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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3가지 진실한 기도

LNCK 2013. 3. 11. 15:33

◈요나의 3가지 진실한 기도     욘2:1~10      인터넷 설교 녹취, 축약, 편집

 

◑서론/ 요나의 문제점 - 은총의 독점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셔서 거룩한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것을 거부했고, 니느웨 대신에,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풍랑을 만나게 되고, 또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요나의 문제이겠습니까? 왜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습니까?

그것은 은총의 독점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은총을, 독점하려는 의도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부르시면서 복 주셨고, 창대케 하셨고,

그러면서 세상의 복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귀한 복과 은총을.. 요나는, 자기만 (또는 자기 민족만) 독점하겠다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그 부르심, 사명을 거부하게 됩니다.

 

 

◐본론/ 요나의 진실한 기도

 

▲본문 요나서 2장은, 물고기 배속에서 요나가 드린 기도입니다.

요나가 지금 극한 고난 속에 있습니다. 죽음 속에 갇혀 있습니다.

 

‘욘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지옥문 근처, 입구까지 내려갔다가,

이때 요나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욘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이 상황에서 드린 기도가 어떤 기도일까요?

이때 요나의 기도는, 가장 진실된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극한 상황에서 드려진 기도이기에, 가장 진실된 기도였습니다.

 

그가 평소에 드렸던 어떤 기도와도, 다른 기도였습니다.

자기 생명을 다하여 드린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떤 기도를 드리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요나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3가지 음성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 성전의 회복을 바라는 기도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지금 요나는, 자기 죽음을 코앞에 앞두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는데,

당시 요나에게는, ‘성전’은 곧 ‘하나님’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시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이 마쳐질 때, 마침내 우리 삶이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 또한 요나처럼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겠다는 뜻이며, 하늘의 영원한 성전을 바라보겠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애굽 땅에서 구원하시고, 광야 길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하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전의 원래 의미를 아시지요?

성전은.. 성경에서 ‘하나님, 또는 그 임재’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전을 둘러싼 성벽은, 하나님을 둘러싼 ‘성도’를 뜻합니다.

 

계시록의 성전과, 그것을 둘러싼 새 예루살렘 성(벽)은..

바로 하나님과, 그의 신부된 성도를 뜻합니다.

 

에스라의 성전 회복, 느헤미야의 성벽 회복은

무슨 건축사업 이기 보다는, 그 영적인 의미로 볼 때,

하나님 신앙(성전)의 회복, 하나님 백성(성벽)의 영적 회복을 각각 뜻합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한 것은,

그 건물을 바라보겠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고요,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 그 여호와 신앙을 다시 회복하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많은 21세기의 ‘에스라, 요나’들이 필요합니다.

건물로서의 성전을 새로 짓는 것이기 보다는,

참 여호와 신앙, 참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키는 ‘에스라, 요나’들 말입니다.

 

물론 본문의 요나도

한때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지만,

자신이 먼저 ‘주의 성전을 바라보는, 참 여호와 신앙’을 회복한 후에

자기 경험을 토대로, 니느웨 백성들을, 참 여호와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나 같은, 에스라와 같은,

(건물도 필요하지만) ‘참 여호와의 신앙을 회복하는’ 의미로서의

<성전을 회복하는, 다시 짓는, 성전을 다시 바라보는> 지도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요나는 ‘참 성전’을 회복했습니다.

요나가 성전을 잃어버렸습니다.

성전을 떠나 물고기 뱃속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참 성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다녔던 성전, 그가 사랑했던 성전은, 이 물고기 배속과도 같았습니다.

그곳은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무는 곳이며, 우리들만을 위한 곳입니다.

아무리 밖에 폭풍우가 쳐도, 이곳에서만은 내가 편안히 살 수 있습니다.

 

어느새 이 성전은, 이방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오는 것조차 막았습니다.

