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밭 신자 막4:17, 눅8:13, 딤후3:1~4 출처, 정리
Steven Lambert *출처의 영문을 참조하세요.
▲<씨 뿌리는 비유>는, 예수님의 모든 비유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비유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거니와, 설명도 가장 길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천국의 비밀’을, 가장 잘 나타내 보여주는데요..
그 중에 ‘돌 밭’도 나옵니다.
이들은, 믿음을 한 때, 일시적으로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흙이 얇아서, 곧 믿음이 말라서 죽어버렸습니다.
‘돌 밭’이라서, 믿음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막4:17
누가복음에서는, ‘돌 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눅8:13
잠간 믿다가, 믿음을 떠나는 사람은.. ‘돌밭’입니다.
여러분 ‘돌밭’이,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이 ‘돌밭’에 관한 구절은, 오늘날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어져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란 칼빈주의 신학을
너무도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주의보다 더 상위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에 의하면
‘한 번 구원을 받은 신자라도.. 믿음에 뿌리가 내리지 않으면..
말라 비틀어져서, 죽고 만다’고 말씀하십니다.
돌밭 신자는,
‘한 때 한 번 구원 받았으나, 영원히 구원 받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의 ‘한 번 구원, 영원 구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사람, 즉 converted된 사람,
또는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를 이끌어, 천국까지 데려가신다는 칼빈주의 신학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굳이 칼빈주의의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을 적용하려면,
‘좋은 밭’에 해당되고, 적용되는 내용이지,
그 소위 ‘성도의 견인’이란 신학을, 돌 밭이나, 가시 밭에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주1)
▲‘돌 밭’도 한 때 잠시는 믿음을 가진 신자입니다.
막4:17절에 ‘잠깐 견디다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어성경에 ‘they last only a short time’ 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이런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에 한 때 잠깐 견디다가.. 현재는 말라져버린 신자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의 신학을 신봉하고서.. 안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보십시오. 그것은 ‘좋은 밭’에 해당되는 신학 이론이지,
‘돌 밭’이나 ‘가시 밭’에 해당되는 신학이 아닌 것을.. 꼭 명심하십시다.
지금 우리가, 마귀의 미혹을 크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들이, 너무 안심하고 있습니다.
막4: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잠깐 견디다가..’
그들도 한 때는, 잠깐 동안이나마, 가라지 신자가 아니라, 참된 신자였습니다.
자기가 봐도 그렇고, 남들이 봐도 그렇고.. 그는 참된 진실한 신자였습니다.
문제는,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났을 때..
곧 넘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돌 밭’입니다.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십시오.
1. 지금까지 깨어있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는
‘값싼 은혜, 결단주의, 쉬운 복음’으로
그들이 애당초 결신할 때부터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팽배했습니다.
전도를 받고 5분 만에 영접기도를 따라하고
‘당신은 이제 구원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해 왔습니다.
2. 또한 일각에서는 ‘기복주의, 번영의 복음’에 대한 폐해를 지적해 왔습니다.
기복주의와 번영의 복음, prosperity gospel, healthy-wealthy gospel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구원 받지 못한다는 주장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돌밭 비유’를 통해서, 저 스티븐 램버트가 논의하는 것은
위의 1번 2번과 약간 다른 각도입니다.
그들 1, 2번은 아예 처음부터 진실한 신자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돌밭 비유’를 통해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들 ‘돌 밭’은 처음에는 진실한 신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때 진실한 신자였지만,
말씀으로 인한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
믿음에서 탈선해서..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차이점을 구분하셨지요?
-아예 처음부터 진실한 신자가 아니었던, 소위 ‘길가 밭’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돌 밭’은, 한 때는 진실한 신자였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처음에 ‘믿음으로 거듭난 신자들’이었습니다.
※참고로, '가시밭'은, 열매를 못 맺는다는 것이지, 돌밭처럼 말라서 죽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는 있으나, 열매를 못 맺습니다. 그들의 영생의 여부는, 주님만 아시겠지요.
그들의 믿음의 출발은 좋았습니다. 복음의 씨를 듣고, 믿음에 싹이 나서 자랐습니다.
처음에는 순조롭게, 믿음으로 문제없이 자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구원의 여정을 출발했지만, 구원의 완성은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빌2:12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데,
집을 건축을 시작했으나, 마치지를 못한 것이지요.
자기의 영원한 운명이 달린, 너무도 중대한 문제인데.. 말입니다.
▲너무 중요해서, 제가 다시 한 번 여러분께 재차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금, 값싼 은혜를 통해, 엉터리로 예수 믿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진짜로 예수 믿었던 사람들,
진짜 믿음으로 거듭났고, 진짜 예수님을 한 때 믿고 따른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 드문드문 다니고에 불문하고,
그들이 계속 ‘돌 밭’으로 남아있는 이상,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신학에 의지해서,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스스로 ‘돌 밭’이 되기로, 자원하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스스로 ‘돌 밭’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코 안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설교의 주제입니다.
오늘 당신은, 주님과 친밀한 교제 관계를 갖고 계십니까?
매일 당신은, 기도하며,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매일 하루하루를, 주님의 지시와 인도를 받고서 살아가십니까? .. 그렇다면 당신은 ‘좋은 밭’입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은,
‘그래도 나는 10년 전에는 잘 믿었다’ .. 이런 주장하지 말고,
오늘 주님과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만약 하고 있지 않으면
당신은 ‘돌 밭’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생을 ‘걱정’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구원은 항상 현재이다’ 라고 말하는데, 맞는 말입니다.
