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적 사역의 5가지 잘못된 기준 롬14:17 출처 English
Five American Myths of Successful Churches and Ministries Chinese
Joseph Mattera 정리.
제 Mattera가 지난 34년간,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경이 말씀하는 성공의 기준과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미국)교회가 말하는 성공의 기준이란,
어쩌면 마23장에서, 예수님이 신랄하게 비판하신, 그런 잘못된 기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23장에 보면, 예수님은, 당시 지도자들이
종교적으로 높은 직위를 얻는 것을 흠모했고, 유명인사가 되는 것을 좋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인정을 받기 원했는데,
그것들은, 예수님이 엄격히 야단치신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세기가 지나면서, 교회와 신학은, 아무래도 역사와 세상 환경의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교회도, 어쩔 수 없이,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며,
그 결과, <목회와 사역의 성공>에 대한 기준도, 성경에서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
이 글은, 어떤 유명한 사역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목회와 사역의 성공>에 관한, 성경적 표준, standard가 무엇인지,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표준을 안다고, 다 그대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표준과 목표가 무엇인지 알면,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는 일에, 많은 제약과 제지를 (스스로) 받을 것 아닙니까.
◑1. 교회의 크기가, 성공의 척도는 아닙니다.
The size of the church shows success.
미국의 일부 교회는, 세워진지 불과 수년 만에, 수천 명의 성도가 모이는,
그렇게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고, 좋은 일입니다.
또한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네시아에 가면,
오늘날 이렇게 성령의 역사로, 급속도로 성장하는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가 그렇지는 않지만, 미국의 일부 교회들은,
‘이동 교인’에 의해서, 세워진지 불과 몇 년 만에, 수 천 명이나 모이는
그런 교회들이 오늘날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걸 두고서 ‘교회가 부흥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잘 알려진 교회가, 다른 지역에 지교회를 세울 때,
또는 잘 알려진 목회자가, 다른 교회를 세울 때.. 종종 발생합니다.
이건 뭐 자연발생적인 일이므로,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지만,
이걸 두고서, ‘부흥이 일어났다’고,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역의 성공의 척도를
‘교회의 외적 크기’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다분히 세속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유명세는 없더라도,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찬양팀의 실력이 월등하거나, 교회 행정을 잘 해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목회자의 설교의 카리스마도 그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요인들이 있기에,
그런 요인들은, 그 지역의 다른 작은 교회들이, 아직 갖추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런 앞서가는 요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교회는 급성장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 지역의 다른 교회들은, 성도들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전체 몸’이란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대형화 추세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어쩌면 단점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이 기독교의 부흥이며,
우리 기독교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어떤 방향인지, 명확하게 밝히자는 것입니다.
무조건 교회가 커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
다들 박수 쳐 주고, 그런 것보다,
성경적 표준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보자는 것입니다.
회중의 숫자가 많든지, 적든지.. 그 숫자에 관계 없이
그 가운데, 진정 회심하고, 회개하고, 삶이 변화되는 신자들이 생겨나고,
그 변화된 신자들이, 정말 뜨거운 마음으로 이웃과 친구를 전도해서,
새로운 결신자들이 한 두 명이라도 더 늘어나는 교회...
그 교회는, 싸이즈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성경적으로 참 좋은 교회입니다.
설교자들도, 자기 설교를 몇 명 들었다.. 그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과연 몇 명이나 회심하고, 몇 명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작은 무리의 숫자가 모인 교회라 할지라도,
그 설교를 듣고, 작은 무리의 회중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며,
회중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앙의 길을 깊이 깨달았다면...
그래서 그들 가운데 영적인 성장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그 교회가 바로.. 성공한 사역이요, 성공한 목회입니다.
변화되지 않는, 수 천 명의 회중보다는, 훨씬 더 귀중합니다.
물론 ‘작은 교회가 무조건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신자들이, 그 교회에서, 올바른 영적 성숙을 이루지 못하여,
주변의 다른 (큰)교회로 옮겨가려 할 때,
무조건 그 (큰)교회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상한 방향성과, 이상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데,
진정한 성령의 역사, 신앙 성숙, 회심과 변화.. 이런 신앙적 역사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교회가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정통 복음과 관계없이, 사람들에게 솔깃한 주제의 설교를 하면서,
여러 마케팅 기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일부 시도가 있는데,
그게 방향성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지요.
일부가 잘 몰라서, 그 길로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대다수가, 주류의 흐름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건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급성장한 교회가
젊은 목회자들에게 장래의 모델이 된다면.. 그건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전혀 영적으로 성숙되지도 않고, 헌신되지도 않은
명목상의 신자들이 그득한 교회,
숫자만 많으면 우리가 최고라는 교회!
