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I13czbTaRSc
◈백보좌 심판과 그 전후 사건 P2 계20:11~12 출처
The Judgment of God and the Great White Throne Russian
☞P1 에 계속 이어지는 설교문. *화면 맨 아래에, 영문 동영상 있음
◑계20장 11절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위 성경은 ‘주의 임재 앞에서, 땅과 하늘이 피하여 도망간다’고 말씀합니다.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했는데,
하늘과 땅이, 자기 있는 힘을 다해서,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도망치듯, 뒤로 물러난다는 것입니다.
루터교 신학자 싸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어보세요, 이 말은 고전적 표현입니다.
“그 보좌 위에는 끔찍하게 두려운 분이 앉아있습니다.
(여러분, 요즘 교회에서 언제, 하나님이 끔찍이 두려운 분이다.. 라는 설교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러나 과거에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끔찍이 두려운 분 awful God 으로 가르쳤습니다.)
그 보좌 위에는, 이름도 형상도 모습도 없이
오직 신비하고 끔찍하고 awful, 무게 있는 존재가 앉아 계시는데,
그 분은 오직 이름 지을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곳에는 전능자의 벌거벗은 (가려지지 않은) 끔찍하게 두려운 임재가 있어서,
하늘과 땅이 그 앞에서 도망을 갑니다.
시75편 2절.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이 이르면, 내가 바르게 심판하리니,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주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시97편 5절.
‘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왁스) 같이 녹았도다’
위 구절들은, 하나님 앞에서
땅과 그 거민이 다 소멸되고, 온 땅이 다 녹는다고 합니다.
너무 두려운 말씀이 아닙니까?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그 가운데는 교만한 사람도 있고, 위대한 인물들도 있을 것이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용광로로 들어간 조그만 밀랍 인형처럼.. 다 녹아버릴 것입니다.”
▲저는 어제, 우연히 TV에서, <집을 새롭게 단장해 주는 어떤 방송 프로>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운 좋게 선택되어, 자기 집을 무상으로 단장 받게 되었는데,
카메라가 비추는 그 집 안에서,
‘붉은 벨벳 예수’라는 인형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벼룩시장에서 그 ‘예수 형상’을 샀다고 했는데,
그 인형은, 50센티 정도 높이의 예수 조각상이었습니다.
인형 (예수님) 옷은 붉은 자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그런데 신성모독적인 것은, 그 위에 작은 동전 삽입구가 있는,
말하자면 ‘예수님 저금통’이었습니다.
아마 신상을 만들기 좋아하는 남미에서 만든 것으로 보여지는데,
돼지 저금통을 만들듯이, ‘예수님 저금통’을 만들어 놓았고,
그 가정은, 그것을 구입해서, 자기 집 한 복판에 가져다 두었습니다.
돼지가 복을 불러오듯이,
예수님이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가정은, 그 예수 상, 사실은 저금통을,
자기 집 아파트 거실 한 가운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 그 조각상, 즉 가정 제단 근처를 ‘성전’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TV 방송을 보면서,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연히 그들이 사는 삶의 모습을, TV를 방영하는 중에, 카메라로 잡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누가 더 비참한 존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 형상’으로 된 저금통을 만들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 TV 방송을 보면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군!’하며 혀를 차는 사람들인지..
여러분, 둘 중에, 누가 더 비참한 존재입니까?
TV를 보면서, ‘저 우상숭배, 저 무지함’을 비난하는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도,
사실은, 자기 집에 ‘예수 형상 저금통’만 갖다 놓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과 똑같이, 자기 집 가장 중앙에, ‘물질의 우상’이 자리 잡고 있지 않나요?
우리도, 어리석은 그 가정과 똑같은 짓을 .. 종종 하고 있지 않나요?
예수님을, 복을 불러오는 돼지 저금통과 동일시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하지만,
그리스도가 진정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
‘돈만 많이 벌어다 주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 예수 저금통을 섬기는 우매한 우상숭배자들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어른들은, 아이들이 딱지치기나 공기놀이를 하는 것을 보면,
그것에 자기 목숨을 걸고, 따려고 열심히 애쓰는 것을 보면..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돈’을 가지고, 똑같이 그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밴스 헤브너 목사는, 신자들이 ‘다이아몬드 공기놀이’를 하면서
애를 쓰며 살고 있다고 풍자했습니다.
