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서 진리로! 시51:17 12.11.11. 출처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uIyrYbcsPC4&list=PLqj2NNjP3q8gkj0PeeP46WGiRdnDLqlyY&index=29
▲서론/ 제가 하는 설교 내용이, 굉장히 어렵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삶속에서 묻어난 내용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많은 헌신을 하셨고, 하나님께 많은 연단을 받으셨겠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굉장히 거칠게 다루셨습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그런 삶을 살게 하셨기 때문에,
아마 평탄한 삶을 사신 여러분들과 조금 공감이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여러분들도 어떤 ‘사도적 부르심’(주의 종의 부르심)을 받으신다면,
여러분들이 제가 했던 말들을, 아마 인생의 과정 속에서 공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적 부르심’이란 것은, 그만큼 뼈를 깎는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깊숙한 그 십자가의 아픈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셔도,
끄떡없이 순종할 수 있는 제자는,
온전히 자기를 죽은 자와 방불하게 여기고, 그분만을 따라가는 그러한 길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그렇게, 주님께, 자신을 십자가를 지는 자리까지의 순종으로
드리기를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먼저 제가 제 인생스토리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23살에 예수님을 믿고, 한 달 만에 제가 하나님 앞에서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인생을 살고 싶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죽고 싶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불의한 세상에서 지쳤고, 이제 제가 하나님 앞에까지 와서,
제가 적당히 살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 하나님 저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제 삶을 지탱할 수 없겠습니다... 죽을 것 같습니다
라고 제가 밤새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하고,
통곡이 또 제대로 안 나오면, 제가 제 자신을 얼마나 때렸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그 이튿날 보니까, 온 몸에 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저는 세상을 살아갈 그러한 의욕이 없었고,
그리고 어떤 그 하나님을 찾는 그 간절함이 너무나 강해서,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제가 믿은지 한 달 만에,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가 그 한 달 만에 신약성경을 다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읽은 중에서 제게 특별히 기억났던 말씀은,
‘네 눈이 범죄하면 네 눈을 빼내고, 네 손과 발이 범죄하면 자르고’ 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 그렇다면 자르시옵소서. 제 눈을 한 쪽 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정말 원합니다.’ 라고 기도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지 한 달만에 방언을 받고,
그 다음부터 저는 완전히 어제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하고, 그리고 금식으로 일관했습니다.
아마 당시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분 말씀에, 자신은 365일 동안에 200일은 안 먹었다고,
그 영향을 받아서 인지.. 또한 제가 어서 빨리 능력 받고 싶어서 그랬던지..
정말 저는 밥도 안 먹고 금식하며 철야하며, 교회에서 늘 잠도 자고
늘 엎드려 있고 그랬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영안이 열렸는지요.
얼마나 많이 (은사적으로) 주님을 접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던 제가 결혼하고는, 남편을 닦달했습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처럼 보여서, 좀 강력히 기도하라고..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만약 계속 기도를 안 하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40일 금식기도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장신대 학부 3학년 때의 일)
그때 40일 금식 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은, 목회자 없는 시골교회로 가서,
갈릴리와 나사렛의 삶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제 아들이 7개월, 딸이 3살이었습니다.
산 하나만 넘으면 지리산 무주구천동인 아주 깊은 산중에,
마을 전체가 13가호 밖에 없는 곳에서, 저희가 목회하면서 6년을 지냈습니다.
제가 그 시골에 가서 살면서, 그때 제가 너무 놀라웠던 것은,
제가 서울에서 여전도사를 하면서, 얼마나 주님을 배반했던가..
얼마나 세속에 더럽혀진 사람이었는지가.. 깨달아졌습니다.
마치 목욕탕 가면 때가 불려서 떨어지듯이..
제가 시골에 가니까,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은, 나의 모든 죄들이 다 드러났습니다.
저는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했는데,
교회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제가 얼마나 타협했는지요..
그리고 세상의 윤리적 지성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서
제가 헛물 켰던 것이 (그분들을 동경하고 따라가서 나도 유명해지려고 했던 모습이)
제 속에서 많이 보여 졌습니다.