이런 교회에서, 우리는 탈피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젊은 사역자들은, 교회의 크기를 목표로 삼지 말고,
1년에 1명 이상이라도,
신앙성숙, 삶의 변화, 회개, 회심, 제자화, 전도와 결신.. 등
기독교 사역의 본질에, 자기 목표를 정하고, 진검 승부를 걸어야 할 것입니다.
이게 1~2년 만에 되는 것은 아니므로,
승부를 일찍 거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우리가 다 아는 문제이지만,
대형화 된 교회의 문제점 중 한 가지는,
그곳에 다니는 성도, 그곳의 교역자들이, 자신을 스스로 대단히 높이는 일입니다.
교회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부교역자도, 자기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교구식구들이, 수백~수 천 명이면,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수 백 명 앞에서 설교하고, 예배를 인도할 때, 그런 느낌이 안 들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이런 분들은,
오늘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교회는,
모슬렘 권이나, 북한 지하교회에서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같이 기도하고 찬송하는,
그 숫자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의 예배와 헌신이.. 정말 참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내가 큰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성공한 사역자/직분자/교인’으로 착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또는 예수를 전파하는 일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이.. 온 세상에 정말 많이 있습니다.
큰 교회에 몸 담는 일이 꼭 다 나쁜 일은 아니지만,
그 모슬렘의 극심한 핍박 중에서, 믿음을 이어가는 사역자나 성도님들을 기억하면서,
적어도 우리가 최고라고, 착각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참 교회와 참 성도의 성경적 ‘기준’을 정하려면,
오히려 ‘핍박 받는 분량’으로 정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한 기준이 될 것입니다.
◑2. 예산의 크기가, 목회의 성공은 아닙니다.
The amount of the budget shows success.
교회에 헌금이 많이 모이고, 그래서 선교사역이나 교회 행사에 많이 쓰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꼭 ‘성공적 목회의 척도’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성공적 목회의 척도가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자들의 세미나, 또는 다른 어떤 모임에 가면,
목회자, 장로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은 두 가지를 서로 물어보고, 서로 궁금해 합니다.
-몇 명이나 모이느냐는 것과,
-얼마가 걷히느냐.. 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질문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먼저 이 질문부터 확인하고 넘어갑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아직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신자입니다.
아니, 아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만약 교회지도자라면, 그는 세속화된 지도자입니다.
▲물질의 풍부함은,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미국이나 한국의 이단 교회들도 보십시오.
한국에는 문선O, 이만O(신천O).. 등이, 엄청나게 헌금을 많이 모을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참 하나님의 교회나 성도들이, 물질의 어려움을 당하는 시기가 있고,
같은 시기에, 하나님께 버림 받은 영혼들이, 물질의 풍부함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물질이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은, 정말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서 죽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교회가 많은 물질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면서,
나아가 공공연히 자랑까지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걷은 헌금의 액수를 자랑하고,
자기가 받는 수많은 사례비를 자랑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께 받는 은총의 표시’로 여기는, 잘못된 신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반 신자들도, ‘돈이 많은 것을 보니, 축복을 많이 받은 것임에 틀림없군!’
하면서, 그런 교회나 지도자를 따라가기까지 합니다.
이런 인식은.. 우리가 고쳐야 합니다.
헌금이 많이 모여드는 것은, 다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그것이 ‘참된 경건의 척도’라고 보는 것도.. 성경적 관점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신약의 예수님, 사도바울, 사도들.. 다들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아랍의 석유 부호들, 세계적 은행자본가들, 인도의 힌두교 부호들,
다들 어마어마한 부자들입니다. 물질적 부와 기독교 신앙이 꼭 비례되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이 많이 모이든지, 적게 모이든지
교회와 성도는, 단정하게 사치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인색하고, 남에게 후한 것이..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후하고, 타인에게 인색하다면..
그는, 자기가 받은 물질에 대해서, 청지기로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어쨌거나, 운용하는 예산과 물질의 크기를 보면서,
그 사역의 경건성을 측정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임을, 우리는 꼭 기억합시다.
자기가 가진 물질의 크기에 상관없이,
충실한 청지기로서 사명을 다한다면.. 그와 그 사역은, 성공한 사역자요, 교회입니다.
◑3. 지도자의 유명세가, 사역의 성공의 척도는 아닙니다.
The celebrity status of the leader shows success.
