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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 출33:18, 빌3:10~14 출처 中文
마틴 로이드 존스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모했는데도,
신약의 성도인 우리들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구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다른 그 어떤 나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보다는,
하나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경험,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하고, ‘주님이 제게 와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간절히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예, 물론, 여러분들이 기도를 열심히 드리신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여러분의 각자 기도제목이 있을 것이고,
선교사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고,
자기 교회를 위해서도 아주 간절히 기도하고,
또한 자기가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위해서도, 우리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 자기 개인적 기도제목 말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그 하나님의 임재와, 친밀함과, 하나님을 아는 것을 구하는 기도를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드려본 적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주옵소서!” 출33:18
‘제가 당신께,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시옵소서’ .. 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다른 것을 구하기보다, 하나님 자체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시편42편에도, 시인은 똑같이 모세처럼 기도했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
제 마음이 지금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서, 갈급하나이다.’
‘제 심령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너무 간절히 찾다보니,
아주 갈급하게 (즉 마음이 안절부절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기도가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한 구절이 있는데, 시17:15절입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나는 회개하고, 의롭게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상태에서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 주님의 얼굴을 간절히 주목한다는 뜻입니다.
잠시 힐끗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가만히 주님의 얼굴만 계속 바라보고 있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보셨지요? 우리가 위에서 세 구절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 시42편, 시17편.. 구약의 성도들이, 기도할 때, 그들이 무엇을 간절히 간구하였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신기한 것은,
그들은 아직 구약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신약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멀리서, 장차 이루어지게 될 복음과,
장차 나타나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을.. 멀리서, 수 백~ 수 천 년 전에,
그저 기대하며, 멀리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약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성령의 감동으로,
그것이 장차 다가올 것을 알기는 알았지만, 그저 어렴풋이, 희미하게만 알았던, 구약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
히브리서11: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다..’ 고 했는데, ‘그것들’이란.. 곧 장차오실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였으며,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핍박을 받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성경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요일3:2
사도요한도,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사모했다는 뜻입니다. ☞관련글/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은,
구약의 성도들이 그렇게 갈망하고 고대했던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내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영광’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자세히 증언한 성경책을 통해
구약의 성도들이 희미하게 바라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고, 명확하게,
복음과, 그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환하게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야와 갈보리의 십자가를.. 희미하게 내다보는 성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신 메시야와 골고다의 십자가를.. 다 일어난 일들을, 뒤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숨겨지고, 감춰진 사실이 아닙니다. 모든 진리와 그 영광이 명백하게 드러났고, 또한 성령께서 우리를 감화하셔서, 우리가 그 진리들을 확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자꾸,
그런 신약의 성도인 우리들을,
위에서 살펴본 구약의 모세, 시편의 시인들과, 비교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희미하고 모호하게 본 구약의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복음과,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본 신약의 성도인, 오늘날 우리들은,
그렇게 열심히 복음과, 그리스도와, 그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하지 않고, 나 자신, 내 문제, 내 소원만.. 열심히 간구하고, 기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입니까?
우리는 신약성도들이라고,
은연중에 구약 성도들보다는, 더 은총과 특권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은근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우리 가운데 일부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이런 신약 성도로서의 특권을, 전혀 모르거나,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실제 경험에 있어서, 그들과 우리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물론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 시대에, 마치 침침한 호롱불빛 밑에서 신앙생활 한 사람들이라면,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밝은 광명과 영광을, (성경을 통해서) 직접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구약성도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그들이 가졌던 또한 사모했던, 하나님 자체와, 그 영광, 그 지식을 간구한 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것은, 부흥과 직결됩니다.