▲시골에 가기 전에도, 또한 시골에 가서도
제가 그렇게 금식과 철야를 많이 했으니까,
영안이 열려서 많은 것을 보고,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라든지, 그런 것이 투시처럼 제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어떤 때는 주님이, 그 사람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제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종종 경험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앞서, 이런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고..
즉, 늘 십자가와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보면서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1. 저는 처음에 율법주의 신앙, 아직 은혜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가서, 제가 놀라운 것을 발견한 것은,
결혼하면서 제가 이제 내 속에 있는 인격/ 죄성이
아주 온 전체로 드러나는 것을, 제가 보면서,
그것을 율법주의적으로 안 하려고, 그 죄를 안 지으려고 금식을 더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과 싸우고 나면, 그래서 제 감정이 상하고 나면, 죄의식이 듭니다. 그죠?
그것을 간단히 주님 앞에 내 죄를 시인하고,
즉 ‘주님, 제가 이렇습니다. 이런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에 부탁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율법주의>로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제 의지로, 그 죄를 다시 짓지 않으려고,
주님 앞에 이 죄송스러운 일을 하지 않으려고, 더 몸부림을 치니까,
금식을 더 해야 되고, 더 철야해야 되겠다.. 이렇게 율법적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내가 행위로/율법으로/내가 온전해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입니다.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면서, 제가 그 간단한 것(회개와 은혜의 역사)을, 몰랐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내 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탄로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였거늘..
세상에 그것을 간단하게
‘주님 제 실상이 이렇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를 도와주소서’ 라고 고백했으면,
너무나 간단하게 주님의 은혜가 내게 임했을 것을..
그걸 모르니까, 저는 더 금식과 철야로.. 율법으로 나간 것입니다.
▲은혜아래 머물 때, 거룩해 집니다. (이 검은색 단락, 푸닌 목사님 설교에서 스크랩, 출처)
저는 오래 동안, 긍휼 mercy와 은혜 grace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아래 구절에서, 긍휼과 은혜가 같이 나오고 있는데요..
히4장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두 개념이 비슷한 것 같지만, 물론 다릅니다.
긍휼이 구약적 개념이라면, 은혜는 신약적 개념입니다.
긍휼은..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은혜는.. 죄를 극복overcome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롬6장14절에, 네가 은혜 아래 있을 때,
죄가 너희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약에서 성도는,
under mercy가 아니라, under grace에 있습니다.
히4:16과, 롬6:14 두 구절을 연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서, 주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긍휼(즉, 죄의 용서함)만 받는 것이 아니라,
히4장16에, 은혜까지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긍휼 mercy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는 개념보다는,
보다 더 적극적인 개념이죠?
죄의 용서받음 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죄를 극복한다,
그래서 죄가 우리를 아예 지배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깊이 묵상할 때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의 지배’ 하에 놓이는 것입니다.
히4:16에 은혜를 말하면서, 특별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때’가 무슨 때를 말합니까?
앞선 15절과 연관해서 볼 때, 그것은 ‘죄의 유혹을 받을 때’입니다.
즉, ‘때를 따라 돕는 은혜’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시험과 유혹을 받아서 넘어지려 할 때,
십자가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에 어떤 힘이 있다고요? 예, ‘유혹과 죄를 극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심지어는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실 때, 그것을 극복하는데 은혜가 필요하셨습니다.
저 자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본체이셨지만,
그 분이 세상에 사실 때에는, 하나님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으로서 신성으로 사시기를 일관하셨다면,
그분은 결코 우리 삶에 모델이 되실 수 없습니다.
눅2장에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제가 예수 믿고 나서, 패배를 거듭한 후에, 깨달은 진리입니다.
제가 이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승리하는 신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2:40
The grace of God was upon Jesus!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 위에 부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롬6장14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죄가 그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그가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예수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죄가, 예수님을, 다스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날마다 주님의 <은혜>가 내 위에 머무르게 될 때..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2. 한국교회가 은혜에만 머물렀고, 진리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은혜로 <칭의>에 머무는 사람이 있고, 은혜로 <진리/성화>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둘 다) 충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14
그런데 대부분 기독교인들의 거의 95%정도는,
은혜에만 머물고, 진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진리로 가려면, 자기를 부정해야 되니까요.