공기놀이를 하는 돌이, 다이아몬드로 바뀌었을 뿐이지,
그 탐욕과 재미란 본질은, 아이 때나 어른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현상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엄위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
그 앞에서 하늘과 땅이 녹아지고, 모든 인간들이 녹아질, 그 두려우신 하나님을 모르고,
그저 ‘다이아몬드 공기놀이’를 하면서,
하나님 도움으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부자되고, 성공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부모라면,
손님이 여러분의 집에 와서, 집을 어질러 놓거나, 여러분의 옷에 때를 묻히면
그건 화가 나지만, 참을 수 있는 화입니다.
그런데, 어떤 낯선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여러분의 자녀를 때리거나 조롱하면.. 부모는 불같이 화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돼지 저금통’ 취급해서, ‘예수 저금통’을 만들어 놓고,
‘예수 저금통’을 자기 집에 들여놓지 않아도,
똑같은 심정으로,
예수가 오직 자기 집을 부자로 만들어주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 형상 앞에서 빌고 섬긴다면..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불같이 진노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아들 예수를,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돼지 저금통’ 따위로 취급한 사람들을,
마지막 심판 날, 밀랍인형처럼 다 녹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외아드님을,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 분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격렬하게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누군가 당신을, 만왕의 왕 앞으로, 그 심판대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 힘은 너무나 강해서, 당신은 절대로 뿌리치고 도망갈 수 없습니다.
보니까, 하늘과 땅은
당신과 반대 반향으로 뒤로 물러갑니다. 피하여 없어집니다.
그때 하늘과 땅과 만물은, 피하여 도망가면서, 외칠 것입니다.
‘도망가라. 도망가라. 왕의 진노로부터 도망가라!
보좌 위에 앉으신 분의 진노 앞에서, 누가 견딜 것인가?’
강은 그 앞에서 마르고, 산은 밀랍(왁스)처럼 녹아내립니다.
개미 같은 존재인 당신은,
왕의 심판대 앞에 가서,
모든 피조물들이 두려워서 그 앞에서 도망친, 그 분을 만나야 합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을 자랑하며,
지금 가슴을 펴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귀담아 들으십시오.
당신의 업적과, 지위와, 성과와, 자랑,
또한 모은 재산을 뽐내며,
그 위대한 왕의 심판대 앞으로, 당신은 걸어 들어가면서,
이 세상에 속한 것 중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이
당신을 지나서, 파멸의 길로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동자가 주행할 때 보면,
반대편 차선으로는, 다른 차들이 역주행해서 달려갑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으로 행진해 나아가고,
이 세상과, 또한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 것들은, 역방향으로 피해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장면을 정확히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불 속에서 겨우 건져진, 구원받은 자’가 될 것입니다. 고전3:15.
여러분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모든 것을 다 잃고, 여러분의 몸만 겨우 서게 된다면.. ‘불 가운데 겨우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평소에 주님을 잘 섬긴 열매와 공적을 갖고서, 그것과 함께 서게 된다면,
즉, 그 영생의 열매들이, 심판주 앞에서, 피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그 날,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1서 2:17절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세상이 ‘지나간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떠밀려 사라진다’ 입니다. pushed out 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그토록 갖고자 애쓰는 것들,
영원치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심판 가운데 밀어내고, push out 하고 계십니다.
계속해서 사도요한은 말씀합니다.
◑계20장 12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계20:12
사도 요한은, 환상 가운데, '죽은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은, 끔찍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육신이 죽은 자로도 볼 수 있지만,
그런 뜻과 아울러, 영혼이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숫자는.. 큰 자나 작은 자나.. 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입니다.
‘싸이스 라이트’는
‘큰 자나 작은 자나’를
‘큰 죄인이나, 작은 죄인이나’ 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을 유의해서 들으셔야 합니다.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큰 죄인뿐만 아니라,
작은 죄인들.. 즉 평민, 무식한 자, 가난한 자들도.. 죄인들은 다 똑같이 심판을 받습니다.
황제나 거지나.. 심판 때는 똑같습니다.
