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자, 육에 속한 자 고전2:13~16
https://www.youtube.com/watch?v=z1QvVcysXQY&list=PLqj2NNjP3q8gkj0PeeP46WGiRdnDLqlyY&index=23
◑신령한 자는,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고전2:15절,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의 뜻을, 먼저 잠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판단이나 비판을 받는 것은.. 살다가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타인의 판단과 비판이, 자기에게 와 닿거나,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령한 자,
즉,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명심하십시다.
내가 영적으로 성숙한 자인가요, 아닌가요?
그것은, 위 본문에 의하면,
내가 판단, 비판 받을 때의 태도에 의해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판단이나 비판을 받아도,
그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자기 마음 속 깊이,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것들은, 사람에게서, 육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판단이 아닌 이상,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자기 염두에 깊이 둘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 즉,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상태에 들어간 사람,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어떠한 상처와 어떠한 두려운 일을 만나도.. 그것이 자기에게 놀람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연단이요, 나를 십자가로 이끌기 위한 ‘은총’(?)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기 어려운데,
그가 나를 죽여 주니.. 얼마나 한편으로 고맙습니까.
그 판단과 비판의 정체를 모를 때,
아주 깜짝 놀라가지고 우리가 허둥대는 것이지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즉 신령한 사람들은
어떠한 일에도 궁금해 하거나, 당황해 하거나, 그것이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대신에 그것은 ‘살다보면 마땅히 있는 일’이라고.. 그냥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신자가 반드시 당하게 되는 일’로 기록되어 있음을.. 그대로 믿습니다.
◑나는, 신앙 여정의 어디까지 왔는가요?
▲제가 수년 동안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되지 아니하며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2:2~4.
이 말씀에 걸려가지고, 저는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왜 사도바울과 나는 다른 것일까?’
보니까, 사도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는데,
나는 그냥 <지혜의 말, 내가 그냥 깨닫고, 내 생각에 그럴 것이다>라는 것을
설교로 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는 도대체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하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 고통을, 수년 동안, 아주 진통을 겪었습니다.
성경보기가 너무 너무 무섭기도 했습니다.
‘왜 성경에 나온 사도와, 나는 이렇게 격차가 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 생각에 좋은 대로, ‘이게 하나님의 뜻일 것이다.’
이러고 행동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상, 이것은 마치 우상의 신상과 같을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내 주관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 신상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육신이 겨우 살아있었으나,
저는 언제나 죽음을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내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고독하고.. 세상이 위로 할 수 없는..
그러한 심령을 제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보니까,
왜냐하면 말씀하고 내가 틀리니깐
‘왜 바울사도는 이러시고.. 왜 나는 이럴까?’ 하면서, 제가 깊이 고민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어느 정도, 영적인 여정가운데 와있는 것일까?’
‘어느 정도, 계시에 대해서 깨닫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내가 죽으면, 얼마만큼 (영적 성숙에, 그리스도의 형상에) 와 있은 것일까?’
이런 것에 대한 염려와, 아픔이.. 너무나 절절했습니다.
여러분도 죽음을 대면하게 될 때,
저와 비슷한 고민을, 심각하게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주님과 나의 관계가 급하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남들이 나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영적인 상태를 체크하도록 도와주니까요.
남들은, 나에 대해, 이말 저말 해서.. 내 상태를 항상 체크 해주잖아요.
그러므로 그들이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에요.
사람을 못 만나면 심심한거에요. 왜냐하면 내 상태, 내 수준이 체크가 안 돼요.
‘내가 도대체 얼마만큼 와있는 사람인가,
어느 정도 주님과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까다롭고 못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체크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깐 기뻐하세요. 까다롭고 못된 사람을 만나시면
‘아, 내가 체크를 받을 시간이 왔구나!’ 이러면서 고마워해야 됩니다. 그렇죠?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한다..
과거의 개역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라고 했는데,
개역개정은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그런데 이게 과연 무슨 뜻일까요?
▲먼저, 바울은 고전2:13a절에
(우리가 가르칠 때는) ‘오직 성령이 가르치신 것으로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생각에 좋은 대로 ‘내 생각에 그게 옳으니, 주님도 그럴 것이다’
이런 것을 전하고 있지,
정말 ‘성령의 나타남’, 정말로 ‘예수그리스도의 풍성’,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것을 우리는 나타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나를 건드렸다 하면 ‘우이씨’하며, 그냥 당장 베드로처럼 바로 칼을 뽑잖아요.
