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신앙이 있으십니까?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2절, 성도는 불시험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고, 복 받는다.. 는 소리를 귀가 따갑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정직하게 읽어보면,
성도의 현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불시험은, 성도를 연단하고, 재련해서, 정금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축복과 보상은, 저 천국에서 영원히 받습니다.
위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즉 재림 때 축복과 보상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13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즐거워 하라니요! 즐거워 할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합니까!
그러나 재림 때, 주님이 상 주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호의호식하고, 오복을 누린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피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고난에 동고동락 한 성도가 우대를 받지,
고난에 요리조리 피하고, 축복에만 매달린 성도가.. 그 날에 칭찬을 받을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신앙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리스도 고난에 참여? .. 그런 것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물러가세요!' 하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한 사람만,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부자로 살아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 나의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서 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서.. 고난을 당하다가.. 재림 때, 그때 비로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아래는, 이런 주장, 즉 <고난은 성도의 삶의 현실이다>는 주제의 성경구절과 설교를 모아보았습니다.
▲2. 성도는.. 살 동안에는 환란을 당하나, 최후 심판을 면합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 계속 세상으로부터, 바보취급 당했습니다.
‘의’를 전파하는 사람은.. 그와 같은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게 됩니다.
성도(노아)는.. 세상에서 고난/환란의 죽음을 통과하면서.. 최후 심판 때 구원 받습니다.
불신자는.. 세상에서 성도를 비웃고 놀리다가.. 최후 심판 때 죽음을 맞게 됩니다.
노아는 10~20년은 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을 기다려도 비가 오지 않았을 때,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거기에다 먹고 살아야 되고, 방주 짓는데 경제적 손실,
그리고 또 방주에 쓸 양식을 저축해야 되고..
죽도록 일하고 또 죽도록 욕 먹어..
그런데 역사 속에서 그 (환란의) 물을 맞았더니,
진짜 심판의 물이 내려오니까, 방주가 그를 덮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의인들의 현실입니다.
▶3. 아벨의 증거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그런데 그가 의로운 자라는 증거가 뭐냐면, <아벨의 죽음>이었습니다.
즉,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환란/핍박/죽임당함을 통해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이 의인이 되어서, 의인의 삶을 사는데,
그의 삶에 그가 의인이라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그 증거가 뭐냐하면, 가인에게 맞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증거’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다.
‘말튜레오’ 인데, ‘증인이 되다’이다. *증인, 순교자의 헬라어, '마르투스'의 동사.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제사로 말미암아 아벨이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로운 자가 된 아벨에게, 그가 의인이라는 증거가 나타났는데,
그 증거가 아벨의 죽음이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 증인은 성전에서 죽습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성도를 ‘두 증인’이라 그럽니다. 다른 말로 순교자입니다.
그들이 바벨론 성 길가에서 죽습니다.
거기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루살렘 옛 성전입니다. 계11:8.
따라서 성도가 죽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성전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율법주의적 교회'입니다.
▲5. 복음을 받으면.. 몸에는 쓴 이유.
계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사도 요한은, <작은 두루마리>를 먹습니다.
이 책은 복음이 적힌 말씀입니다.
그 책이 입에서는 달콤한 데, 배에서는 씁니다.
이 말은, 그들이 받아먹을 때는 달콤하던 말씀이, 믿으면 구원을 주신다니까요!
내 뱃속에 들어가서 소화가 되기 시작할 때, 즉 몸으로 복음을 살아내게 될 때는
쓰디쓴 일로 화하여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수님도 ‘내 멍에’ ‘자기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핍박을 받게 될 것’도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달콤한 것만 아니라.. 쓴 맛도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너를 성전삼고, 너희 가운데 거하여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입니다.
얼핏 들으면 너무 달콤합니다.
쓰디쓴 면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일면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소화가 되면서
실제로 크리스천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다보면.. 고통스런 현실에 부딪힙니다.
왜 그런가요?
그래서 계10:9의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복음’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비슷한 내용이 기록된 에스겔 2장을 풀어보면 됩니다.
겔2:8~10 인자야 ..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겔3:2~3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에스겔이 받아먹은 책에는, 애가, 애곡,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10:8에, 배에는 쓰디쓴 것이었습니다.)