우리는 자기를 절대로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고 싶어 합니다.
주님께 은사와 능력을 받아서, 나를 드러내고, 한 자리 하고 싶은 것인 나인데,
어떻게 그것을 부정하겠습니까.
그래서 은혜는 받았지만, 거의 진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자기 자존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사명의 길을 가는 동안에, 수치와 모욕을 밥 먹듯이 먹되,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기뻐하고 맞이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못 갑니다.
거의 99%의 성도들이 은혜에만 머물러있지,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부인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도들을 치리하고 계신지,
성령의 역사는 어떤 것인지..
이게 완전히 혼돈되고 뒤죽박죽 되어서, 그냥 엉망이 되어졌습니다.
▲아니 제가 아마존에 가서, 암투병으로 6년을 죽음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성령께서 제게 아주 클리어(명확하게) 가르쳐주신 것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에서 이런 잘못된 흐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우리 한국교회가 율법(주의)에 머무른 것,
-그리고 은사가 샤머니즘과 합해져서, 율법이 유교화 합해지면서, 윤리화 시키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되어야 한다.. 이런 가운데 성도들을 속박했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것을 답습하면서, 배운 대로 순종하다가 보니까,
제가 금식을 많이 해서 골다공증 걸려서, 그때 제가 뼛속 농도가 60%까지 내려갔습니다.
걸음을 거르면 제 무릎에서 삐그덕 소리가 날 정도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서, 그렇게 희생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그 자기 의(율법주의)로 나아가려 했기 때문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제가 금식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완전히 쇠약해지고, 지금 암에 걸린 것도 아마 그런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하도 금식을 많이 해서 영양실조에 걸려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장이 엉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목사님께 배운 대로 목숨을 다하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그때는 제가 잘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주님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아마 그런 데(율법주의에) 빠져서, 고통당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과정을 겪게 하셨는가요? 왜 허락하셨는가요?
그런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건져내라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것을 체험하라고 제게 허락하신 줄 믿습니다.
(믿음과 은혜로 <칭의> 받는 수준까지만 이르고,
십자가와 은혜로 <성화>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뜻인 듯)
한국교회가 항상,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와 능력을 항상 구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과 은사!
그 부스러기(능력과 은사를 가리킴)들을 우리는 간구합니다.
은사와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보면,
경쟁심, 남보다 나아지려고 하는 우월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은혜까지는 머물렀는데,
진리로 못 갔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수준까지 이르렀는데, 은혜와 회개로 성화되는 수준까지는 못 갔다는 뜻인듯)
진리로 못 갔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목사님들도 모르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올바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우리 개신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니까,
그냥 믿기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순종을 배워본 적이 없고, 배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교회에만 충성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복만 받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완전히 모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보혜사,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그랬습니다. 요16:8, 13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가게 하시기 위해서, 진리의 성령의 역사는, 심판입니다.
날마다 심판하시고, 분초마다 우리를 심판하셔서
우리의 죄악을 폭로시키셔서, 아주 나의 실상과 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고,
그래서 참빛이 온전히 들어와서.. (회개하고)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죄성과 실상이 드러나게 될 때,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도리어 공격을 합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은 다 마귀새끼, 나를 넘어지게 하는 마귀,
나를 방해하는 마귀’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의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공격 받는 그것이 주님의 역사인데..
그 사람을 통해서 내 죄를 폭로시키시고, 나 됨을 폭로시켜서,
나의 죄성을 인정하고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제 꼬라지는 이것밖에 안 됩니다.
주여, 이 시궁창 같은 마음이 언제나 깨끗이 청소되겠습니까?