누가 우리를 건드렸다 하면.. 그냥 욕밖에 없고, 짜증밖에 안 나옵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거꾸로 말하자나요. ‘저사람 때문에, 내가 시험 들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그런 소리는 초신자 때나 하는 얘기인데, 늙을 때까지 계속 하는 거예요.
그의 삶에, 신앙 성숙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메시지>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 얘기를 하면..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고.. 오히려 저를 잡아먹으려고 해요.
‘왜 위로되는 말은 하지 않고, 왜 쓸데없는.. 상처 주는 얘기를 하느냐?’고 따집니다.
▲이어지는 고전2:13b절에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변한다.’
이것은 ‘기도해서 영분별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서 2:13a절에서,
‘우리는,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가르친다’
고 했고, 이어서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령한 것’은, 신령한 은사, 또는 성령의 은사를 뜻하지 않고,
신령한 가르침을 뜻하는데..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고린도전서 전반부의 전체 문맥을 통해서 볼 때,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뜻합니다. 즉, 그 성품이 영적으로 성숙된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그 품성, 성령의 인격적 열매는,
영적이지 못한 사람,
즉 ‘육신에 속한 사람’은 아무 것도 이해를 못해요.
그리고 성령의 인격적 열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을 해도..
도무지 알아듣지도 못해요.
그리고 오히려 상처를 받아요.
‘회개해야 된다, 십자가로 가야 한다.’ 라고 말씀을 전하니까요.
▲우리는 그저 달콤하고, 그냥 자기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신앙생활 하는
그 가인의 자리, 그 라멕의 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벨이 되어 본 적도 없는 거에요.
우리는 상처만 받았다고 말하고,
그래서 위로만 받으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제는 내가 예수의 생명을 얻은 후로는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누구의 말 한 마디에 ‘상처받았다’ 이런 것은, 그냥 내가 가인입니다.
이런 것이 내 속에서 들통 나는 표시입니다.
속히 아벨의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TV 연속극을 조심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많이 보지 마세요.
거기에는 모두 <자기 자아 충만>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 입장을 내세워서,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전쟁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보는 사람들은
‘아, 세상 살려면, 저렇게 살아야 되나 보다’ 하면서, 모두가 교육을 받습니다.
‘자아의 죽음’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자아의 살아서 충만함’에 관한 교육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연속극에서 ‘자아가 죽어서’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면.. 연속극이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출연자들이,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사위는 사위대로
모두가 각자 자아가 충만해서, 서로 싸우고 헐뜯어야
그게 연속극이 재미있어지고,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시청률이 올라가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자기 자아 충만>으로 나아가고,
성경은 그렇게 <자기 자아 죽음>으로.. 정반대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 고전2:13b,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로 분변한다’는 구절에서
여러분이, 그 말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신령한 것’이란,
예언 은사, 영분별 은사, 신유 은사 등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가르치신 말로,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십자가의 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성령의 열매를 뜻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전반부의 문맥상 그렇습니다.
육신에 속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사 받은 사람들은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외적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은사자들은, 특별히 신령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착각이며,
오랜 신앙생활 가운데, 그 사실은 공통적으로 검증된 내용입니다.
물론 은사자들을 싸잡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사는, 혼에 주어진 것이고, 영의 깊은 것까지 통달 못해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해요. 여러분이 그 세계를 아셔야 됩니다.
실제로 본문의 고린도전서의 고린도교인들은, 은사자들이었지만,
성숙한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자들은,
성령의 열매, 주님의 성품에 들어가기 까지 너무나 조심하면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쓰지 않으면
그 분이 결국에는 메말라져가지고.. 곁길로 가기 쉽습니다.
나중에 주님한테 ‘이 불법한 자야 나는 도무지 너를 모르겠다.’
그 말이 거기서 나오는 거에요.
우리 신앙생활에 은사도 필요하고, 받으면 좋지만,
그것을 받든지/말든지
신앙생활이 추구하는 목표는 십자가이지, 은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알아요.
분별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 모질고 모진 과정을, 십자가를 지고, 아주그냥 죽을 만큼 목숨을 다해서
자기 자아가 부서지는데 힘쓴 사람들이에요.
