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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3

매우 인간적인 하나님의 종 엘리야 / Kendall

LNCK 2013. 3. 8. 13:47

매우 인간적인 하나님의 종 엘리야 / R T 캔덜 - YouTube

 

◈매우 인간적인 하나님의 종, 엘리야          왕상18:1~46 약5:17,            출처보기, 대강 번역

by R. T. Kendall

 

 엘리야가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라는 고백을 갈멜산, 그릿 시냇가에서 각각 한 번씩 하게 되는데요
 그 뜻은 '지금 여기 이 자리 갈멜산과 그릿 시냇가에는 
 하나님의 종 선지자는 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래 해석은 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 편. 

 

▲제가 영국 웨스트민스트 채플에서 설교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때 제가 선택한 설교 시리즈는 <요나서>였습니다.

 

그때 당시 사람들이 제게 ‘왜 요나서를 선택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었습니다.

‘제 모습이 글쎄 요나와 똑 같아서요! 제가 요나 선지자를 쏙 빼닮듯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요나가 큰 물고기에 삼켜진 것으로부터,

나중에 요나가 ‘자기 의’로 충만해서, 하나님께 분을 낸 것이라든지...

요나의 삶이, 어떻게 그렇게 제 삶과 비슷했던지요..!

 

▲그런데 이제, 제가 웨스트민스트 채플을 은퇴하고 떠나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설교하게 된 시리즈는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이즈음에 저는 깜짝 깜짝 놀랍니다.

제 삶의 모습이, 얼마나 엘리야 선지자와 동일시 되는지요!

 

오해는 마십시오. 제 삶이, 엘리야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이,

그의 특별한 기름부음,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강력히 대항했던 그의 단호함,

기도해서 불을 하늘로부터 내리게 하는 그런 신비한 능력 등

이런 놀라운 능력적인 측면에서.. 제가 엘리야 선지자를 닮았다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엘리야를 닮았다는 것은,

그의 인간적 모습이.. 제 인간적 모습과, 너무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는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러면,

더욱이 보통 사람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특별한 큰 능력을 행한 종이라면..

뭔가 보통 사람들하고는, 좀 달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큰 하나님의 종이,

우리 옆집 김씨 아저씨나, 뒷집 박씨 아저씨와 비슷한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라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말씀했는데, 약5:17.

우리와 인간적인 본성이 똑같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엘리야나 우리나 똑같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글을 통해서,

‘엘리야가.. 나, 또는 우리들과, 인간적 본성이 어떤 면에서 같은가?’

그 점을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나타나셔서, 장차 십자가와 구속사역에 대해서

함께 의논하셨습니다.

 

그 장면에서 보듯이,

모세가 ‘율법 또는 말씀’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엘리야는 ‘선지자 또는 성령’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그 우두머리가 엘리야인데,

우리가 엘리야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인간적 연약성, 그의 인간적 평범성 등이, 발견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는, 연약한 저와 여러분과 .. 동일시되는 인물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평범한, 연약한 인간도.. 얼마든지 불러서, 당신의 종으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본론/ 엘리야의 인간적 연약한 성격 한 가지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심각하게 늘 고민하고, 염려한다는 점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똑같은, (개역성경엔 ‘성정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저도, 여러분 모두도, 늘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고, 자기에게만 집중하잖아요.

하나님 나라의 사역, 다른 사람의 사정.. 이런 것들보다,

 

항상 ‘내 사역, 내 체면, 내 명예’를.. 아끼고 사랑하고 염려하는 것이

우리들, 보통 본성을 가진 인간의 특징이 아닙니까!

 

그런데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우리와 똑같이 그랬다니까요?

성경을 한 번 보실까요?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450 명이로다.’ 왕상18:22.

 

그는 ‘오직 나만 남았다’라고 백성들에게 하소연 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평소에 잘못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지금 잘못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갈멜산의 상황인데,

그 사건이 있기 하루나 이틀 전에, 엘리야는 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궁내대신 오바댜를 만났습니다.

 

오바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라고 했듯이 왕상18:4.

선지자 1백 명을 먹여 살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하나님의 선지자가 최소 1백 명은 아직 남아있었습니다.

아무리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진멸했어도,

‘엘리야가, 자기 혼자 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

하루나 이틀 전에, 그는 오바댜를 만났고, 왕상18:7.

오바댜가 그 사실을, 엘리야에게 숨겼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오바댜를 만나기 전에,

엘리야는 벌써, 소문을 듣고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여호와의 선지자는 오직 나만 홀로 남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엘리야는,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에게만 온통 자기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자기만 항상 귀중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오늘날 저와 여러분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 1백 명을.. 못 봤던 것은 아닐까요?

 

그들도 여호와의 선지자이며,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으며,

이세벨의 비호를 받지 않았으며,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자기와 똑같은 선지자들이라는 것을,

엘라야는 몰랐던 것입니까? 

 

그런데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라는 엘리야의 고백을 들어보면,

전혀 다른 선지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Kendall 박사로부터 처음 듣는 내용인데)

어쨌거나 이런 점에서, 엘리야는, 우리와 본성이 똑같은

자기 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우리와 전혀 다른,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등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한 선지자였지만.. 말입니다.