그러나 소망 중에 즐거워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이게 다 비워져서, 주님으로 충만할 때,
왕같은 제사장이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용서와 사랑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그 분의 은혜로, 그분의 사랑으로,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냥 주님이 나를 감동시키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내가 그 원수와 맞서서 싸우는 것은, 마귀의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타락의 가장 큰 열매는 <내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사탄이 주는 나의 왕같은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우리의 자존심이 들어있습니다.
언제나 내가 왕이 되기 원합니다.
내가 말을 한 마디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그 말에 따라서 척척 움직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막 화를 냅니다. 자기가 왕이니까요.
가끔 저는 제가 마귀인지/아닌지.. 종종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아담이 타락할 때, 역사한 마귀가 내게도 똑같이 역사하는구나!’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아비는 마귀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그 거룩한 유대인들에게,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켰던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문제를 일으키고,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내게 붙여주십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그 놈을 탄로시키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제 속에 있는 마귀를 때려서, 내 쫓으시고, 당신이 들어가셔서,
재창조를 하시려고 그렇게 주님은 역사하시는데
우리는 그냥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다 마귀새끼입니다.
자기가 마귀니까, 다 마귀새끼로 보이고,
그러나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가 <진리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혜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으니까..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3. 기초가 약하면, 건물이 무너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처럼,
날마다 사탄은 우리를 미혹해서, 그냥 하나님의 능력(은사)만 구하게 한 것입니다.
그 은사와 능력이, 기초가 약한데 세워지면.. 상상해 보세요.
우리가 건물을 보면, 기초는 보이지 않습니다. 땅 속에 가려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건물이 높이 올라갈수록, 기초가 약하면 위험합니다. 무너짐이 심합니다.
진리/성화/십자가의 기초 없이,
은사와 능력으로 외적으로 화려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것은,
정말 자살행위, 자해행위와 같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알지 못한 채, 은사와 능력을 받았다고 합시다.
이 안에서 그 놈(마귀)이 어떻게 그걸 사용하겠습니까.
은사자와 무당이랑 같아지는 거지요.
그들은 마귀의 종이 되어서, 마귀가 쓰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의 사랑에서, 예수님의 은혜에 안 엎어질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충만하면, 자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의 크시고 넓은 사랑에,
그 생명력과 지혜가 충만한 그 사랑에.. 자녀가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집 밖에 나돌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율법으로 충만하니까, 찌르는 가시 같으니까, 집안에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래서 너무너무 위험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른채, 은사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저는 강력한 은사자였습니다.
나는 아마존에서 군사같이 살았습니다.
아마존에서 17년동안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내놓고 기도했습니다.
군사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은사라는 것이 남은 살려주고, 나는 죽음으로 갑니다.
십자가를 모르는채 사용하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모른채 능력을 받으면,
내 안에 있는 그 놈devil이, 나로 영광을 받게 합니다. 바벨탑을 쌓게 합니다.
가인의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4. 상처를 받을 때.. 회개의 기회로 삼으십시다.
▲여러분들이 은사와 능력이 있는데, 늘 내 마음에 상처가 생긴다.. 상처를 받는다..
누가 뭐라고 한 마디 하기만 하면, 섭섭하고, 화가 나고, 그러면
그는 육신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아직까지 그 사람은, 은혜에 이르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상처를 누가 받았느냐 하면, 가인입니다. 그래서 살인했습니다.
그의 손자 라멕은 70명이나 죽였습니다. 자기가 받은 상처를 인해서!
‘내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내가 아직까지 주님 은혜에 못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무슨 말을 하는데, 제 가슴이 아프고 상처가 되면
너무 깜짝 놀랍니다. ‘아 내가 아버지 집밖으로 나갔구나!’
‘어머 주님, 이거 어떻하면 좋아요? 오 주님 용서하세요.’
그러니까 나 한테 상처 주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아버지 집을 나간 게 잘못인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진 내가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앉아있다고 천국에 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적어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바로 여러분들에게 ‘아,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그 쓰레기를 치우시려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노력하고 계시는구나..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나를 새롭게 재창조하시기 위해서,
부득불 이 쓰레기를 치워내실 수밖에 없으시구나.