사람들에게 밟히고, 찢기고, 상하고, 십자가에 높이 매달리고
이러한 것을 다 겪어내면서 그들이 지내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어느 과정에 서있는가? .. 그것이 환하게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변한다.’ 이 말씀은,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변한다’는 말씀인데,
신앙이 성숙한 영적인 사람이 되면, 즉,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의 신앙수준에 대해.. 좀 안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분변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등산할 때, 저 정상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밑에서 저만큼 오는 것이 왜 안보이겠어요. 그죠,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쪽으로 가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옵소서!’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하면,
자기가 상처를 받았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합니다.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신령한 것, 즉, 영적인 것,
즉 성령의 열매,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해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은 받지를 못한다.’고 말씀한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자기 뜻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내 뜻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내 문제 해결만 해주시옵소서.’ 하면서
아직까지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이죠.
그들은 성령의 일을 절대 못 받아요. 권면을 못 받아요.
남에게 공격을 받으면, 자기 속에서 그냥 독사가 찌릿찌릿 나오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내가 신의 대접을 못 받았다고 분통이 터져가지고
아주 그냥 난리가 나죠.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 또는 관심 없는 사람은,
십자가 신앙이,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며,
항상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 진정 거듭난 성도는
항상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깐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항상
‘아이고 띨띨이 같아! 지가 입이 없나? 뭐가 없어? 왜 저래 죽은 자같이 살어?’
그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우리는 항상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모든 일을 대하잖아요.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다 바보같이 살잖아요.
같이 대적해서 싸워서, 마귀만 좋은 일 시킬게 뭐가 있습니까?
여러분, 그러십니까?
▲그다음에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여서 깨닫지도 못해요.’↑
빡빡 우겨서 이기는 것만 이기는 것인 줄 알아요.
그래서 십자가에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십자가의 길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이게 육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아직까지 주님의 품성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죠.
그가 진정 거듭났다면, 십자가를 왜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어야 되는 것을.. 왜 모르겠어요?
만약 모른다면, 아직까지 거듭나지 않은 거죠.
우리는 두렵고 떨어야 돼요. ‘내가 정말 거듭난 사람인가? 아닌가?’
그러면 아직까지도 아담이 저질렀던
내가 신이 되고 싶은 마음, 내가 대접받고 싶은 마음, 내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항상 쌈박질 하는 것이죠, 그죠?
남편과 아내 사이, 자식과 엄마 사이가
다 자기 자존심 건드렸다고 난리를 치르는 거잖아요. 그죠?
▲그래서 ‘깨닫지도 못한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 해야 분별하느니라.’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분별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누가 그래서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내 안에 계신 그 주님이 말하시기 때문에
내가 서러워 할 것도 없고 고단할 것도 없어요.
그게 삼손이 밧줄로 묶었지만, 그 밧줄이 그냥 끊어진 것처럼
그냥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의 됨됨이를 이야기 해주는 건데, 내가 왜 영향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성경은 성숙한 신자들에게 보내진 것
▲여러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요,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에요.
그냥 아무나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 십자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성경이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산상수훈이나 서신서 같은 것은
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과한 성도,
복종이 되어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그저 기복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서는
기껏해야 그 말씀을 율법화 해서 순종하려고 해요.
아니에요, 그것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이렇게 지켜라’.. 이런 율법적 요소를 말씀하는게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하고, 성령 안에 거하는 성숙한 영적인 신앙인은
‘이렇게 되어진다. 이렇게 살아진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상보훈, 바울서신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율법대로 지켜라’가 아니라
‘이렇게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살아진다. 변화되었으니까!’
성경은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내진 사람들이, 아무나에게 보낸 것이 아니잖아요.
누구에게 보낸 것이에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토굴에서 살고 유리방황하며
자기 전 재산을 잃어버리고
그 복음 때문에 정처 없이 떠도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에요.
그분들은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인데
우리는.. 주님 믿고 복이나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말씀이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읽으면서
또 다시 율법적으로 받아들여
하지마라고 하니깐 하지마는 거로.. 그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지 말아 지는’ 거에요. - 이게 복음입니다.
‘회개하라’ 이런 면이 주제가 아니라,
‘회개가 되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에게는!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계속 강조하기보다는, 자칫 잘못하면 율법화가 됩니다.
‘예수를 깊이 만나도록’ 인도하면.. 회개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하지 말아 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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