과거 신앙, 이런 것 보지 말고,
오늘 현재 신앙을 보면, 그가 정녕 구원 받은 자인지, 아닌 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돌밭 신자’들이 생겨날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딤후3:1~5절을 소리내어 읽어보십시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전4:1~2절도 소리내어 읽어보십시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혹자는, 위 구절이, 바울이 중세암흑시대를 미리 내다 본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어디 중세암흑시대 뿐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위 말씀이 얼마나 그대로 적용됩니까?
위 구절은, 세상 불신자를 겨냥한 말씀이 아니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딤후3:5절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딤전4:1절에,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라고 말씀한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돌 밭’이 되어서, 구원 받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을
사도 바울이 미리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뿐만 아닙니다.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에도..
참 신자가 일부 있고, 가라지 신자, 돌밭 신자들이 넘쳐납니다.
이런 폐단들을 물리치고,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신앙을 확립하기 원했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교회도, 이제는,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에 넘쳐나는 ‘명목상의 신자’들 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불편한 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한 번 구원, 영원 구원 once saved, always saved’ 신학을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신학은, 원래는
(마르틴 루터의 젊은 시절처럼)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연약한 신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솔직히 말하면,
그 신학을 잘못 적용해서, 완전히 마귀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 신학은, ‘좋은 밭, 좋은 땅’에 해당되는 신학이지,
‘돌 밭, 가시 밭’신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꼭 명심하십시다.
그 신학에 대한 오해 때문에,
오늘날 개신교회에 ‘명목상의 신자 professing Christian’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대가 지불
▲그런데 오늘날 ‘구원을 뭘 그리 빡세게 보느냐?’
성경에 ‘물이 바다 넘침 같이, 말세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 찰 것’
이 예언되어 있지 않느냐? 사11:9, 합2:14
그리고 우리 신자들 중에,
과연 예수님 닮은 크리스천으로 살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럼, 세상에 한 웅큼만, 즉 완벽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낸 극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의 형상을 다 살아내지는 못 해도,
나중에 우리가 죽으면, 주님이 우리를, 그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터인데,
뭘 그렇게 빡세게 ‘청교도적 회심, 변화된 삶, 성화, 거룩한 삶’을 주장하는가?
이왕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닌가? .. 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실
-구원을 믿음으로 쉽게 받을 수 있다.. 는 주장과
-구원을 진실로 받아도..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는 쉽지 않다.. 는 주장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저 램버트는, 이에 대해, 한 가지 ‘판정 기준’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 기준이란,
그가 과연,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있어서 ‘대가를 지불하느냐?’입니다.
그가 대가를 지불하며, 일평생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면.. 그는 ‘알곡’이요,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가 일평생 자기는 마음속으로 진실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대가지불을 하지 않는 것,
십자가 지기를 거부하는 것,
그러면서 그저 내게 필요한 구원만 받겠다고 하는 것은,
그는 ‘가라지’요, ‘돌 밭’입니다.
구원 받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아무리 말세에 ‘물이 바다 넘치듯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가득 넘쳐도’,
아무리 마지막 날에 주님이 신비하게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해도,
-크리스천으로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신자.
-크리스천으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제자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신자.
그들이 구원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전반적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그 대가 지불은, 위에서 인용한 디모데서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딤후3:1~5절,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반대로 적용하면, 대가지불이 되지요)
‘나는 모든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이 나를 도살하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주님을 여전히 신뢰하겠습니다.’
-그가 바로 진정 구원받은 크리스천입니다.
정말 구원 받은 성도, 즉 ‘돌 밭’이 아니라, ‘좋은 땅’은
환란과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린아이처럼 ‘주님, 이것을 피하게 해 주세요!’ 라고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도움과 함께하심으로써, 이 환란을 이기게 해 주세요.
이 환란을 통해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일종의 대가 지불이지요!
▲(관련글) 한국의 청년 가운데, 한 자매가 중동선교사로 나갔는데,
지금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황인가 봅니다. 이런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제가 깊은 기도 가운데 울부짖는데, 주님이 제게 물으신 질문이 있었습니다.
너는, 내가 어떠한 모습으로 너 앞에 나타나도,
너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너 앞에 다가와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겠느냐?
어느 누구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는다.
너는 그렇게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처음에는, 주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잘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려졌습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힘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의 영역 속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예수님’을 믿는 이 세대로 인하여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도 그랬습니다.
그동안 제가 힘들다고 느꼈던 모든 것들은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이 저를 도와주지 않으셨던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섭리와 방식으로,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계셨지만,
저는,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이 저를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불신하고 있었지요.
저는 앞으로
‘제가 원하는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모습 그대로’를.. 제가 구하고 사랑하겠습니다.
그런 제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힘들다, 어렵다, 못하겠다, 답답하다..’ 언제까지 그런 소리만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위 선교사를 본받아,
‘내가 원하는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대로 믿고 따를 수 있는,
대가를 지불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그런 성숙한 ‘좋은 땅’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로, 이라크에 참전한 미군들이, 아침 조회 때마다 불렀던 노래라고 합니다.
섬짓하네요!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원래 가사는, 나는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네.
I have decided to follow Jesus.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네.
No turning back, no turning back. 뒤돌아서지 않으리. 즉 후퇴하지 않으리.
Though none go with me, yet I will follow. 아무도 나와 같이 안 가도,
Though none go with me, yet I will follow. 그러나 나는 주님을 따르리.
Though none go with me, yet I will follow.
No turning back, No turning back. 뒤돌아서지 않으리. 나는 후퇴하지 않으리.
...................
주1) 용어 해설
*성도의 견인: 성도는 믿음의 여정에서 환란과 우여곡절이 많으나,
하나님이 천국까지 끌고 견인해 가신다는 뜻. 즉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란 뜻.
이왕에 영어표현도 알아둡시다.
성도의 견인은 ‘perseverance of saints’.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은, “once saved always saved, Eternal Security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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