더 이상 이 성전에는,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찬송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새로운 기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새로운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까지도, 듣지 못하는 성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신에 온갖 장사꾼들의 소리, 양과 비둘기의 울음소리, 이런 소리들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성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는 다 끊어버리고,

내 혼자 보호받고, 내 혼자 누리고, 그러면서 고립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요나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어머니 배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기는 어머니 배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배속은, 위험하긴 하지만, 요나의 <내적>인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도 주의 성전을 바라보시며, 성전을 이루어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출입함으로써

거룩함과 영화로움으로, 여러분 마음 속의 성전이,

정결함과 아름다움으로.. 변모되어 가고 계십니까?

 

혹시, 요나처럼, 다시금 성전을 회복해야 될 처지는 아니십니까?

이왕 성전을 회복하시려면, 다시 바라보시려면,

풍랑을 맞기 전에, 성전을 회복하는.. 실력있는 성도가 되십시다.

 

 

2.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라는 기도

 

요나는, 그의 기도 마지막에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욘2:9

 

요나는, 니느웨로 가면, 오히려 죽게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니느웨로 갔을 때, 그들이 과연 나를 영접하고, 내 말을 듣겠는가?

어떻게 적국 이스라엘 선지자를 받아들일까, 오히려 당장 죽일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을 공격하는 것이 되고,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그들 때문에, 세상이 고통 받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들은 요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시스로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이로 말미암아, 도리어 죽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폭풍우를 만났고, 홀로 남았고, 홀로 고립되었습니다.

 

요나에게 물고기 배속은 마치 무덤과 같았습니다.

내 판단으로 한 것이, 사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를 버리지 않고, 그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마침내 요나는 고백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고백입니다.

 

요나는 구원이 자기 판단에 달린 줄 알았고, 구원이 앗수르 사람에게 달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해 주시는 자만, 비로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가 피할 곳, 자기가 구원 받을 곳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 숨습니다. 물질로, 권력으로, 직업으로 은신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 속에 내가 머물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폭풍우가 다가와도 든든하다고 믿습니다.

 

아닙니다. 폭풍우가 다가오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고,

나의 구원(보호막)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케냐에서 사역하시는데,

원래 군인이었다가, 퇴역 후에 평신도 선교사로 케냐에서 사역하시다가

지금은 목회자가 되셨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체험담입니다.

 

하루는 제게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선교사님이 위독하시고, 오늘밤이 고비’라는 것입니다.

 

케냐에서, 그 날 밤에, 선교사님이 머리에, 괴한의 총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긴급하게 교인들에게 알리고,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저는, 돌아가시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에 총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몇 달 후에, 선교사님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얼마 후에 선교사님이 미국의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반갑게 맞이했는데, 그때 일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교사님은, 시내에서 자기 볼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시골길을 운전해서 가는데, 어떤 사람이 차를 태워달라는 표시를 했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니.. 그를 태워주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케냐인은, 차를 타자마자, 즉시로 권총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운전하겠다고, 선교사를 옆에 앉게 하고,

자기가 차를 방향을 바꾸어, 시내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시내가 가까워지는데, 괴한은, 갑자기 총을 자기 얼굴에 바로 들이대더랍니다.

선교사님이 고개를 돌려서 총구를 피하려는데, 그 순간에 괴한은 방아쇠를 당겼답니다.

 

그만 총소리가 나더니, 자기가 차 조수석에서, 앞으로 퍽 고꾸라졌답니다.

그 순간, ‘이제 내가 죽었다’ 라고 생각했답니다.

피도 계속해서 흘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잠시 기절해 있다가, 깨어난 것이지요.

의식이 아직 있고, 몸이 약간 움직이더라는 것입니다.

피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래서 죽은 척하고, 그냥 계속 엎드려 있었답니다.

 

그런데 괴한은, 그 즈음에 갑자기 어느 집 앞에 차를 세우더니만,

시동을 걸어둔 채로, 차에서 내려서, 어디로 가더랍니다.

 

이때다 싶어서, 선교사님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달려갔답니다.

그 밤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총을 맞았는데, 총알이 (뺨에서) 목 뒤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목의 신경하나 건드리지 않고 빠져나갔습니다. 그래서 사셨답니다.

