에다 지고 나르면서

정말 예수 믿는 거 하나 때문에 완전히 망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오늘 성경을 보세요.

인자앞에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가 고꾸라져요.

 

여러분 17절에 내가 볼 때 그 발앞에 업드려져 죽은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으로 내게 업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상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합니까?

 

아니 그렇게 거룩한 사람이에요. 아니 늙은 사람이 그것도 유배지에 가가지고

밧모섬이라는 그 조그만 섬에서 감옥살이를 하는데

죄를 지으면 무슨 죄를 짓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거기서 도둑질을 하겠어요?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 유배지에서 죄를 지으려고 해도 지을 것이 없는 그런 감옥살이를 하고 있어요.

그런 그가 주님 앞에 고꾸라져요. 주님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됩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너무너무 중요한 얘기할거에요.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엎드려져 죽은 자가 되지 않으면

언제인가 죽은 후에 주님 앞에, 그 심판자 앞에서 엎드러져 죽을 거에요.

 

그때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이를 갈아도 기회가 없어요.

우리 모두 사람은 죽습니다. 죽은 후에 우리에게 심판이 있어요.

 

지금 살아있을 때에 이 시간에 엎드려져야 되고 이 시간에 우리가 죽어야 되요.

이 시간에 주님 앞에 회개하고 가슴을 치면서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지 않으면

여러분 죽은 후에 이를 갈며,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더라도 늦어버린 거에요.

지금 해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제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아세요?

제가 거기서 이 설교를 하면요

거기 있는 사람은 설교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속 통곡을 하면서 울어요.

두 시간 세 시간 울어요.

 

그리고 정말 정말로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치면서 회개한 후에

그들은 집으로 가요.

 

그런데 이 서양은 어떻습니까? 한 시간 안에 다 끝내야 되요.

1부예배가 있고, 2부예배가 있어서 그 한 시간 안에 다 끝내야 되요.

 

그러니 설교말씀을 듣고 회개가 또 미루어 져요.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러내리는 말씀이 많아요.

이게 현대교회의 비극입니다.

 

이 현대교회가 머릿속으로만 진리 이해하고

사랑으로 손과 발로 나타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너무 시간에 매여 있고 너무 바쁘고

정말 회개보다 더 급한 게 있으면 갖고 나와보라 하세요.

 

이 세상에 회개보다 시급하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축복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니 요한같이 그렇게 거룩하고 온전하고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가 성경에 다섯권을 쓴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까지 쓴 사람이에요.

 

그렇게 온전한 사람도 주님 앞에 고꾸라졌어요.

하물며 우리 같은 죄인은 얼마나 주님 앞에 고꾸라져야 될까요?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설교준비를 하다가 컴퓨터 앞에 엎드러 졌어요.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정말 성경을 보면요, 악한 사람은 깨닫지를 못해요.

그러나 회개할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축복인지 몰라요.

 

여러분 오늘 집에 가기 전에, 교회를 나오기 전에

이게 나의 인생의 마지막 교회다

내가 주님 앞에서 이제 엎드려져 이제 주님이 나를 부르면

오늘 저녁에 주님이 나의 영혼을 부른다면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죄 짓다가 주님 앞에 서겠어요? 그때 주님 앞에 고꾸라지겠어요?

그때 죽은 자 같이 되겠어요?

 

살아 있을 때

요한도 지금 밧모섬에서 살아있을 때 고꾸라지고 죽었기 때문에

그는 천국가가지고 왕관을 쓰고 주님 앞에 생명을 얻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되요. 구원의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서 12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연단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요. 잡job도 잃어요.

하버드 출신들도 직장을 못 잡아가지고 이력서 들고 방방 뛰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연단의 기간입니다. 어려워요.

지금 미국에 얼마나 농작물들이 타격을 입었는지

날씨가 더워져가지고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깐 미국도 농작물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된데요.

전세계에서 40% 50%를 먹여 살리는 농업국가 미국이, 농작물이 바닥이 났대요.

 

창고문을 열어서 기자들에게 보여주는데 텅텅 비었습니다.

원래 거기에 가득가득 차야 먹고 살텐데.. 비었어요.

미국도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된데요.

 

그런데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나라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미국으로부터 그렇게 수입을 해왔던 나라들인데 말입니다.

 

연단 중에 연단입니다.

이제 내년에는 음식 값이 폭등하고, 먹는 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많이 곤고해지고

먹는 것에 의해서 사람들이 이제 힘을 잃고

이제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시기에 우리가 왔습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될까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런 것을 기도해야 되나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정말 주님 앞에 고꾸라져서

주님 내가 정말 주님 앞에 내 죄를 자곡하고 회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하고 깨끗하게 되는 무리가 있다면...

 

악한사람은 더 악해지고 깨닫지 못하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방탕과 방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그들은 모일 때마다 회개를 했습니다.