살다가 보면, 유명세를 타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TV나 라디오에, 한 두 번 나오는 사람이, 계속 나오게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역자를, 무슨 연예인과 똑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TV에 많이 비치게 되면.. ‘저 분은 훌륭한 사역자야!’ 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TV에 많이 비치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게 ‘목회자의 성공을 나타내는 척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마테라는,
비록 TV에 나오지는 않지만, 즉 대중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곳곳에, 정말 놀라운 설교자들, 성경교사들, 목회자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잘 모르시더라도, 저는 전국을 다니는 강사이기 때문에, 잘 압니다.
그들은 스스로 유명한 것을 회피합니다.
그들은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심령들의 한계와 범위 안에서
자기의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지역사회 안에서는 인정과 존경을 받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정해 주시는 성도나 사역자는,
꼭 유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등경 위의 등불처럼, 높이시는 일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등경 위로 올라가서, 스스로 자기를 홍보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높이시지 않는데, 자기가 여러 마케팅 기법을 동원해서
스스로 높이려 하다가는.. 큰 일 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책을 저술하고 출판하거나
기타 여러 방식으로, 자기를 홍보하고, 스스로 유명해지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런데 만약 사역자들이, 그런 길을 모방하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치심을 받아서, 몰락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 영성과 신앙의 깊이가, 하루아침에 급속하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주 천천히,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대단히 높여 버리고, 마침 그 방법이 통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곧 그의 이중인격과, 이중생활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유명해지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인간적 수단을 강구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추락하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임을.. 꼭 기억하십시다.
물론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는 분들도, 분명히 많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저 세간에 유명해지는 것이,
‘그의 목회나 사역이 성공했다’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나의 인간적 시각과, 내가 세속적 신앙인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척도로, 사역자와 그의 사역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공과 참된 인정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정, 갈채, 박수.. 이런 것을 많이 받으면서도,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인정을 만약 듣지 못한다면,
그는 불쌍한 사역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들의 인정, 갈채, 박수.. 이런 것을 많이/ 적게 받음에 관계없이,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인정을 듣는다면,
그는 참으로 성공한 사역자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이, 즉 세간에 유명해지는 것이.. 사역자의 목표는 결코 아닙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주님이 맡기신 일에 내가 성실한 것이.. 사역자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가는 그 (넓은) 길을 버리고,
사람들이 안 가는 그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진정 성공하는 사람이다!’
처음부터 유명해지는 것은, 십중팔구.. 인간적 유명세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안 가는, 그 좁은 길을 묵묵히 가다보면,
10년~20년~30년 지나서.. 그가 유명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명해지는 것, 유명하지 못한 것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는 것! - 그것이 나의 참 만족입니다.
◑4. 지도자의 직책이.. 그의 성공의 척도는 아닙니다.
The title of the leader shows success.
저 마테라는 지금까지 30년 이상 사역자로 주님을 섬겨왔는데,
보니까, 자기 직책은 거창한데,
즉, 자칭 사도, 비숍, 레버런드 등으로 자기를 일컬으면서도,
거기에 따르는 사역적 열매는 전혀 없고, 이름만 거창한 사람들을 참으로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참고로, pastor(목사)라는 명칭은, 좀 겸손한 표현이고,
사도 Apostle , 비숍 Bishop, 레버런드(Rev.) 등은, 좀 거창한 이름에 속합니다.
‘목사들을 관장하는 목사’란 뜻이나 의미로, 쓰입니다.
비숍도, 가톨릭에서는 ‘주교’라고 불리는데,
한 도시나, 한 도 province 전체를 관장하는 신부를 ‘비숍(주교)’라고 부릅니다.
진짜 레버런드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존경받는,
‘목사들의 목사’도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목사 pastor 라는 명칭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는 목적으로
사도, 비숍, 레버런드의 명칭을, 스스로 자기 이름 앞에 갖다 붙이는 것은,
보기에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한국적 상황으로는, 사도, 비숍, 레버런드 라는 명칭은 쓰지 않지만,
노회장, 교단장, 신학박사, 총장 등의 명칭은, 쓰기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잘 섬기는 목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 명칭을 쓸 수는 있지만,
혹시나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그런 특별한 명칭을 쓰는 것은,
주님이 그를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사역자들이, 자기 명칭을 비숍이나 사도 등으로 특별히 사용해서,
스스로 자기를 남들 위에 높이는 것은,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자기를 높여주니까,
그런 방식이 시중에 통하는 것을 보고서, 계속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일반 신자들도,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높은 직책과 타이틀이, 꼭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게, 그가 하나님의 참 종이라는 표식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 권사, 여선교회 회장 등의 직책을 가지기 원합니다.