그 순간 자기 속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더랍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셨습니다!’ 욘2:9참조.

 

그 순간에 어떤 것도 도움이 안 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셨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십니다.

다른 것들이 구원처럼 보이고, 다른 것들이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우리의 생명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달려 있습니다.

 

 

3. 이제는 제가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라는 기도

 

요나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이제 앞으로, 자기가 생명을 얻게 되기만 하면,

사명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요나의 서원입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하나님을 자기 속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되시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내게 맞으면.. 내가 순종하고,

내게 맞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요나는, 자기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방 사람에게 소망이 되고, 이방 사람에게 기쁨이 되고,

이방의 구원이 되라는 거룩한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총들을, 자기가 독점했습니다.

선민으로서, 선지자로서 거룩한 직분,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권세,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특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의 은총들,

 

이 모든 것들,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들, 세상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가졌지만,

 

한 가지 중대한 문제는, 그 모든 은총들을 다 자기가 독점하고,

이방에 나눠주지 않은 것입니다. 나눠주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 은총 안에서 머물기를 좋아했고, 그것들을 혼자 즐기기를 좋아했고,

그러므로 자신을 든든히 세웠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또한 내가 배척하고 멀리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할 때, 내가 가진 것들이 빼앗기게 될까봐 염려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만약 이렇게 배타주의, 또는 기독교 게토주의 신앙으로 나간다면,

우리 모두가 요나의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풍랑을 동원하시고, 물고기 배속에 집어넣어서라도,

우리를 새로운 사명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새롭게 사명자로 태어난 의사

 

서울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신도림 방향으로 약 30미터쯤 걸어가면

이곳이 과연 서울일까 할 정도로, 초라한 동네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집과 집을 양철 지붕으로 이어붙인 쪽방촌입니다.

어른 두 세 명만 지나가도, 골목이 꽉 차는 그런 좁은 곳입니다.

 

동네에 들어서자마자, 동네 전체를 휘감고 있는 악취가 진동합니다.

세상이 숨찰 만큼 빠르게 변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거꾸로 30년 40년을, 뒤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이 듭니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32번지, 쪽방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쪽방촌 골목 한 가운데,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 병원이 서 있습니다.

 

이 병원에 세상에 가장 낮은 곳에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의사가 한 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분을 <영등포의 슈바이처>로 부릅니다.

 

이 병원은 1987년에 가난한 사람의 아버지로 불리웠던

고 선우경식 박사가 무료로 세운 병원입니다.                ☞선우경식 박사 별세 기사

그런데 2008년에 선우경식 박사가 소천하게 되자, 병원도 사라질 위기를 만났는데,

이분이 자원해 부임해 오시면서, 다시 병원이 살아났습니다.

 

이 분은 감염내과 분야의 한국 권위자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가톨릭 의대의 교수, 여의도 성모병원의 내과과장이었고,

유명한 의사였고, 교수였습니다.

 

이분이 2009년 2월에 정년퇴직 6개월을 남겨두고, 교수직을 다 던지고,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이곳에서 보수조차 받지 못하고, 의료봉사사역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말씀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가슴으로 웃는 법을 배웠습니다.

세상에 감사할 줄 아는 삶을 되찾았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바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제가 대학병원에서 교수로, 의사로 살 때는, 생각조차 못했던 그런 말들입니다.

 

아침마다 제가 진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일찍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보수도 없이 묵묵히 청소하시는 분들,

또한 환자를 닦아주시는 봉사자들,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는 말이, 제 입에서 저절로 나옵니다.

 

이들뿐만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그들이 이곳에서 치료받고, 세상 속에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제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그들을 통하여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병원에 종종 들러서 목욕 봉사를 해 주시는 본들도 계십니다.

한 번은 하반신을 못 쓰는 환자가 왔습니다.

 

얼마나 오래 동안 샤워를 못 했는지, 몸 전체에서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그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환자를 씻겨야 했습니다.

