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게 예수 따르기 요일2:6 출처 보기 <P1> 편집
by K. P. Yohannan. 원제목: Just Following Jesus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예수 스타일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그런 유형이 아닙니다.
그런 지도자가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런 지도자가 오늘날 우리 모두를 이끌만한, 참 지도자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런 유형의 지도자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나중에 말로가 좋지 않은 지도자들을 보면,
한때 기적과 표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다가..
결국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주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곁길로 빠진 분들이.. 특히 이런 유형의 지도자 중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TV를 동원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이 되고,
한때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르기도 하지만..
이런 유형의 사람들 가운데, 참 지도자가 나온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유명세의 역풍을 맞아서 그런지.. 도리어 오히려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지도자는 <그냥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무슨 크게 TV에 나와서 어필되지 않아도,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며, 귀신을 내어 쫓지 않아도,
사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그런 크고 놀라운 것들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도, 그렇게 대중적인 포퓰러한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실 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 한 사람!
그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참 영적 지도자라고.. 저 요하난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올바른 정통 신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와 교회가 어지러운 것은, 신학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정통으로 올바로 정립되고, 가르쳐지기만 하면,
우리가 바라는 영적 각성과 부흥이.. 오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합니다.
오늘날 그렇게 기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저 K. P. 요하난은,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통 신학의 정립이 필요할지는 몰라도,
그것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기대를 하지 않으시리라 봅니다.
그럼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방식을 통해서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걸까요?
표적과 기사를 일으키며, 귀신을 쫓아내는 방식도 아니고,
정통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치는 방식도 아니라면,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식은,
<겸손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통해서>입니다.
그들은 너무 평범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면서, 제자도의 길을 가는 사람’
그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신 예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보고 배워서, 나처럼 살아야 된다’ 하시면서
예수님이 3년 공생애를 통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방식이
‘겸손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삶을 사는 제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은 차츰 변화될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참 지도자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유명하게 show up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지도자의 예를 한 분 들자면, 마더 테레사입니다.
(한국에서는 장기려 장로님,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여러분, 그 키 작은 할머니 마더 테레사가,
무슨 큰 물질을 모아서, 그 힘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공부를 많이 해서, 올바른 정통 신학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 것도 아닙니다.
그의 무기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과 친근히 동행하면서, 겸손히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중에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무기이지만, 그러나 아무나 가지지는 못합니다.
여러분, 그 키 작고, 아무 가진 것이 없는 할머니 한 분이,
그는 수녀복만 벗으면, 정말 동네 할머니와 다를 게 없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는 무의탁 노인과 비슷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한 분이,
진실과 겸손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을 때,
그 한 분이 인도의 10억 인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주님의 뜻이, 복음으로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며,
우리가 원하는 바가, 기독교 복음으로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인데,
그 방향성을 우리가 올바로 잡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기사와 이적을 베풀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혹자는 정통 신학을 정립하자며.. 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혹자는 자기 교회의 몸집을 부풀려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합니다.
각자 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정곡을 찌른 것은 아니고요,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도 아닙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방식은,
<진실 되고 겸손하게 주님과 동행하는 제자의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이 변화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그 방향성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신학교 때부터, 방향성이 올발라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엉뚱한 방향으로, 수 십 년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그런 분이 많습니다.
기사와 이적의 방향성을 비난하면서도,
자기 교회의 몸집을 부풀려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분들이 많은데..
수 십 년 후에, 결과가 아주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식이 아니니까요. ☞마더 테레사의 정신자원
▲그래서 마더 테레사는,
아직 기독교가 주류라고 말할 수 없는 인도사회에,
그것도 10억이나 되는 인도 인구에, 기독교의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인도 정부는, 대체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정부는, 마더 테레사의 장례식 때
마하트마 간디를 운구할 때 썼던, 그 장례 수레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인도 정부가, 마더 테레사에 대해, 최고의 예우를 갖추고 존경을 표시했다는 뜻입니다.
마더 테레사 이후로, 인도에서, 아직까지
아무도 그 운구 수레를 썼던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마더 테레사는, 마하트마 간디와 같은 반열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못한, 인도정부로부터 말입니다.
한 번은, 영국 가디언 지의 기자가 인도를 방문해서, 마더 테레사를 취재했습니다.
보니까 테레사는, 자기 몸을 구푸려서, 한 나병환자의 다리를 씻어주고 있었습니다.
그 환자의 다리에서는, 피고름이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말없이 그 피고름을 다 닦아내고, 붕대를 감아주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기자는, 이렇게 자기 혀를 찼습니다.
‘아이고, 나는 누가 나에게 수 억을 준다 해도, 이런 일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러자 마더 테레사는, 앉은 채 고개를 들어서, 기자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 억 원을 준다 해도 못하겠다고요?