모일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도전을 받고

정말 주님 앞에 고꾸라지고

정말 주님 안에서 그러한 복음의 참진리를 깨닫고 거듭난 삶을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열매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자기 중심적으로 성경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가 아니라

성경을 자기중심적으로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안심하라’고 합니다.

 

그걸 인간이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가 하나님이니깐, 구원 받았다는 거에요.

 

암만 자기 자신이 나는 부자다 부유하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네가 눈먼 것과 헐벗은 것과 굶주린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자기가 구원 못 받았으면서 구원 받았다고 그러면 편리주의입니다.

쉽게 쉽게 예수 믿는 거에요.

 

눈물 콧물 흘리면서 금식하면서 그런 원시적인 종교를 탈피하고

이제 시원한데서 아름다운 집을 짓고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그 반주를 들으면서

우리가 부유하고 배고픈 것이 없고

이제 내영혼아 주안에서 평안할지어다.. 그 편리주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 절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아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도 하나님말씀을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하나님 말씀을 보고 ‘구원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얘기하면은요

거기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요 이단이래요!

 

아니 지금 정말 회개하고 주앞에 나와서 고꾸라지고

지금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자고 하니깐요

그 얘기를 했던 세례요한 목을 잘라다가 쟁반위에다 받쳐요.

 

아마 저는 죽어도 좋아요, 하나님 말씀을 전하다가 죽어도 좋아요.

정말 우리 교회가 회개해야 되고, 정말 우리가 주 앞에 돌아와야 되고

정말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잖아요.

 

주님 오시기 일보직전인데, 신부에 맞는 우리가 되어야 되는데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사도 요한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정말 인간 중에서도 그만큼 의로운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할만큼

요한은 그렇게 산 신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기 전에 주 앞에 고꾸라집니다. 주 앞에 송장처럼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른 손을 내게 얹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계1:17

 

여러분 주님 앞에 정말 통해 자복하고

여러분의 죄를 다 통회하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나의 죄를 깨닫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주님께서 ‘두려워 말라’ 우리에게 손을 얹으시고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줄 믿습니다.

 

정말 이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

저는 이 평강을 어렸을 때, 제가 잠깐 소경이 되었을 때

‘형님 나 아무래도 죽을것 같애. 내가 영양실조 걸려서 소경이 되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살지 못할 거 같아.

형, 나 업어다가 교회에 데려다 줘. 교회에서 죽을래.’

 

그래서 형이 저를 업고,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 가가지고 거기서 고꾸라져가지고

그 앞에 통일자복 하면서 내 눈이 띄어지고, 그래서 저가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 때 죽었거나, 눈을 뜨지 못했으면, 지금 주의 종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저의 어린마음에 그 주님의 용서함의 그 평강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이셨어요.

 

이 세상에 유일하게 죄가 없는 한분,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도 ‘내가 죽었다’고 얘기해요. 계1:18

 

그분도 죽으셨어요.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죄 때문에, 예수님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요.

 

제가 어린나이에 교회에 와가지고 울면서

‘하나님 왜 어린 나에게 밥을 못 먹어서 굶주려서

영양실조로 소경이 되어서 나를 여기서 죽게 합니까?’ 원망을 하던 제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보혈을

그 어린나이에 제가 복음을 들었으면 얼마나 들었겠어요?

 

그래도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들었던 그 말씀이 생각나서

주님 앞에 나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이 뭔지 아세요?

예수님이 유대병정들에게 잡혀서 죽은 것이 아니고

로마병정들에게 잡혀서 죽은 것이 아니고

빌라도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그렇게 나오지만

그가 빌라도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구나. 내가 예수님을 죽였구나!’

‘나(예수님)는 죽은 자다!’ 계1:18

 

여기서 죽었다는 얘기는

‘요한아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단다!’ 거기에서 우리는 소망이 있는 거에요.

정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세요?

 

우리 집사님을 위해서 죽었고 장로님을 위해서 죽었고

우리 어린아이를 위해서 죽었고 아니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고요.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더라고요.

 

그것을 깨닫고 나니깐

주님께서 저에게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고, 너를 위하여 부활하였고

이제는 내가 승천하였느니라.’

 

▲여러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1:18

 

주님은 사셨습니다.

이제는 지옥갈 영혼들 천국갈 영혼들이 나눠집니다.

그 사망과 생명의 열쇠를 가지신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정말 주님앞에 고꾸라진 사람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었다는 그 사람,

정말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입은 하나님의 성도라는

이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속에 새기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요한이 죽었다가 엎드려져서 죽었다가

예수님이 손을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노라 하고 주님께서 그를 살게해 주신 것입니다.