▲제가 오늘 이 설교를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고, 주님 자체를 구하는’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부흥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식의 부흥을 추구하는 것은.. 참된 부흥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흥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구약의 성도들처럼.. 하나님 자체만 간절히 구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 누군가,
우리의 신앙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 자체와, 그 복음과, 그 하나님의 영광 자체’를 기도하는 것이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부흥을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기도로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 자체를 기도로 구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부흥을 구하는 기도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자체와, 그 분의 영광 자체를 간구하면서,
심령의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는 역사는,
개인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고, 한 무리의 그룹으로도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이렇게 하나님 자체를 간구하는 개인이나, 일단의 그룹의 사람들이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신약 성도인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를 보니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보아서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까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기는 했지만, 아직 우리처럼, 완전한 성경을 읽고, 보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가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그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얻은 지식을, 한데 모은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모세는 ‘주여,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주옵소서!’ 출33:18 이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안타까움이 가득 찬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비록 완전한 성경을 읽고 보면서,
구약의 성도들이 갖지 못한, 어마어마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영광을 친히 알고 있는 특권을 가졌지만,
오늘날 우리도, 모세와 같이, ‘주여,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죄로 오염되어 있고,
교회마저도, 많이 시들어있고, 활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보듯이, 죄와 악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날 우리도, 모세처럼 ‘주여,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주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 가운데,
이런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없어서, 시들어진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고서도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만,
어쩐지 현실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뭐 자꾸 부흥이 필요하다느니, 부흥을 위해 기도하자느니.. 그렇게 말하느냐, 지금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는데, 왜 자꾸 난리를 치느냐?’
‘지금 우리들의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가 아니냐,
교회가 복음주의 즉, 에반젤리칼 처치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면,
그거 잘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형제여, 형제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까, 형제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 영광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 드러내고 있군요!’
‘오 형제여, 당신은 지금 기독교가 잘 되고 있고,
일부 교회는 활동도 왕성하며, 축복도 받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외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영광이 나타남을 사모하는 마음.. 그런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이군요.
당신은, 하나님 그 분 자체를, 목마른 심령으로 간절히 사모하는
그런 신앙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군요.’
▲저는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삶이 너무 바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무서운 힘만 가진, 그런 억압적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으로 계신데,
모두 다 인격적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을
거의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저는 놀라워합니다. 기이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앙자세가 나태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생각하기로는, 그저 ‘복 주시는 하나님’ - 그것 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을 ‘복 주시는 어떤 존재’로만 여기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 분과 교제하는 것은.. 개념조차 아예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이 점점 성숙되어 가면서 신앙적 체험과 지식이 더욱 깊어지면서 성도들은, 점점 더 ‘하나님 자체 God himself’ 만을 갈망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들만 갖고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지 않고, 주님을 갈망하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총과 남다른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빌3:10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그렇게 주님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고,
그 어떤 누구보다도, 주님을 가장 친밀히 아는 바울이 ‘자기는, 주님을 더욱 깊이 더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주님의 부활과 고난과 죽으심을 본받아,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나도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말합니다. 11절.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처럼, 깊고 신령한 체험을 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어지는 12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아직 아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우리 개역성경에는
‘내가 이 모든 것을 이미 얻었다는 것도 아니며, 이미 완전해졌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처럼,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깊이 알고도, 아직 완전하지 않고 더 알기 원한다고 한 것과,
반대로 오늘날 우리들이
주님을 알기를, 전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깊이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 알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영적인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고, 우리에게는 영적인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뒤에 것, (즉, 과거의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그 푯대란, 문맥상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 비전, 자기 야망의 푯대가 아닙니다.) 푯대를 향하여, 더 박차고 열심히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빌3:14.
그러므로 뒤에 것은 잊어버리십시오. 13절. 과거에 내가 얼마나 잘 믿었나.. 그런 것은 생각하지도 마시고, 자랑도 마십시오.
진짜 잘 믿은 사람, 진짜 예수님을 깊이 아는 사람은,
사도바울처럼, 뒤에 것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보이는 푯대가.. 더 자기 눈에 뚜렷이 들어오니까요.
▲그런데 여러분이,
제 설교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재미가 없어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영적인 빈익빈 현상이 나타난 것이며, 자기가 너무 믿음이 없으니까, 주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그거 하나라도 반드시,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그저 ‘내 관심, 내 소원, 내 야망’만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그렇게 자기가 기도시간을 내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으니까,
자기 스스로 만족하면서,
‘내 신앙은, 그래도 성숙한 신앙이야...’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주님과,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런 마음이 있으십니까?
모세처럼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까? 바울처럼 ‘내가 아직 아는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과거 것은 잊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더 알려하여.. 더 푯대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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