 

궁내대신 오바댜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동굴에 50명씩 나눠서,

선지자 1백 명을 살린 것만 해도.. 오바댜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도 하나님의 신실한 종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나만 남았습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오늘날 나의 모습이, 또한 우리의 연약한 모습이.. 엘리야에게서 비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고,

다른 사람, 다른 사역자들의 존재는.. 내가 인정하지도 않고,

내 시야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존재인 ‘나’ 말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그들의 존재감을 인정하지도 않는’

이런 삶의 자세나 태도는, 다른 사역자들을 무시하는.. 아주 무례함입니다.

 

그런 엘리야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꾸 연약한 내 모습이, 그의 삶을 통해, 비춰진다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도 야고보가,

그런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고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라고

야고보서를 기록하지는 않았을까요?

 

‘어휴, 그거 너무 극단적 해석, 혹평이 아닙니까?

엘리야 선지자에 대해서, 그거 오해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18:22절의 갈멜산 상황뿐만 아니라,

그 뒤에 한 번 더 나옵니다.

 

그가 갈멜산, 기손 시냇가에서 바알 선지자 450인을 도륙한 후에

그를 죽이려는 이세벨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가서,

그릿 시냇가, 로뎀 나무 아래에 피해 있을 때입니다.

 

왕상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다른 분들은, ‘나만 혼자 남았습니다’라는 엘리야의 고백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나,

저 캔덜은,

엘리야의 이 고백이 ‘너무 자기중심적 표현’으로, 제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한 번 말한 것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두 번이나 똑같이 이렇게 말한 것은,

엘리야의 평소 멘탈리티가,

자기밖에 모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역자’ 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켄덜은, 여기서 오히려 위로와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고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만 불러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도

택하셔서 ‘위대한,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로 불러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완전하고 성숙된 사람만 불러서 쓰신다면,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언제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제가, 이제까지 주님을 섬겨온 지가, 60년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역에 몸을 담고 주님을 섬긴 지난 60년 동안,

제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을 되돌아보니,

본문의 엘리야처럼, <너무 나 중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늘 ‘나’를 생각하고,

오직 ‘나’에 대해서만, 심각하게 고민하고, 염려하고, 주목해 왔다는 점입니다.

 

사역자들이 너무 ‘자기’만 생각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은,

 

1.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한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소중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기 존재감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은, 교만이요, 과대망상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사역자들이, 항상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렇다고 ‘나만 남았습니다’ 하듯이,

자기를 너무 과대평가 해서는.. 자칫 미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너무 과대평가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역이,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자꾸 그것에 필요이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 밖에 모르고,

 

더욱이 다른 사역이나, 다른 사역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해 버리거나, 그들이 자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런 태도는,

 

<인간의 이기적, 자기중심적 본능>이

고스란히 주님의 사역에 반영된 것입니다.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훌륭한 주의 종이고, 그의 사역이 놀라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기 밖에 모르는 사역자’라면

그것은 대단히 빠지기 쉬운 함정인 것입니다.

 

제가 지난 60년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이제야 차츰 그 심각성을.. 뒤늦게나마.. 지금 깨닫는 것입니다.

 

3. 여러분, 우리 학교, 우리 회사에서는 그가 마라톤에 1등인데,

실제로 전국체전에 나가면,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또는 그가 우리나라에서는 선두그룹인데,

국제대회에 나가면, 예선통과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가장 뛰어나고 인정받는 사역자라 하더라도,

실제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는, 순위가 많이 뒤바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뿐입니다!’라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최후의 심판대>앞에 가서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깨어있는 가운데,

‘도토리 키 재기’를 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역자나, 그의 사역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손과 발, 위장과 관절은.. 그 역할을 상대평가로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각 지체는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 faithfulness>입니다.

이 세상에서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신실하게 살았던, 주의 종, 선지자, 성도님들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그들이, 비록 경력이 없고, 화려한 업적이 없더라도,

화려한 경력과, 자타가 공인하는 업적을 남기면서도 ‘주여,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대치하면서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엘리아야, 그건 아냐!’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한 가지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엘리야가 그렇게 (착각하며) 말했을 때,

하나님이 화를 벌컥 내시면서

“당장 중지! 오늘 사역은 취소!” 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너 혼자만 남은 것은 아니거든!

네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는 좀 더 성숙해 진 다음에 오너라. 오늘 사역은 여기서 중지!”

 

만약 그러셨더라면,

그날 갈멜산에서, 놀라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갈멜산의 승리!’ 여러분도 다 아시잖아요?

 

만약 그날, 하나님이 예민하게 반응하셨더라면, 엘리야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위대한 엘리야 선지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요나도, 그의 인간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네요.

엘리야의 경우와 똑 같습니다.

 

저는 이 점이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성, 우리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 사용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다만 우리는, 엘리야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서

‘나만 혼자 남았습니다!’ 하지 말고,

내 곁에 있는 사역자들과, 그들의 사역들을 인정하면서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는, 겸손한 사역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저는 아주 늙은 노인이 되었습니다. (1935년 출생~ 현재 생존)

이제 제 과거를 돌이켜 보니,

과거에 제가 아주 ‘제 자신만 깊이 생각했던’ 시절이 많았음을 보면서,

제 얼굴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런데 이제 늙어서 이제야 깨닫는 것이, 뒤돌아보니,

제가 제 자신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제 주위에 다른 중요한 사람들도 많았고, 다른 중요한 사역들도 엄청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제발,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You can read much more about this in my New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