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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요리의 맛과 독

LNCK 2013. 5. 1. 16:31

 

◈복요리의 맛과 독                신33:1-29                 2007.11.07.  출처

 

◑복은, 복어와 비슷합니다.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유언적으로,

열두 지파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복요리’로 빗대서 한번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복어할 때 그 복자가 한자의 복福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음이 똑같기 때문에, 한번 그것을 비유적으로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복어 요리가 참 맛있지요.

저는 복어를 개인적으로 처음 먹어본 게, 제가 장신대 신학생이던 시절에,

교수님이 저에게, 광나루 강변에 있는 복어 집에서, 복어 매운탕을 사주셨습니다.

 

그때 그 복 매운탕 밑에 깔려있던 그 미나리와 콩나물이

아유~ 지금도 침이 넘어가서 설교를 못하겠는데, 그게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그 콩나물이 국물이 시원하고 했던.. 그 기억이 나요.

그 뒤로는 기회가 있고 때만 되면, ‘복 매운탕, 복 지리’를 먹곤 합니다.

 

▼근데 여러분, 복어가 위험하지 않습니까?

테드로드톡신이라는 독이 있어요.

 

근데 이 복어 한 마리가 갖고 있는 독의 양이 어느 정도냐 하면

성인 33명을 즉사하게 할 수 있는 맹독성의 독을

복어 한 마리가 그 자체 안에 갖고 있어요.

 

복어 알 속에 주로 있고, 복어의 장이나, 간 속에도 독이 있다고 그래요.

그리고 피부에도 독이 있는데, 피부에는 아주 옅게 독이 들어 있다고 그럽니다.

 

부산 해운대에 아주 유명한 ‘복어 집(식당)’들이 몰려 있는데

부산 관광, 해운대 관광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복’이라고 하는 거 복어는, 너무너무 시원하고

한번 맛을 들이면, 때때로 꼭 먹어야만 될 만큼 중독성이 있는 강한 맛을 지닙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또 맹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을 쉽게 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복도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복이 없는 사람, 복을 못 받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복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문제는 그 복을 복으로 느낄 수가 없고, 복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을 제대로 누리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이 복은 복어를 잘 못 먹어서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복을 받기 위하여 애쓰고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지고 있는 복 주어져 있는 복들을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의 복의 예를 한번 들어봅니다.

 

▼장애인 형편에 계신 분들에 비해서 신체가 온전한 것을

우리가 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력을 예로 들면, 눈이 잘 보이고, 시력이 정상적인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그 눈으로 날마다 보고 있는 것이

고작 사악한 것이고, 음란한 것이고,

타인의 단점과 타인의 추악한 점만 들춰내면서 보고 다닌다 그러면

 

이 눈으로 이 세상에 있는 전혀 복스럽지 않은,

영적으로 온갖 쓰레기 같은, 영적으로 아주 악한 기운만, 내 눈으로 다 들어옵니다.

 

그럴 때 이 눈은, 복이라기 보다는, 저주와 불행의 원천이 됩니다.

차라리 안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온갖 세상의 악하고 더럽고 추악한 모든 기운을, 눈으로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건강한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쪽 눈을 빼고, 천국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너를 실족케 하면, 빼어 내버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은, 마치 ‘길’과 같습니다.

내가 눈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쳐다볼 때는,

내가 쳐다보는 그 대상의 영향력이, 내 눈을 통해서, 내게로 들어오게 됩니다.

 

마치 내 눈과, 그 쳐다보는 대상인 사물 사이에,

‘길’이 생겨서, 그 영향력이, 내 눈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사실과 사건과 사람을 본다. 그럴 때

그냥 객관적으로 그림 보듯이 보여지는 게 아닙니다.

 

그 사건과 보고 있는 사람들 속에 있는 모든 선하거나/ 또는 악한 영적 기운들이

우리 눈을 타고, 다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지요.

 

‘눈길을 준다’할 때, ‘눈길’이라는 말이 있지요?

내가 어디든지 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 것으로부터 길이 생겨서

보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영적인 기운이/ 정신이/ 어떤 영이

거기로부터 몰려오고 있는 겁니다. (눈)길을 따라서.

 

그러니까 눈이 멀쩡한 게 복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건강한 눈의 복을 잘 누려야지요. 그래야 복이 되는 것이지,

 

잘 못 누리면 눈이 독이 돼서 결국 사람을 불행하게 하고

온갖 참담한 모든 현실을 다 내 것이 되게 만들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귀도 마찬가지고, 입도 마찬가지에요.

왜 그 입을 가지고 맨날 불평불만만 합니까?