 

이때 자원봉사자들은, 환자의 몸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었고,

다 씻은 후에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환자의 표정에는, 더 이상 악취가 없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불과 30분 시간이었지만, 지금껏 제 평생에 보아온 장면 중에,

가장 성스럽고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러지 못했던 제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이, 제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왜 그만 두셨습니까? 왜 이곳에 왔습니까?’ 라고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다만 막연하게 교수 OOO, 의사 OOO.. 이렇게 제 인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의과대학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을 때

‘이제는 나도 개업해서, 돈도 좀 벌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한 때 해 봤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힘들게 공부했으니, 세상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라’

 

제 나이 50줄에 접어들면서, 아버지 말씀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힘들게 공부했으니, 세상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라’

 

구체적으로 뭘 할까 미리 생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2009년 2월에 막연한 생각에서 사표를 냈습니다.

어쩌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 정의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표를 낸 길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하여

중앙의료원장 최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제가 사표를 낸 이야기부터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최 신부는, 이렇게 웃으면서 받아주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빨리 그만두셨네요.

언젠가는  그렇게 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제 무엇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아직은 아무런 계획이 없습니다.’

그분은, 제게, 자기가 전부터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면서

2008년에 돌아가신 고 선우경식 박사님과, 그 병원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이 분이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눈으로

‘박사님 그곳에 가실 수 없겠습니까?’ 하는 그런 뜻을 들었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저는

‘왜 이런 얘기를 제게 진작 해주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바로 그 다음날부터 병원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참으로 많이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몸 아픈 사람들은 치료해 주거나 수술해 주면 되는데,

여기에 사람들은 몸에난 상처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가 더 큰 사람들입니다.

고쳐주기도 힘들고, 또 보듬어주기도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아니면 뜻하지 않게 단 한 번의 실수로 그냥 큰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분은, 한 사람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그도 울었고, 병원 사람들도 다 울었고, 쪽방 사람들도 다 울었던 얘기입니다.

 

이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노숙자나 행려자들입니다.

그들은 돈도 없고, 연고도 없고...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환경이 좋지 않은 분들입니다.

 

이곳에 오기까지는, 아마도 병원은커녕,

약국에서 감기약 한 번 지어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견디다 못해 그들은 이곳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때는 대부분 손쓰기 이미 늦은 때입니다.

 

교도소에서 나와서 이곳 저곳을 떠돌던 A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욱 하는 바람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20년간 교도소에 있다가 나왔지만,

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가 병을 얻었는데, 폐암이었습니다.

그 폐암이 손쓸 수 없는 상태까지 놔두었다가, 결국 우리 병원을 알게 되었고,

A가 찾아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의사도 아니고, 원장도 아니라, 그저 한 사람으로서

당신은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기 위해서, 그의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보호하면서, A는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몸이 견디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무력하게 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울었습니다.

20년 이상을 대학병원에서, 제가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아왔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그의 곁에서,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이곳은, 지금처럼 하루에 1백 명이 넘는

노숙자, 행려자, 외국인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할 일없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가 이들을 품을 수 있는 그런 포용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또 다른 사람들도.. 약자를 품어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마치는 말

여러분, 여러분과 저는 참으로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힘이나 권력,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슴속에 생명을 향한 거룩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화려함을 가져서가 아니라,

우리의 작은 기도를 통하여.. 외로운 생명들이 웃음을 회복하고,

그리고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십자가 지시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들이 참으로 놀랍기 때문입니다.

 

벌써 사순절이 절반이 지났습니다. 남은 시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남은 여생,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요나처럼,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십시다.

  날마다 우리의 삶이, 성전 되도록 힘쓰십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철저히 깨달읍시다.

-은총의 독점이 아니라, 이방에 대해 잃어버렸던 내 사명을, 다시 회복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삶이 마쳤을 때, 우리 모두 주님 닮은 모습으로,

주의 손을 잡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주님, 우리를 거룩한 성전 삼아주셔서 날마다 함께 해 주옵시고,

날마다 아름답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듣지도 않게 하시고, 외면하지도 않게 하시고,

내 뜻대로 바꾸지도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이제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소서

우리를 통하여 이 땅의 생명들이 소망을 얻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