 

▲‘용서해주세요!’하고 기도해서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삶은 용서받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고 요한이 고꾸라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그의 삶에 있어서 첫 번째 변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명을 받습니다. 여러분 그 사명을 보십시오. 계1: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여러분 그 노년에 밧모섬에 유배를 당해가지고

밤이 되어야 집에 지친 몸으로 간신히 돌아옵니다.

 

그 허름한 정말 초가집 같은 그런 곳에 와가지고

전기가 있어요? 등불이라도 있겠습니까?

그 어두운 곳에 그 노년의 눈이 침침하고 피곤하고 힘든 그 역경 안에서도

주님께서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것을요

 

요한계시록이 작은 성경이 아닙니다. 22장까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요한계시록을 써보려고 해 보세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눈이 침침해가지고 그 당시에 안경이 있겠습니까?

피곤하고 몸이 쳐지고 힘든 가운데도

그가 하나님의 이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그리스도의 계시다’라고 하면서

거기에서 자기가 보고 듣고 한 것을, 최선을 다해 썼어요.

 

그의 삶을 보면요 정말 그가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도움을 받고,

그 밖의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어요?

 

그가 사명을 받고 가난한가운데

왕궁과 같은 그 호화스러운 컴퓨터 앞에 자판을 두드리면서 그가 쓴 것이 아니에요

 

그 당시에는요 양피지에다가 글을 써야 되요.

양피지를 얻기 위해서는, 양을 잡아야 되요.

그리고 그 양피에다가 한 장, 한 장을 요한이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가 이런 것을 보면서

사명은 귀하지만, 사명을 감당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구나!

이런 것을 알아야 됩니다.

 

▲누가 예수 믿는 것을 쉬운 것이라고 얘기해요?

누가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넓은 길이라고 얘기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고, 많은 사람들은 쉬운 길들을 따라가요.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날마다 나를 부인해야 되는 좁은 길입니다.

험한 길입니다. 문도 좁아요.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거기는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하고 가야되는

우리의 사명의 길입니다. 믿습니까?

 

오늘 이 본문 말씀을 보면요 인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13절에 촛대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띠를 띠고..

 

인자.. 여러분.. 이 인자라는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이 깊이 묵상해야 될 단어입니다.

이 인자는 우리말로 말하면요 사람의 자손이다 라는 말입니다.

 

자손 자식 인자 인자하면 뭐 인자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온유하시고

그런 인자로 오해하기 쉬운데

인자는 인간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세요, 볼 수 없습니다. 만질 수 없습니다.

영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천국에 가도 계시를 받아도

성경을 어디를 봐도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세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습니다, 영이십니다.

우리가 볼 수 없다고 성경을 말씀 합니다.

 

성령님은 어떻습니까?

바람과 같이 능력도 있고 힘도 있으시고 살리기도 하고 감동 감화를 하시지만

성령님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우리가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면 보이는 하나님이 계셔요.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내가 천국에 갔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고, 천사만 왔다갓다 하면 얼마나 삭막할까요?

 

그런데 거기에 보이는 하나님

인자,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계셔요.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정겨운 일입니까!

 

내가 눈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눈이 있고,

내가 손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손이 있고,

내가 몸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몸이 있고..

아니 그러게 말이에요.

 

육신대 육신으로

물론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님을 뵈옵고 영광가운데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요 우리의 육신까지 범하여

우리의 육신도 몸이 부활하는 그 부활을 우리에게 주셔요.

 

주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만져보라면서

가시관을 보여주십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사람이 전부 완전합니다.

소경도 눈이 띄어지고, 앉은뱅이도 걷습니다.

 

천국에 가면 절름발이도 정상인이 되고,

핸디캡(장애우) 피플도 천국에가면 온전해져요.

 

▲그런데 천국에는 단 한사람 단 한분이 영원한 불구자로 남아있습니다.

누군지 아세요?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옆구리 손발에 못 박힌 그 못 자국을

여러분이 천국 가서 그 못 자국을 보아 알겠네 라고 하는 그 찬송가처럼

여러분이 예수님의 못 자국을 보게 되요.

 

그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던 그 형상을 우리가 보게 되요.

옆구리 찔렸던 그 상처를, 아물게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을 거에요.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은혜를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은 영원한 불구자가 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손과 발에 못을 박으신 거에요.

우리를 온전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 부유하신 하나님이 거지가 되시고

그분이 죽으시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여러분 그거 아나요? 여러분 인자라는 이 말이

천국에 있던 예수님이 이 땅에 오기 전에는

예수님이 육신이 입고 있지 않으셨어요.

 

그러나 그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와 하나처럼 되셨고

우리의 죄를 지고 영원한 불구자로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그분은 영원한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손과 발과 옆구리에 상처를 가지시고

천국에 부활하셔서 오셨을 때, 천국에 있는 모든 천사들이 걱정이 생겼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다 온전한데

어떻게 영원토록 불구자로 인간을 사랑하시되 저렇게 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피한방울 물한방울 쏟으시고 죽으셨는데

그 귀한 그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 전해야 되는데

 

이 구원의 소식을 천사들이 이것을 누가 전할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12제자를 세우고 왔노라!’