저는요, 수 십 억 원을 (10배를 더) 준다 해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이 환자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환부는.. 주님의 상처요, 이 피는.. 주님이 흘리신 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라스 신학교 출신인데,
달라스 신학교는 매년 <부흥집회>를 가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복음주의 개신교인들은 ‘부흥’이란 말을 참 좋아합니다.
모두가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 부흥이라는 것이
그저 교회에 신자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것을 뜻한다.. 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참된 부흥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참 신앙, 그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제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 되고 겸손하게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무슨 큰 교회를 이루고, 유명 인사가 되어서,
수많은 물질의 힘으로, 무슨 거창한 일을 하겠다는 것은,
(그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보여주신 본은 아닙니다.
우리가 방향을 엉뚱하게 잡고, 10년, 20년, 30년 나아가다 보면,
결국에는 거짓선지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12백만 명(1천2백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12백만 명이 아니라, 고작 12제자였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실패하고, 11명이 남았습니다.
꼭 큰 것은 잘못되었고, 작은 것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진실과 겸손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직접 삶으로 보여주어서,
그것을 본받은 제자들로 하여금.. 나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질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고작 그 숫자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염려가 들기까지 합니다.
더욱이 그들 11명은, 무슨 완전하고 뛰어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도 12제자로 파송받기도 하고, 70제자로 파송받기도 하고,
그래서 병도 고치고, 복음도 전하고.. 외형적으론 베드로와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면
‘진실하고, 겸손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 - 그것이 유다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다른 사도들과 똑같이 사역을 했지만,
그 내면의 마음에.. 그것은 모두 외식이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방향성을 올바로 잡지 못하면,
누구든지 가룟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면이 진실하고 겸손하며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것은.. 사실 대단히 어렵습니다.
절제해야 될 것도 많고,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나, 종교지도자들처럼, 외형적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
자기 내면적으로는 온갖 더러움과 추악함은.. 우리가 가지기 쉽습니다.
그냥 그것은 우리 본능에 충실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룟유다는, 저 나쁜 괴수가 아니라,
나도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향성을 잘못 잡으면.. 가룟 유다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방향성을 잘 잡은 베드로는, 겸손하고 진실했던 베드로는,
돌이킨 후에, 정말 교회의 머리가 되어서, 이방까지 그 복음의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성격을 보십시오.
급하고, 허둥대고, 잘 나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실한 신앙 인격은,
결국 그를, 만대의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주었습니다.
기독교의 방향이 이렇게 중요한데,
오늘날 ‘겸손하고, 진실하며,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방향성은 강조되지 않고,
크고 화려하게 꾸미고, 사람들이 운집하는 방향성에 모두 주목하는 것 같아서..
그것이 미래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지금은 우리가 그 위험성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크든지 작든지
예수님이 12제자를 양육하시고, 본을 보이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작다고 기죽을 필요도 없고,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체 신앙인들이
정말 오늘, 주님이 본을 보여주신 그 길로, 제대로 따라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뭐 정통 신학.. 그런 것을 너무 따라가려 하지 마십시오.
정통 신학이 필요하지만,
주님이 보여주신 본, 그것을 놓치면서, 정통신학만 붙잡는 것은.. 오류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본, 그것을 놓치면서, 교회만 크게 만들겠다는 것도.. 큰 오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주님이 본을 보여주신 그 본을, 자기도 보여주어서,
그 지도자를 보면서,
주님을 따라가는.. 진실하고 겸손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
그들이 자기 주위를.. 점점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주님의 나라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부터 성경을 펴고,
주님이 3년 동안 공생애를 통해,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심각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겸손하고, 진실하며,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모습도 포함하지만, 근본적으로 내면의 문제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그런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서, 예수 스타일로 살아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내 주위를 변화시키는, 12제자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경의 '예수 스타일의 삶'을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방향성이 지금 속히 회복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스타일>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본 받는 삶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예수님을 단순하게 따르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길을 모르는 도시에 가면, 그곳의 안내자가 나와서, 자기 차를 뒤따라 오라고 말합니다.
앞차가 깜박이 켜면, 나도 깜박이 켜고, 앞차가 서면 나도 서고.. 걍 그렇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사신 그대로, 나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오셨다면, 공생애 3년을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살지 마시고, 3개월만 사시고, 십자가에 빨리 죽으실 수록, 더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공생애를 3년 사신 것은, 내 삶을 본 받으라.. 입니다.
본문 요일2:6을 보십시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Whoever claims to live in him must walk as Jesus did.
............
그리고 인도에는 수 백만의 힌두 신이 있습니다.
그래도 힌두교 신자들은, 이 사원에 갔다가, 저 사원에도 가고 합니다.
거의 자유롭게 다닙니다. 그것은 회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사원'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삼위일체 유일신을 믿으면서도,
교회와 교파가 엄청나게 갈라져 있습니다. 갈라진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장벽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타적이 되고,
신자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과연 그것이 올바른 것일까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일까요?
사실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 성'을 쌓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 단락, 요하난 목사님의 설교 중간에 나오는 내용을, 약각 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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