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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훗 - 자기 부정의 힘

LNCK 2013. 5. 8. 11:18

◈에훗 - 자기 부정의 힘                  삿3:12-31            07.12.25. 출처

 

이 설교문의 주제는,

‘인간의 참된 자기 부정만이 하나님의 긍정을 이끌어낸다.’,

또는 ‘참되게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을 하나님은 긍정하신다.’ 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를 세우십니다.

 

▲오늘 첫 번째 사사인 옷니엘 사사 시대가 지나가고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숲이라고 하는 것은 여리고 성을 말하는데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셔서.. 다시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선민들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그들을 채찍질 하시고,

그들과 부딪치시고 그들과 충돌하시느라고

우리 선민들의 이 땅 위에서의 인생의 역사가 다 소모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풍요와 다산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끌어가실 결실입니다.

 

근데 우리가 풍요와 다산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면,

우리와 환경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옷니엘 사사가 죽고 나자, 이스라엘이 또 다시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갑니다.

영적 지도자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서서히 육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모압 왕 에글론을 시켜서

종려나무 숲, 즉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십니다. :13.

 

이때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빌고 나오자

하나님께서 이번에 세운 사사가 에훗입니다.

 

삿3:15,「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구원자’ - 여기서 우리가 이 짧은 말 속에 담겨져 있는 깊은 뜻을

한번 꼭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야샤’인데,

단순히 전쟁에서 자기 백성을 구해내는 의미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서 구원자이신 하나님, 예수님을 가리킬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사60:16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야샤),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이 말은, 죄에서 구원하다, 구원자의 의미로, 이사야서에서만 20~30번 나옵니다.

 

▲한 구원자를 세우셨다... 삿3:15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왕 에글론의 핍박 아래 있게 됩니다.

이때 ‘한 구원자를 세우셨다’ 라고 하는 말은 참 많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예요. 독립투사를 내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 라고 하는 것,

독립투사는 핍박을 받는 민족을 사랑해서 자기 스스로 선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은, 애국지사가 아닙니다.

나라를 사랑해서 스스로 그 나라를 그 민족을 구원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밝은 미래를 내다보며 비전을 제시하는 그런 지도자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 지도자를 인가해주시고 승인해주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인도해 낼, 구원자를 세우셨습니다.

 

영적 지도자를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물론 에훗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오른손 지파에서 태어난 왼손잡이

 

▲에훗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으로서 왼손잡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3:15

 

왼손잡이 라고 하는 이 히브리말은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왼손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오른 손을 잘 못 쓰는 사람’ 다시 말하면, 오른손이 마비된 장애인이란 뜻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긍정의 힘>이 있습니다.

이 긍정적, 적극적 사고방식은,

1970년대 노만 빈센트 필 박사가 유행시키기 시작해서,

1980년대 로버트 슐러 목사님께서 이어서 유행시켰다가

(나중에 슐러 목사님은, 거기서 한 발 빼셨습니다)

지금은 조엘 오스틴 목사에 의해서, 다시 유행되고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라고 하는 저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 이게 주제 아닙니까?

 

근데 오늘 본문 성경이 에훗이라고 하는 사람을 묘사하면서

에훗의 성격을 예언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이 모습은 뭐냐?

 

왼손잡이라고 문자대로 표현을 했어요.

근데 그 문자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냐?

 

오른 손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른 팔이 마비된 장애인인 셈입니다.

 

성경은, 그 왼손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을, ‘왼손의 달인’이라는 식으로 기록하지 않고,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특히 여러분, 베냐민 지파라고 하는 것은

벤이 ‘아들’이고, 야민은 ‘오른 손’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이름 자체가 ‘오른 손의 아들’입니다.

 

그럼 ‘오른 손의 아들’(베냐민)의 지파에서

오른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은

(왼손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성경은, 그 에훗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 비유되느냐?

엄마, 아빠 그리고 형님, 누나 다 일류대학 출신인데

막내만 혼자 전문대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에훗의 자질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외적 조건만 보고 따지면, 평균 이하로 뒤떨어진 사람이었지요.