차라리 입이 벙어리가 됐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입만 열면 불평이고, 입만 열면 불만이고,

입만 열면 의심에 찬 소리고, 모든 게 짜증이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입이 없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귀도 그래요. 왜 그런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만 들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방송만 틀면 사방천지에서 들려오는데

하나님 말씀 듣는 시간은 24시간 중에 30분도 안 되고

우리 귀가, 온갖 세상의 소리만 듣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귀가 열린 게 그게 복입니까?

저주 중에 저주가 될 수 있지요. 온갖 걸 다 담고 있는데..

차라리 귀가 먹어서 그 세상의 쓰레기 같은 모든 악한 영이

내 안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더 복이겠습니까?

 

그러니까 복어가 맛이 있지만 잘 못 먹으면 죽는 것처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들도 잘 못 누리면, 잘 못 사용하면

그것이 나를 죽이는 독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복을 바랄 게 아니에요. 여러분.

 

◑임재가 이루어지면, 내 삶의 모든 현장이 '복'으로 이해됩니다.

 

▼분문에, 12지파에게 모세가 유언적으로 복을 빌어주면서

그 앞에 신33:1~5절까지 그 모든 복들, 12지파에게 내리는 다양한 복들을

참으로 복이 되게 하는 조건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뭐냐?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든 복은 다 복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을 복으로 느끼게 하고 복을 복으로 누리게 하는 조건이 무엇이냐?

보면,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내가 경험하면

그러면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복이 됩니다.

먹어서 맛있는 복이 되는 반면에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져버리고 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지 않으면

제일 먼저 하나님이 지금 내 옆에 와 계신다는 것을 내가 느낄 수 없으면

모든 복은 다 독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의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신33:2~3

 

이 하나님과의 만남, 임재 이 경험을 통해서

모든 사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생애 순간이 다 복으로 바뀔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단,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의 사모님께서 우울증을 심하게 겪으시다가

기어코는 정신 이상의 단계까지 가는 불행한 경험을 하시고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 우울증에 빠진 엄마와

또 정신 이상이 되어서 정말 상식적인 선 바깥에 행동들을 마구 하시는

그런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항상 엄마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겁이 나서 방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그 엄마를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그런 경험들을.. 한 2~3년 겪으면서, 어린 시절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마침 하나님의 큰 섭리와 은혜가 있으셔서인지

목사님께서 서른이 되신 처녀와 새 장가를 들게 되셨습니다.

 

그 새어머니가 아주 큰 유치원을 경영하시던 원장님이셨어요.

근데 그걸 다 그만 두시고, 가난한 시골 목사님 가정으로 시집을 오시게 됩니다.

특별한 사랑과 사명을 가지고, 아이가 둘이 있는 곳으로 그렇게 오시게 됐어요.

 

유치원 원장님을 하시던 분이다 보니까, 그 아이를 대하시고 하시는 것이

마음에 사랑도 있으시고, 또 대하는 것이 워낙이 탁월하시니까

교육적인 면에서, 심지어는 아이들을 다루시는 테크닉 면에서도

탁월하신 그런 역량을 발휘하시면서 새 엄마가 되셨습니다.

 

근데 아이들이 제가 만나 봐도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겁니다.

엄마의 자리 하나가 바뀌었을 뿐입니다.

 

갑자기 목사님이 그 사모님을 얻으시고, 경제 형편이 나아진 것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좋은 옷을 많이 사줄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외식을 자주 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특별히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엄마 자리가 하나 바뀌었는데

아이들의 삶 전반에 걸쳐서 아이들이 너무 너무 밝은 생활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학교 선생님까지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런 걸 목사님이 얘길 안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연락이 온 거예요. ‘아이들이 왜 이렇게 갑자기 바뀐 겁니까?’

학교생활도 확 바뀐 거예요. 너무 밝아지고 너무 명랑해지고

대인관계도 너무 좋아지고.

엄마 자리 하나 바뀌었는데... 이런 놀라운 변화가, 아이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겁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삶으로 임재하시게 되면

아버지 한 분 (새롭게) 들어오시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한 분 들어오셨다고, 그래서 특별히 갑자기 달라진 게 없어요.

내가 뭐 재벌이 되겠습니까? 갑자기?

갑자기 하루아침에 일어났더니, 신데렐라가 호박이 변해서 황금마차가 된 것처럼

내 조그만 차가 갑자기 대형 외제차가 되겠습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삶 전체가 천국으로 바뀌는 거예요. 삶 전체가 복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 대한민국 땅에 태어난 것부터 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조그만 오두막 같은 아파트... 이게 다 복인 걸 느끼게 돼요.

 

▼심지어는 내가 병이 났다고 합시다.

근데 그 병이 난 현실까지도 갑자기 둔갑을 하는 겁니다.