그곳에는 흰옷 입은 자들도 없고,
'점도 흠도 없는 자'들도 없고, 종려나무도 없고,
벌거벗은 죄인들과
벌거벗은 전능자가 보좌에 앉아서,
영원한 저주를 선포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싸이스 박사는, 자기 책에서, ‘벌거벗은’ 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의 벌거벗음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벌거벗음입니다.
이 표현은, 최후 심판에 관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1. 여러분, 제가 이런 묘사를 한다고 해서, 낄낄대며 웃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갑자기 이 순간에, 이 교회 안에서
당신만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수치스럽겠습니까?
끔찍하겠지요?
여기서 ‘벌거벗는다’는 뜻은, 비유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런데 하나님도 벌거벗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벌거벗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그 엄위하심과 두려움을 감춰줄 만한, 어떤 안전장치, 보호장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뵙는 것 자체가, 두려움의 극치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뵈었을 때,
그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장면을 보았을 때, 너무도 두려워했습니다.
스랍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서, 그 둘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 발을 가리고, 그 둘로는 날며 찬송하며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고 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흘깃”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도, 이렇게 두려워했습니다.
(벌거벗은.. 이 아니라) 옷으로 가려진 하나님의 신성을 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사야는,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장차 우리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뵙게 될 그 하나님은
(이사야가 보았듯이) 옷자락으로 가려진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벌거벗은 신성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싸이스 박사가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것도 이사야처럼 “흘깃” 보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는 시간 내내, 그 두려운 존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사야보다, 얼마나 더 끔찍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를 감싸주지 않는 사람은) 정말 기절할 듯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당신’과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 사이에
가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둘 다 벌거벗고, 서로 마주 서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벌거벗는다’는 뜻은, 당신이 행한 모든
더럽고 추한 행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불 앞에 낱낱이 다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벌거벗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그 엄위하심과 두려움을 감춰줄 만한, 어떤 안전장치, 보호장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계20:12.
요한은 ‘나는 죽은 자를 보았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영혼이 죽은 자’로 서 있는 것.. 말입니다.
만약 구원받지 못한 자가, 성경에 나온다면,
바로 이 구절에, 그 ‘죽은 자’의 그룹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당신이, 성경에 언급된 구절이 있다면, 바로 이 구절입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오늘날 당신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는, 그 ‘죽은 자’를.. 본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당신의 얼굴을, 거기서 보았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 벌거벗고 서 있는 장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물론 당신뿐만 아닙니다.
인류의 수많은 무리들이, ‘죽은 자’에 속하며,
당신도 그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이 계시록은, 당신의 미래를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회개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장차 그렇게 됩니다.)
당신이 스크루지 영감이고,
당신이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 벌거벗고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큰 자나 작은 자’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 자’는.. 세상에서 크게 출세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보면,
그 ‘큰 자’는, 수증기나 연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62편 9절에,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이사야2: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이게 과장법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코에서 숨이 한 번 푹 꺼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는 다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그의 코의 호흡이 멈추면, 그것으로 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 세상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또는 물질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 할지라도,
그 심판대 앞에 가면, 자신의 본질을 비로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다 ‘연기요, 증발하는 수증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세상에서 좀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우리가 교만해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나는 증기에 불과하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날에, 안전합니다.
요한은 또한 ‘작은 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작은 자도 큰 자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작은 자’는,
자기 자신을, 히틀러, 스탈린과 비교해서, 그들같이 큰 죄인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본성은..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 날에, 당신은
‘역사상 가장 악한 자’와 비교해서 상대평가로 심판 받지 않고,
만약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의로운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혹자는,
‘천칭 저울의 한 쪽에 율법이 있고, 다른 쪽에 인간이 놓여져서’
인간이 율법과 비교해서.. 부족하다는 판결을 받는다.. 고 말합니다.
어쨌거나, 어떤 기준으로 보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받을 판결은,
너무나 두렵고, 어떤 사람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두려움의 극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성경에서 이런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대할 때,
자세를 똑바로 앉아서, 등을 세우고, 귀담아 듣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만약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축 쳐져있거나, 나와 상관없다는 태도로, 뒤로 느슨히 앉아서 듣는다면,
그 자세가 벌써 ‘최후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의 미래와 영생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 것을.. 자기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구부정하게, 또는 느슨하게 무신경한 태도로,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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