할렐루야 주님, 너무 땡큐!’ 이 담대함, 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상처가 될 때는 깜짝 놀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상처 때문에,
나는 가인이 될 테니까요.
‘내가 저놈의 마누라 때문에 못 살아!, 저 자식 때문에 못 살아!’
이것은 아담의 말이지, 크리스천의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말을 조사해 봐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라는 핑계의 말이 나오면
내가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든지, 내가 시험에 들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크리스천은 ‘저 사람이 저렇게 고생하는 것은 내 탓이요’ 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직까지 방황하는 것은,
아직 그가 나로부터 주님을 못 느껴서, 내가 변화가 안 되어서,
내가 눈물이 펑펑 나야 합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깜짝 놀랄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날마다 와서 징징 울기만 합니다.
‘하나님 제 남편이 너무너무 속을 썩여요.’ 물론 기도 안 하는 사람보다는 낫습니다.
울면서 기도하다가 자기가 잘못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잠만 자는 사람보다는, 나와서 엎드리는 사람이 더 낫습니다.
그러다가 틀린 것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남편 좀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그러고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너나 변화되세요’ 라고 응답하십니다.
‘네 눈이 똑바로 박혀지면, 네 남편이 너를 얼마나 보호하려고 애쓰는지 밝히 볼 걸?
왜 너는 네 요구대로, 네 탐심대로, 네 남편을 쥐고 흔들려고 그러는 것이여?’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능력을 구하지 마십시오. 은사를 구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구하십시오. 모든 은사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능력과 은사를 구하는가 하면, 우리 마음속에 야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그래도 좀 은사 하나 더 받아서, 좀 왕노릇을 해보고 싶은 것,
이 야심이 우리 속에 다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율법에서 해방이 안 되었기 때문에,
자유와 진리를 모르고,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 속에 탐심과 야망과 경쟁의식과 내 이기적인 동기가 ..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은사를 받아서, 은사를 받으면 자기가 높임과 존경을 받으니까,
그래가지고 총알받이가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 총맞아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없이 막 우리가 행동하면,
‘저 사람 훌륭해, 저 사람은 아마존에 가서 그렇게 살았대..’
그렇게 내가 존경을 받고, 내가 속에서 어험 그러면
하나님이 그냥 총을 쏘십니다. 그래서 제가 죽는 것입니다 .
바벨탑을 쌓아서 이름을 내 보려고, 그 야망을 만족시키려고
그냥 부흥사들이 능력을 구해라고 너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막 이를 빡빡 갈면서, 누가 은혜를 더 받을까봐 시기심을 내면서,
이 더럽고 추한 난장판을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했습니다.
▲이제 그만하고 주님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십자가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시옵소서. 나는 십자가를 모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제 자신을 부인하려 하는데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네 자신을 부인하고 따라오라는데, 아 주님 나는 안 돼요.’
우리가 그것부터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제 속에 죄성만 보입니다.
잔인하고, 죽이고 싶고, 밉고, 때리고 싶고, 밟아버리고 싶고,
치워버리고 싶은 것, 이런 악독 밖에는 내게 없습니다. 주님!’
이 상하고 찢긴 마음을 그분한테 보여주실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그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내 꼬라지를 벌거벗겨놓고..
그래서 주님도 십자가에서 벌거벗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 나는 당최 변화가 안 되니 어떻하면 좋습니까, 주님 말고는 안 됩니다.’
이 상한 마음을 주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51:17
‘주여 나는 안 됩니다. 노력을 해도 안 됩니다.
내일이면 또 폭발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안 됩니다.’ 하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자기 상한 것을 가지고 나아가면,
그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본회퍼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경건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는 음란한 행위요!’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자기 경건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는,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입니다.
자기 의를 구한 바리새인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다만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날마다 오늘 아침에도 순간순간,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는 우리가 폭로가 됩니다.
그의 연약한 모습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누구를 보든지, 그를 통해서 나를 본다는 것입니다.
‘아, 오늘도 나를 회개시키시려고 저 사람이 네 모습이다!’ 라고
아주 그냥 들이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남을 판단(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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