 

예수님 그 12제자가 입 다물고 겁이 나서 도망가고

그 분들이 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방법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어야죠. 주님이 이렇게 희생을 하고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렇게 구원할 기회를 주셨는데 다른 길이 있어야죠.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그들을 믿는다!’

 

우리가요 복음을 안 전하면,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할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은 보좌에 앉아서 지금도 우리를 믿고 있어요.

‘너희들이 안 전하면, 내가 죽은 것이 헛되고

내가 죽은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너희들이 전하지 않으면, 내가 영원한 불구자가 된 것이 헛것이 된단다.

 

너희들이 안 전하면 천사도 안 전하고,

어떻게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단다.’ 여러분 그것을 아세요?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에요.

 

▲요한이 죽었다가 엎드려졌다가

그가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은 얹으시고

그를 내가 죽었다가 산자다 너는 두려워말라

그에게 평강을 주시면서 뭔 얘기를 합니까?

 

‘이제는 적어서 기록하라. 네가 보고 듣고한 것을 기록하라’

 

여러분 이 성경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생명을 바쳐야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책 한 권 써본 적 있어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요 그것도 온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적어야 되는 요한의 사명,

그 노년의.. 그것도 유배지에서..

 

여러분, 복음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한사람이라도 전도해 본적 있어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나만 구원받고 감추어두면

주님께서 있는 것도 빼앗고, 어두운 곳에서 슬피울게 된다.. 라고 얘기합니다.

 

여러분 구원받았다고 자신하지 마십시오. 남겨야 됩니다.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현대 교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은 오히려 면죄부를 가지고 살인면허를 가졌는지

더 과감하게 죄를 짓고, 더 큰일을 짓고

신문기사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거에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에요.

여러분 우리가 긴장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방종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그 긴장 그 긴장감속에

주님이 나의 영으로 언제라도 부를 수 있고

내가 언제라도 주님 앞에 갈수 있다 라는 그 긴장감을 가져야

그 긴장감속에 살아야 우리가 정결하신 신부로 살아요.

 

그 긴장감을 잃어버리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고, 모래도 있고..

그런 세상 사는 것에, 보이는 것에 푹 빠져가지고

영적인 그 긴장감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방탕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 초대교회 교인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산지 아세요?

2000년전 사람들이 요한도 마지막에 뭐라고 한지 아세요?

‘주님 오시옵소서 아멘 오시옵소서!’ 그 고백가운데 그 긴장감속에 살았던 이유는

그렇게 안 살면. 우리 인간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됩니다.

 

▲요한같이 그런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적을수 있었던 그런 성결한 사람도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안에서 그렇게 정말 있는 그대로 다

생명을 다해서 받아 적었던 그 사명자도

주님 앞에 고꾸라져야 했고, 엎드려져야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 우리 같은 죄인이 얼마나 엎드려져야 되요?

얼마나 우리가 주님 앞에 죄인임을 자백해야 되요?

 

얼마나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욕심 때문에..

 

여러분 성경을 보세요.

실족하게 하는 자들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는게 낫다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소자들에게 마음을 아프게 했냐구요?

 

여러분 구원이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에요.

좁은 길이에요. 힘든 길이에요.

 

그러나 생명의 길이니깐, 주님오시기전까지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면서

긴장감을 가지고 언제 내가 넘어질지 모르고

언제 내가 실족할지 모르고, 언제 내가 무너질지 모르니깐

조심조심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안에서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어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어느 날 집회에 갔다가 내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나는 이제 세례도 받았습니다. 세례증서 보세요.

이제 나는 세상에서 어떤 짓을 해도 되요. 면죄부가 생겼어요.’

 

술먹어도 되고, 하물며 살인해도 되고.. 그것이 진정한 구원입니까?

여러분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정말 내가 주 앞에 고꾸라진 적이 있는가?

그 거룩했던 요한도 주님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나는 나의 삶 가운데 한번이라도 이 땅에서 죽은 적이 있는가?

 

이 땅에서 죽지 않으면,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죽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고꾸라지고, 지금 이 땅에서 회개하고,

지금 이 땅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고 회개를 하는 것이 낫지,

 

영원한 지옥에서는요, 그 상황에서도 그 사람들도 회개해요, 후회해요.

그러나 기회가 없어요. 성도여러분, 지금이 은혜 받을때입니다.

지금이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

 

▲정말 주님 안에서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정말 죽은 자가 되고

회개하고 정말 주님 안에서 길들어지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세요.

 

영원한 불구자로 계신 그 인자하신

주님께서 인자가 되신 주님께서 내가 불구자로

내가 영원한 불구자가 된 이유는.. 너희들을 온전케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전하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