그게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과도하게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건 성경적이 아니지요!
사역자나 일반 신자나
교회의 모든 직책은,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남들 위에 군림하고, 무슨 감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 교회만큼, 초고속으로, 무슨 직책을 쉽게 딸 수 있는 곳도,
세상에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중에 일부, 자기 정체성 self-esteem이 특별히 낮은 사람이
교회에서, 특별히 ‘자리’에 탐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리’에 올라가면,
특별히 ‘에헴’ 하면서, 자기 권위를, 과도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다, 자신이 스스로,
‘자기 정체성 self-esteem이 특별히 낮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셈입니다.
쉽게 목사가 되려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훌륭한 선배 목사로부터 추천, 지도, 양육을 오래 동안 받아서..
정식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 스스로 목회자가 되는 사람은..
목회자가 된 후에도, 스스로 많은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셔서,
그리고 전체 회중과, 선배 목사가 인정해서,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된 사람은.. 아무 탈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사도, 비숍, 레버런드, 목사, 장로, 박사가 된 사람은,
그게 되면.. 자기가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진짜 되고 나면.. 더 괴로운 것.. 혹시 아십니까?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를, 정당한/합법적 직분자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스스로 더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목사, 장로, 선교회장, 박사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주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 크리스천’으로
무한한 만족과 영광을 누리는 자유자들입니다. 직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나서, ‘직분의 멍에’에서 자유할 뿐만 아니라,
무슨 외적인 직책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그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을,
우리 스스로 자꾸만 교정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5. 목회자가 저렇게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 나도 성공하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The affluent lifestyle of the leader shows success.
일부 신자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성공하는 목회자와 그 교회를 찾아가는데,
그 이유는, 그 비결을 배워서,
자기도 덩달아, 그 목회자처럼, 성공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비록 세상적, 사업적 분야이지만 말입니다.
또 일부 목회자는, 은근히 그런 정보를 흘립니다.
자기가 유명 정치인과 친분관계가 있으며,
유명 기업인과도 가끔 점심식사도 같이 하며,
여러분도, 나처럼 믿으면, 나처럼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는 식으로 설교합니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너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이며, 결코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세속적 관점을 가지게 되면,
지도자는, 가급적 비싼 차를 선호하게 되고, 높은 생활수준을 선호하게 됩니다.
그것도,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처럼 믿으면, 나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 라고요!
그러나 성경이 전반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신령한 축복이 더 중요하지만, 물질적 축복을 받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물질을 펑펑 쓰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부자가 될 수록, 오히려 근검절약해서 살고,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고 가르칩니다.
선교사도, 선교지에서, 전도를 위해서, 너무 가난하게 살 수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교사가 너무 가난하게 살면,
그 선교사를 보고서,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는.. 그런 가치관과 사고방식이지요.
이게 모두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을 펴고, 정직하게
기독교 신앙과 복음의 A. B. C 초보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마치는 말
오늘 본문은, 롬14: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의 복, 복음의 영광과 축복은,
물질적 풍부에, 또는 세상적 성공에..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물질적 풍부는,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하지만,
그러나 우리 신앙과 믿음을, 더 북돋워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 퇴보시키기 쉽습니다.
이 글은, 누구를 비판하는 목적이 아니고,
우리 기독교 신앙의 표준과 목표를, 올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너무 세속적 기준으로, 판단/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 세속적 기준의 판단과 평가가, 설교방송을 통해, 여과 없이 유통되었던 적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의 기독교인들이
성경적이 아닌, 세속적 기준으로 기독교를 판단, 평가, 수용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기준의 성공이, 즉 숫자와 물질과 유명세의 성공이,
목회적 성공이 꼭 아닐 수도 있다는 것! -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남이야 어쩌든지,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남의 세속적 성공을 비판하면서도,
나도 기회가 되면, (지금 기회가 안 되어서 그렇지) 얼마든지 그렇게
세속적 성공의 기준을, 나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보라!’ 하면서요!
내가, 세속적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고, 또한 남을 평가하려고 할 때,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세속적 기준을 몽땅 다 버리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회개해야 합니다.
내 신앙 수준이 아직 어리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내 신앙이 점점 성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볼 때, 또한 성도를 바라볼 때,
세속적 기준이 아닌, 성경적 기준으로,
나와 모든 사람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덧붙여서, 오늘날 미국에
많은 은행재벌들이 도덕적 해이로 비난을 봇물처럼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남의 일로 여기지 말고, 거울로 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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