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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의 메시지

LNCK 2013. 3. 19. 16:47

◈요나서의 메시지               욘1:1~17              13.03.03. 설교스크랩, 일부녹취

  

혹자는, 요나가 큰 물고기의 소화액 세례를 받아서, 마치 문둥병자 처럼 되었을 것이며, 

그 무서운 몰골을 보고서, 니느웨가 회개하였을 것이라

(거역하면 저렇게 되는 구나!) 상상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요나서의 메시지

 

▲1.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요나서에는 다른 예언서와 달리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런 직접적인 계시의 내용은 없어도,

요나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우를 보내시고, 요나를 괴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의 근원이 되라’는 사명에, 불순종하고 있었으니까요.

 

-요나가 선포하고, 완악했던 니느웨가 회개하게 되자,

온 백성이 회개했고,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졌습니다.

 

이를 보자, 요나가 견디지 못합니다. 화가 나서, 스스로 죽으려고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들만 받아야 되지, 왜 이방사람에게 전해지는가?’

이런 ‘복의 독점성과 그 잘못’

이런 메시지가 바로, 요나서가 가지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2.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바다’, 또한 ‘바다의 용’, 요나서에서는 ‘바다의 큰 물고기’는..

세상과 마귀의 세력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대상입니다.

 

이사야 27: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물론 바다에 실제로 큰 용, 또는 큰 물고기 같은 괴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표현을 썼습니다.

 

요나서 성경이 말씀하는 바는,

그 큰 물고기의 정체를 규명하기 보다는, 고래냐, 아니냐..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큰 물고기(바다의 괴물)까지 동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모든 만물을 이용하시면서까지, 요나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바다에는 괴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악의 존재이고, 엄청난 악을 상징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사용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요나서의 메시지 중 한 가지입니다.

 

바다는 성경에서 혼돈과 악의 상징입니다.

바다로부터 혼돈과 끊임없이 악이 다가옵니다.

 

계시록에서 짐승도 바다에서 나오지요? 계13:1이스라엘이 홍해 바다를 건넌 것도,

그 세상의 혼돈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나서에서, 그 바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악의 상징인 바다가 요나를 다시 살립니다.

 

그렇다면 큰 물고기는.. 실제로 고래냐, 아니면 어떤 다른 물고기이냐를 따지기 보다는,

그런 관점이 아니라, 요나서는, 그런 악의 세력을 사용해서라도,

하나님은, 요나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요나서의 한 가지 메시지입니다.

 

▲3. 말씀에 순종하면.. 자기가 다 무너지므로.. 순종 못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요나가 겪고 있는 아픔은, 외적으로 니느웨로 가는 길의 아픔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적으로 자기 속에 다가오는 갈등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버리면,

내 속에 있는 것이 다 무너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청난 고통이 다가오게 되고, 엄청난 상실감이 다가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니느웨로 가는 것, 참으로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자기 신앙의 칼라를 포기해야 하고,

자기 자랑을 포기해야 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쌓아놓았던 모든 기득권도.. 다 포기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4. ‘축복의 독점성’ .. 그건 잘못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원수의 나라였던 앗수르를 사랑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요나는, 이 나라는 망해야 하는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이 나라는 얼마나 많은 다른 나라를 고통스럽게 했으므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요나가 해야 될 일은, 이 나라가 망할 나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나라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게 자기 마음속에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선택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하는 것입니다.

 

◑적용/ 떠나야 성장이 있는데,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9개월을 지냅니다.

이 동안 아기는 거기서 최대한 안정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어머니 배를 떠나야 합니다.

이때 엄청난 심적 두려움이 아기에게 다가온다고 합니다.

 

‘혹시 내가 바깥에 나가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아기가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누가 나를 돌봐 주느냐, 돌봐주지 않는가?’를 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기를 돌봐주면, 아기는, 어릴적부터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으로 커 갑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릴 때 아기를 돌봐주지 않으면,

태어날 때부터 불신을 갖고 태어납니다.

 

만약 아기가 나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냥 머물러 있어 버리면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여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들에게 지금 있는 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여기가 너무 편안한데, 여기가 너무 안전한데, 나를 떠받치고 있는 곳인데,

이곳을 떠나라고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라고 부르실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은 <일평생의 여정>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라지 않는 것이 아니며,

연세가 많다고 해서.. 신앙의 성장이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성장의 가장 중요한 때는.. 믿은 후 처음 한 해, 두 해입니다.

이때 만약에 부모님이나 교회로부터 건강한 영향을 받게 되면, 일평생 건강해 집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되면, 일평생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연세가 많아지더라도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 소망은 더욱더 커져 갑니다.

그런데 이런 큰 변화가 일평생에 약 7번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변화를 겪으면서, 신앙은 더 깊어지고 넓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그 변화를 4번~많으면 5번 정도의 변화를 경험하고

자기 인생을 마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6번, 7번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6번, 7번의 변화를 경험하면 좋은데, 대부분 신자들이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냐하면 떠나기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지금 있는 곳이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신앙의 성장에는, 양적인 성장이 있고, 질적인 성장이 함께 나타납니다.

양적 성장은 장미꽃이 하나 피고, 두 개 피고, 세 개 계속해서 피어나듯이,

양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인데.. 그러나 같은 테두리 안에서만 성장합니다.

