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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 매력, 상황적 필요, 종착역 4090

LNCK 2013. 5. 6. 15:23

◈순간적 매력, 상황적 필요, 종착역                마5:1-12                      07.08.12.설교스크랩

 

 

 

 

 

◑기독교 신앙은, ‘순간적 매력’도 아니고, ‘상황적 필요’도 아닙니다.

   ‘마지막 종착역’입니다.

 

▲‘마지막에 돌아오는 곳’이 중요합니다.

수십 년 전에 발표되어서 히트한 팝송이 있었습니다.

‘save the last dance for me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추어주세요.’

 

여자 친구와 같이 댄스파티에 간 남자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데

‘당신이 댄스파티에서 이 남자 저 남자와 춤을 출 수는 있겠지만

당신을 누가 집에 데려다 줄지를 기억하세요. 마지막 춤을 저와 함께 추어주세요.’

이런 내용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생각, 우리의 사상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의 말에 잠시 이끌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됩니다. 또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이 말씀이 하나님이었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러므로 탕자가 결국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의 생각의 방황도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올 때만, 우리의 생각의 방황이 끝나는 것입니다.

 

▲<순간적 매력>과 <상황적 필요>

그런데 사람의 마음을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순간적인 매력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젊으셨을 때 순간적인 매력의 위력을 경험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람이 순간적인 매력 때문에 배우자를 결정할 수도 있고,

순간적인 매력 때문에 전공을 결정할 수도 있고,

순간적인 매력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서 살 수도 있고,

많은 인생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매력은 파워풀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 있고,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손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상황적인 필요에 의한 것입니다.

 

지금 나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좋아하고,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선택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 내게 도움이 된다면, 더 이상 무슨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지금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이상 볼 것이 뭐가 있겠느냐 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바로 지금 나를 도와주는 것, 그것이 진리가 아니겠느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간적 매력>도 아니고, <상황적 필요>도 아닙니다. ‘마지막 댄스’입니다.

위 두 가지가 다 우리에게, 아주 강한 유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가 되는 이유는

순간적인 매력 때문도 아니고, 우리의 일시적인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널뛰는 많은 이념, 사상, 많은 생각의 유희,

이런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루해 보일 수 있고,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교리로 보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말씀이 진리입니다. 그것이 진짜 진리입니다.

 

서두에 든 예화로 설명하자면

(좀 죄송한 표현이긴 합니다만) ‘마지막 춤은 성경말씀’과 추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순간적 매력을 좇아가보고,

저기 현실적 필요를 따라가 보지만,

빨리, 탕자처럼이라도, 하나님께로, 그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상황적 필요>를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금식하고 계실 때

‘사십 일이 차매 매우 주리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한계 상황에 도달했을 때 우리를 시험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강렬한 욕구가 있을 때,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예수님이 매우 주리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 매우 파워풀한 유혹이었습니다. 당장의 필요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지금 배가 고픈데, 이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나의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떡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신명기 8:3절을 인용한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당장 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는 않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해서 살겠다.. 라는 예수님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재 상황 해결, 현재 위기 극복이.. 주된 지향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단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를 하지만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일시적인 필요에 종속시키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기도, 내게 도움이 되는 교회,

이런 식으로 내 필요에 신앙을 종속시키려고 합니다마는

 

그러나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는 그것이 시험이 된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가 평생 묵상해야 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형태에는 대체적으로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지금 내 현실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부르짖고 내가 애를 써서.. 하나님을 나의 현실로 끌어 모시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이든, 믿음의 능력이든, 소원을 이루는 믿음이든

이런 모든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이미 나와 함께 계시는데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다가

이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얻고,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나에게 와 계셨어요. 이미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이 두 가지를 비교하면

첫째는 ‘나는 지금 불행하고, 불쌍하고, 궁핍하고, 고통스러운데

하나님이 오셔서 나의 상황을 바꿔 주시면, 내가 성공할 수도 있고

또 행복할 수도 있다. 그게 잘 믿는 것이다.’ 이런 유의 생각이고,

 

두 번째는 ‘나는 내가 불쌍하고 불행한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님을 믿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나는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요

이미 복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사할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는 옳고 하나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필요합니다.

 

때로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되고

또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법을 알아야 되지만..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늘 부르짖는 것이 될 수는 없지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불신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다고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판단을 불신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내 현실 속에 이미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이미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고 열심히 믿더라도

‘하나님의 판단이 옳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너무 무력하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너무 조용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하나님은 너무 점잖으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좀 더 크게 소리를 내지 않을까, 왜 하나님이 더 서둘러 주지 않을까,

왜 하나님이 더 활발하게 역사하시지 않을까,

결국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요, 하나님이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드러내놓고 그렇게 말은 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옳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게 아뢰고 부르짖고, 내 소원을 알려서

하나님이 기어를 바꾸게 해야 되겠다!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합니다.

 

◑팔복 해석 -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팔복, (혹은 구복) 은 후자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든가, 애통한다든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우리가 평소에 복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식이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애통하는 것, 누가 그것을 원하겠습니까?

자녀가 온유하다는 말 듣는 것도 별로 원하지 않아요.

그것은 이 시대에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가 영리하다, 똑똑하다, 능력이 많다, 이런 말은 듣기 좋아하지만

온유한 자녀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여러분의 기도제목에 있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온유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그 사람들이 정말로 결국은 승리한다는 얘기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이 결국 승리하고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넓은 영역(땅)에, 그 영향력을 미치고, 발휘하는 것입니다.

 

▲팔복은, 첫째 하나님은 지금 내 현실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부르짖고 내가 애를 써서.. 하나님을 나의 현실로 끌어 모시려는 것..이 아니라,

 

둘째 하나님은 이미 나와 함께 계시는데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다가

이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얻고,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나에게 와 계셨어요. 이미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다 복된 것임을.. 내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 확신 되어지면,

현재 나의 처한 모든 상황이,

그것이 애통하는 것이고, 주리고 목마른 것이라 할지라도,

다 복으로 해석되어 지고,

 

그런 곤란과 환난들을 통해서, 내가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므로,

그게 진짜 복으로 이해되어 집니다.

이해되어질 뿐만 아니라, 그게 진짜 복입니다.

영원한 영생의 관점에서 볼 때, 팔복이 진짜 복입니다.

 

 

.............. 더 읽으실 분 ..............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씀은,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릇을 비워야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릇을 채워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비워야 되는데

우리의 그릇은 이미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첫째는 하나님이 채우실 수도 없거니와

둘째는 우리도 채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미 나는 풍족하고, 이미 나는 풍성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원치 않고,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나는 가득 차 있는데 그걸 비울 필요도 못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올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임자가 있는 사람과도 같아요.

이미 임자가 있기 때문에 더 좋은 분을 만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런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이 세상 것에 대해서 궁핍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열려 있고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역사하실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마음이 착하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고, 마음이 나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인데,

우리가 의로워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다만 이 세상에서 천국이 필요 없는 사람은, 내세에서도 천국이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이 세상에서 천국을 목말라 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사람,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고,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에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천국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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