왜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애가, 애곡 재앙인가요?
복음,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사랑과, 자아 숭배와, 자기 바벨탑을
우상처럼 떠받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다 죽어야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애가, 애곡, 재앙이 있는 사람만.. 구원 받는 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만.. 영생 얻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한 마디로 그렇습니다.
구원은 달콤하지만, 애가, 애곡, 재앙은.. 쓴 것입니다.
이것은 두 증인(복음 전하는 정체성을 가진, 크리스천)부터 먼저 적용됩니다.
계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그래서 이 세상에서 ‘증인’으로 살게끔 되어있는
신실한 크리스천은,
자기부터 먼저 자기 배가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표현으로는 애가, 애곡, 재앙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의 말씀(책)을 먹은 자는,
자기 옛 자아가 곡소리 나는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실제로 자기 삶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도가 하나 둘씩, 자기 죄를 회개하고, 성숙해 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사람에게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곡성’이라면,
외부적으로 얻게 되는 ‘곡성’도 있는데, 그것은 ‘핍박’입니다.
안팎으로 애가, 애곡, 재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과 영생을 얻으려면, 자아가 다 죽어야 합니다.
자기 자아, 자존심, 자기 성공.. 이런 것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그게 어렵지만, 거기에 참 행복의 삶, 복음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역시 애가와 애곡과 재앙으로 나에게 대합니다. 나에게 핍박을 가합니다.
그래서 계10:9절이 성취되는 것이다.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멀쩡하게 자신들이 정상이며, 훌륭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자들에게,
그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 즉 회개하라는 복음을 전하게 되면,
즉, ‘여러분들은 그렇게 살다가 곡소리 나는 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단골로 늘 전했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전하면,
세상이 그걸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는가요?
그런 증인, 선지자, 참 성도에게 ‘오냐, 너에게 쓴 맛을 보여주겠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 복음을 받으면, 그게 구원의 ‘달콤한’ 소식이지만
먼저 전도자 자기들 배부터 ‘쓰게 bitter’ 되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아서요!
▲6. 시편 기자의 딜레마.
불신자는 편안하게 사는데, 자기는 죽도록 고생만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배에는 쓴 복음>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시73:1~4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14 (그런데)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하나님,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잘만 삽니까?
죽을 때도 저렇게 편안히 죽는 것을 보십시오!
그런데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봅니다. 지옥 같은 삶을 삽니다.’
그러나 이런 회개와 성화의 과정을 거친 사람은,
(본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배에는 쓴 복음’을 제대로 먹은 사람은
영생과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7. 욥의 딜레마.
욥7: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욥은 ‘이렇게 앙상한 뼈로 사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1:1
즉 ‘욥은 의인이다’에서 출발했는데,
그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은 욥을 벌거벗겨버리십니다.
(욥이 ‘배에는 쓴 복음’을 제대로 먹었기 때문입니다.)
욥7: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라고 욥은 호소합니다.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분초)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나님은 참 성도인 욥을, 아침마다 권징examine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놔 두지 않으시고, 욥을 쫓아다니시면서 단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도와주셨다는 게 아니라 때린데 또 때리신 것입니다.
쉴 틈을 안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세상으로부터도 고립을 당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육신, 역사, 세상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
빨리 빠져나가야 할 곳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애가, 애곡, 재앙의 삶을 체험케 하십니다.
그렇게 ‘배에는 쓴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의 삶속에서는
옛사람과 새사람 간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 전쟁에서 새사람이 승리를 하면 할수록
이 육신과 세상은 빨리 벗어나야할 것으로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때는 내 자아의 영광과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시도들이 줄어들게 됩니다.
이것은 죽어야 할 거고, 이미 죽은 것인데,
여기다 금칠 해봐야.. 그것은 이집트 미라에 예쁘게 화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떤 분은 분개합니다. ‘아니, 왜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막 대놓고 무시하고 비난하지?’
사람들이 잘못 본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잘 본 것입니다.
내가 내 실상, 내 전적 타락의 실상을, 내가 정확히 못 보기 쉬운데,
사람들이 그 허상을 막 부수어 주고, 내 실상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해 주니까..