 

그런데 질적인 성장은, 테두리를 박차고, 바깥으로 나아가는 성장입니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새로운 테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테두리를 벗어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질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엡4장에서 말씀한 바 있듯이,

씨가 자라면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그리고 열매가 맺습니다.

 

이런 과정은 질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들로 변신하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의 변화입니다.

싹과 씨의 형태가 다르고, 꽃과 열매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질적인 성장에는 두려움이 따릅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틀을 깨트리는데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양적인 성장에만 매달리지, 질적인 성장은 거부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테두리를 박차고 벗어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적 성장은 일어날지 몰라도, 질적 성장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적인 성장은, 잎에서 꽃으로,

또한 꽃에서 떠나서 열매 맺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 성장하면서 처음에는 교회 중심으로 나아갑니다.

교회 안에서 자라고 교회를 의지하면서 교회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교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질적인 성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성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계속 머물기 원합니다.

이곳이 나를 지켜주는 곳이고, 나를 인정해주는 곳이고, 나를 떠받쳐주는 곳이고,

내게 편안함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서, 니느웨 땅으로 가라.

거기서 믿지 않는 사람들, 포악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십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떠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75세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났습니다.

 

이제는 갈릴리를 떠나서,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서, 자기 생업의 편안함을 떠납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서, 이방으로 나아갑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들은 이 말씀을 들었고, 이 말씀에 순종하며 땅끝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엄청난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찾아오고, 염려가 찾아오고,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들을 다 상실하는 아픔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해서’ 그들은 떠났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선조들이 되었고, 신앙의 풍성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지리적인 이동만은 아닙니다.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도 다가옵니다.

질병, 사업의 어려움, 자녀로부터 어려움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떠나는 것, 여러분을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은총입니다.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오직 하나님난 의지하라는 연단의 은총입니다.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여러분의 소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수없이 많은 전통들을 다 부수셨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고, 자랑했고, 안주했던 전통들입니다.

 

종교적인 전통들,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전통들,

당시 모두가 그 안에 머물면서, 그것을 의지하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익숙한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라고, 이제는 떠나야 된다고..

더 큰 생명을 품어야 하고, 더 큰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적인 자리에서 여인들과 대화하셨고, (전통을 탈피하시고, 떠나신 것입니다.)

죄인들과 식사하셨고,

나병환자들과 손을 잡으셨고,

사마리아 사람을 살리셨고,

수천년 내려온 안식일 전통을 부수셨습니다.

그래야만 생명들이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울러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의 틀을 벗으시고, 떠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지금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테두리를 포기하고, 벗어나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이 테두리 안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지금 요나는 하나님의 <언약, 율법, 하나님의 선민>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도 이 테두리 안에 머무르시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만 사랑하고, 우리하고만 언약을 맺으라고 요구합니다.

 

아울러 이들이 가진 테두리들,

남을 차별하고,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런 테두리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계속해서 니느웨 사람으로 머물기 원했고,

이방 사람으로 머물기 원했고, 정죄당할 사람으로 머물기 원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 바깥에 머물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축복 바깥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백성으로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이 테두리 안에 있기를 원하고,

니느웨 백성들은 그 테두리 밖에 있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자기 배타주의, 자기 테두리의 우상이며, 자기의 우상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 테두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이건 큰 죄악입니다.

 

떠남이 있어야 합니다.

아픔이 있을지라도, 떠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테두리가 더욱 더 넓어지게 될 것이고, 더욱 더 풍성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더 큰 은총으로, 순종하는 성도에게 다가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요나서 1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요나서는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폭풍우를 맞은 것이 나 때문입니다.

요나라는 선지자 때문입니다.

 

이방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요나 선지자,

즉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 때문입니다.

 

행여나 우리로 말미암아, 이 땅에 폭풍우가 불지는 않습니까?

우리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독선 때문에,

또는 우리의 편협함과 교만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고통 받지는 않습니까?

 

나아가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속에 가두지는 않습니까?

나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겠다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요나는 끝까지 니느웨로 가지 않았습니다.

몸은 갔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가질 않았습니다.

마음은 끝까지 예루살렘 성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성전 안에 있어야만, 내가 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을,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다면,

이 성전은..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풍우를 일으키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큰 물고기 뱃속에 한 번 들어갔다 나와야 .. 그 고질병을 고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수난절 우리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는 절기입니다.

행여 우리가 우리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는지 살펴보고,

하나님을 이 틀 속에 가두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참된 신앙은 떠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고통스러워도 떠나는 사람들이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소망은 주님을 담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 니느웨로 떠나는.. 요나의 고통과 수난을 겪는 사람이,

훗날 부활의 역사에 함께 동참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의 거룩한 말씀을 대합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이곳을 떠나는 것이 힘든 일이고, 그곳에 가는 것이 힘

든 일이지만,

그러나 생명을 구하는 일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또한 나를 축복하는 길이므로,

용기를 갖고 나아가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소서,

 

올 한해도 주님을 닮기 원하는 우리 소망이 더욱 크게 하시고,

믿음의 담대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각자 자기 사명을 감당하는,

돌이킨 요나가 되도록, 우리 각자를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