 

이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나의 강점과 나의 장점을 드러내서 그것을 극대화해서 사노라가 아니라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에훗이 쓰임 받은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긍정의 힘이 아니라, 자기 부정의 힘

 

▲여러분! 여기에 참으로 기독교 진리에 신비한 힘이 들어있습니다.

참되게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이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 부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은 그 자를 긍정해 주십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나를 긍정하고 내가 나의 인생을 긍정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참되게 자기의 위치를 하나님 앞에서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르게 자기를 부정하는 겁니다.

 

우리가 열등감을 가져요.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합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이 세상의 기준과 비교해서 나를 못하다고 나를 부정하는 겁니다.

 

이런 부정을 참된 부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내가 열등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성경이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이 원하는 ‘자기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뭘 말하는 것입니까?

 

오른 손이라는 것은 ‘권능’을 상징합니다. 능력을 상징하고 힘을 상징합니다.

근데 오른 손을 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주어지는 삶에 대해서

스스로 권능과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자라는 의식이

에훗 속에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예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내게 주어지는 일, 내게 주어지는 과제에 대해서

스스로 권능과 힘을 나타낼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알고 있었고 깨닫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권능과 힘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나는 나로서 내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소원을 따라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계획에 따라서, 내 의지를 따라 살아가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러한 삶을 적중시키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권능도, 지혜도 없다는 것을.. 에훗은 스스로 깨닫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에요.

그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서 쓰십니다. 하나님이 긍정하시는 것이에요.

 

주님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비하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받은 자라고 하는, 그 십자가의 자리까지 나가십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자기를 아주 극한적으로 부정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활의 사건으로 긍정해주십니다.

 

▲여러분!

긍정의 힘이라는 말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합니다.

 

깨졌어요. 적어도 장로교 그리고 정통 루터교에서 말하는 것이

형상이 깨져 버린 겁니다.

근본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에요.

 

내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에 대해서

내가 마음대로 소원하고 마음대로 계획하고 마음대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내가 깊이 깊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부정이

하나님의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 난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인 것을 내가 나도 부정하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은, 나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 라고 명확하게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을, 하나님은 “네가 맞다!”고 여겨주신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모습이 내 모습일 때

자식 앞에서도 십자가의 모습이 내 모습이고, 남편 앞에서도 아내 앞에서도,

사업 앞에서도 직장 앞에서도 무슨 일 앞에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모습이 내 모습일 때

거기에는 긍정의 가능성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에요.

 

완전히 부정되어야 하고 그 부정되는 것이 구약에서 뭐로 나타납니까?

 

번제. 각을 떠서. 왜?

살 속 깊이 깊이, 뼈 속 깊이 깊이 죄악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각을 떠서, 뼈 속 깊이까지 다 드러내고, 파 낸다는 뜻입니다.

그걸 태워서 잿더미로 만들어버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부정을 철저하게 해야 되는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에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사건을 가능하게 하세요.

 

어떻게 해야 가능해집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정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이 하나님의 긍정이 가능해집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신 주님께서

이 임마누엘을 가능하시게 하기 위해 하셨던 일이 뭡니까?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뭡니까?

머리털 한 끝, 바늘 끝만큼이라도 긍정의 요소가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자각하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에요.

 

그것이 나다! 주님이 죽으셨지만 그것이 바로 나다!

 

▲마치는 말

오늘 에훗이 오른 손잡이의 아들들 이라는 지파에서 태어나서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본문에, 예언적인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자기 스스로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이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여기 보면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우리의 모범은 뭡니까?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사실 그 이외의

다른 모범과 모델이 없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지 않으면, 위인은 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구원자’는 될 수 없습니다. 작은 예수의 사명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에훗 같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게 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앞으로 나가게 되고,

하나님이 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오른 손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사실을 깨닫는 자들입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나를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고

무엇이든지 허락하신 것에 대해, 오른 손을 대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

손을 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 부정의 레일 위에

내 인생을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기차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긍정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긍정하는 게 아니에요.

<긍정의 힘> - 이거 아주 아주 무서운 얘기입니다. 여러분!

 

너무 너무 무서운 이야기들이, 너무 너무 교묘한 이야기들이,

비기독교적인 이야기들이 교회 안에 여과 없이 만연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에요. (07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