즉 ‘내가 벌레요, 찌끼요, 사람이 아니라’ 고 욕을 해 주니까,
오히려 따지고 보면 고마운 것입니다. 그 욕을 듣는 순간은 욱 하게 되지만요..
그래서 신실한 주의 종들은, 욕을 먹을 때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맙습니다. 실상은 제가 그 보다 더 악한 자인데,
그 정도로 후하게 평가해 주시니.. 감사한 일입니다.’
한경직 목사님도 후배 목회자들에게, 주의 일을 하다가 욕을 들으면
‘맞습니다. 당연하지요.’라며 겸손히 응대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욕 먹는 것이, 인격적으로 큰 상처를 당하는 일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내 인격을 오히려 성숙시키고, 내 실체를 파악하는 일에는.. 보약이 됩니다.
‘왜 날 이렇게 벌레 취급하지?’
아닙니다. 우리 실상은 그 수준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애통의 기회로 삼으면.. 얼마나 복이 되는지요..
그러므로 애통은, 하나님이 복으로 주시는 것이지, 성도가 벗어날 것이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는 것은, 애통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애통함 속으로 오히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양심의 거리낌 없이 잘도 살다가,
이제 참으로 예수를 만난 후에는, 이전에 없던 애통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애통함 속에서 울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애통함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인생은 왜 이리 지지리 복도 없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복은, 물질이 아니라, 눈물과 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9. 신앙생활은 폼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체면 구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고 사는 것입니다. ←설교문 제목.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그런 성도들이, 매 시대마다, 항상 필요했고, 항상 있어 왔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폼나게 십자가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폼생폼사가 아니에요. 반대로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 주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복음 속엔, 그리스도의 고난이, 반드시 옵션으로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핍박받고 욕먹는 일들이 생겨요.
그러면 ‘아, 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욕을 먹기 위해 선택된 캐스팅이지!’
라는 자세로 살아야 해요.
물론 쉽지 않아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그 길로, 우리를 몰아가십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핍박 받음을 통해서 -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이루어지니까요.
구약엔 선지자들이 이런 삶을 살았고
신약에선 12사도들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교회 역사에도, 매 시대마다, 이렇게 존귀한 삶을 사신 성도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복음이 계속 전파되어 내려온 것이고,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속된 말로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아무 존재감 없이, 의미 없이 살았어요.
세상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영웅호걸은 역사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예수 때문에 핍박받다가 죽은 성도들의 기록은, 세상 역사에는 없어요.
세상에선 예수 믿다가 죽은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 사고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교회도 수 십 억, 수 백 억짜리 무슨 사업을 추진해야.. 알아주고
변두리 교회에서 복음 전하는 사역자는.. 아무 존재감이 없다고 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먼지 같은 존재에요.
우리가 이런 ‘세속적 사고’에서 탈피해서,
복음과, 십자가와,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을 보자는 것입니다.
▲10. 세상이 너희를 미워 하느니라 요15:19
그래서 계시록 6장에 보면
순교자들이 ‘빨리 세상을 심판해서 자기들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조금 기다려라 아직도 세상에 너희들처럼 복음 전하다가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계6:11
이렇게 성도는 ‘죽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육적 신자들에게 맞아 죽어야
그 자들이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고발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육적 신자들에게 맞아 죽은 성도들을
예수님께 속한 자로 인정해서, 천국백성으로 받으시고,
성도를 죽인 자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하여..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그러니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 받는 것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핍박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에요.
마귀는 아무나 핍박하지 않아요.
꼭 예수님을 증거하는 성도만 골라서 핍박을 해요.
이건 억지로 미움을 받으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 속하였으면 반드시 마귀가 알아보아서,
미움을 받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십자가 피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예수가 어떻고! 새 언약이 어떻고!
입술로는 달달 외워도.. 마귀는 그것이 지식인지, 신앙인지 대번에 알아보아요.
입술로 나불거리는 자들은 그냥 내버려둬요.
그 사람들은, 마귀 편에 서서,
자기 입술로 도리어 십자가를 가리고 있기 때문에
핍박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겁니다.
마귀는, 바울과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누가 예수 편이고, 아닌지.. 정확히 구분해요.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입으로는 예수! 예수 했어요.
그런데 마귀가 ‘넌 가짜다!’ 라고 하잖아요. 행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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