뭐로 둔갑을 합니까? 복으로 둔갑을 하는 거예요.

 

왜 이게 복으로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함께 만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다 복으로 변해. 병까지 복으로 변한다니까요.

 

그런 현실을, 여러분, 경험해보셨어요?

 

사업이 자꾸 기울어져 가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 사업이 기울어지는 자체가 왜 복인지 알게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은혜인지 알게 되더라는 얘기입니다.

 

▼세일 산에서 임하시고, 시내 산에서 오시고, 바란 산에서 일만 성도 가운데,

‘일만 성도’라는 것은 천사들을 말합니다. :2

 

천군 천사들과 함께 내 앞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천국을 거느리면서 오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천사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그들의 역할을 천사가 한 것처럼 바꾸시는 하나님.

 

악마도 천사가 타락한 거 아닙니까?

근데 그 타락한 악마가 한 행동도 내게 해를 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그런 모든 것들이 다 구원의 역사요, 은총으로 바뀌어가는 거예요.

 

형들이 요셉을 팔아먹었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지만 그 판 사건이 구원의 사건을 이루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만 임재하시면.

 

▼근데 하나님의 임재를 가만히 보면 말입니다.

‘산에서 강림하셨다.’ .. 고 하셨습니다. 33:2

 

이 산이 뭐겠어요?

삶의 현장에서 떠난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내 삶 가운데 체험하려면,

내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좀 동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불을 가지셨어요.’ 33:2b

번쩍거리는 불을 갖고 계십니다. 이 불이 뭐겠습니까?

 

삶에 찌들어있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가 없어요. 그냥 불에 타버려요.

번제 제사의 의미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려면,

그 불에 지금 삶에 찌들어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대신에

하나님을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것 대신에

이 세상 것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상태가 불에 타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이 하나님 대신에, 다른 걸 사랑하는 이런 상태로 가까이 갔다간..

내가 그 불에 타 죽어요.

 

그러나 번제로 내가 드려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하면,

그 불은, 내게 ‘성령의 불, 능력의 불’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는도다.’ 33:3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발이 가는 곳을 따라서 쫓아가는 그게, 말씀을 듣는 거지요.

말씀을 듣고 쫓아가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발을 보고 쫓아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임재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곳이 어디 입니까?

하나님이 이 지구상에서 이젠 어떤 곳에도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시내 산에도, 세일 산에도, 바란 산에도 임재하지 않으십니다.

 

어디 임재하십니까?

갈보리 주님의 십자가 사건 위에 임재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가 죽은거다 라고 고백함을 통해서

그 갈보리 산이 내 안으로 쑥 들어옵니다. 그 갈보리 산 위에 임하시는 거예요.

 

이 위에 임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이 내려오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내가 죄인으로서 다가갈 수 없었던 관계를

주님의 그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의 불이 다 태워서

나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은 것을 고백할 때 비로소 무엇이 일어납니까? ,

하나님의 발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발이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지시하는 지시가 들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지시는 내 바깥에 들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소원으로 들립니다.

내 마음의 소원과 확신과 평강으로 들립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근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어떨 때요?

주님의 십자가에 달려서 산 위로 올라간 때!입니다.

 

삶에 대한 관심, 삶에 대한 애착과 사랑에서 죽어서 떠났습니다.

삶에 대해서 죽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모셔 들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발이 보입니다.

그러면 삶에 내려와서 삶의 현장에서 그 발을 따라가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게 될 때 모든 게 복이 된다는 거예요. 복요리와 똑같아요.

 

제대로 맛을 느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복요리 먹다가 죽습니다.

하나님이 다 복으로 주신 것인데

하나님의 임재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되지 아니하면

삶의 모든 복이 다 독입니다.

 

설사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그게 복인걸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또 건강도 복이죠. 그러나 건강한데 하나님의 임재를 모른다.. 그러면

거꾸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되면 건강하지 못해도 복인 반면에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지 않으면.. 건강해도 독이 됩니다.

 

차라리 아팠으면 나을 것을..

아팠으면 영적으로 그렇게 까지 심하게 나쁜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영적으로 그렇게 깊은 수렁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을..

 

아프지 않은 바람에 그만 그것이 독이 되어서

내 삶을 죽이고, 내 영혼을 죽이고, 내 심령을 썩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 하나님 임재가 없이 돈이 많은 그거.. 좋은 거 아니고요,

하나님 임재 없는 좋은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거..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복이 되고 모든 게 복이 돼요.

 

대학을 못 들어가도 복이요 들어가도 복이요.

임재가 임하면.. 병이 나도 복이요/ 안 나도 복이요.

 

이거 꼭 오늘 하루 동안에 경험하셔서 12지파에게 내리는 모든 복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경험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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