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3

부실한 기초 / 에이든 토저

LNCK 2013. 5. 17. 14:46

www.youtube.com/watch?v=LH1oO4cexMo

◈부실한 기초                    렘9:23-24                          출처보기

 

Shaky Foundation   by A.W. Tozer 의 글을 풀어서 편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9:23-24

  

▲오늘날 교회에서 되어지고 있는 사역과 활동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기독교 사역과 활동의 “기초”가

성령, 은혜, 권위 있는 말씀, 믿음, 인애, 등에 세워져 있지 않고,

 

위 예레미야서의 말씀처럼, 사역자들이,

사람의 지혜, 인간적 용맹, 물질의 풍부에 기초하고, 자랑하면서

기독교 사역과 활동을 펼쳐나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저 토저는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심리학, 또는 목회자의 자기 전공이나 전문 분야, 자기 육신적인 탤런트,

즉 자기가 인간적으로 남들보다 잘하는 어떤 은사를 앞세우고,

 

성령, 은혜, 권위 있는 말씀, 믿음, 인애 등

하나님이 주신 원래 기독교적 힘과 능력으로 사역하는 면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그게 다 기독교의 기초가, 부실해지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건물이 멀쩡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10층 건물에 기초는 얄팍한 것과 같지요.

화려할수록, 높이 올라갈수록.. 결국은 더 위험한 것이요,

마치 째깍 째깍 돌아가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기독교의 기초가 부실해지는 원인은,

신자들이 너무 기독교 신앙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의 깊이가 너무 얕아서,

기독교를 거의 수박 겉핥기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례를 들면,

수많은 (미국의) 권사님들이, 목사를 사위로 맞이하기 원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미 결혼한 자기 딸의 남편도, 즉 사위도

장차 목회자가 되기를, 장모님들이 간절히 기도하는데...

(미국은 결혼을 20대 초반에 하고, 신학대학원은 20대 후반에 갑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보니까,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사회를 보든지, 설교를 하든지, 찬양을 인도하든지..

그게 그렇게, 권사님의 눈에는, 근사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이고,

제 토저가 우려하는 것은,

어떤 신앙심과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명감으로,

사위가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전혀 아니라,

 

그저 목사가, 주일날 강대상에 서 있는 모습이, 너무 근사하게 보여서,

자기 딸의 남편도,

저렇게 근사한 목회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소원을 갖고 기도한다면..

그게 얼마나 “기초가 부실한 신앙”이냐는 것입니다. ←이 글의 제목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겉모습이 근사한데> 너무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인지 기독교 신앙도,

점점 겉모습만 근사하게 꾸미는데 모두가 신경을 쓰고 있고,

 

그래서 그 속을 뜯어보면, 아무것도 알맹이가 없는,

그런 신자, 그런 교회로.. 점점 하나씩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토저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어서, 그가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가 겉모습만 번듯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목소리가 차분하고, 복장이 산뜻하면.. 무조건 ‘훌륭한 신자’로 단정해버리는

그런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겉모습은 그다지 근사하지 않더라도, 촤밍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의 언어와 행동이 터프하고, 좀 시니컬하다 하더라도,

좀 교회와 기독교의 본질을 속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그런 신자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겉모습은 신사적이고, 나무랄 데 없고, 흠잡을 데가 없고,

누가 봐도 영락없는 목회자요, 영락없는 판박이 모범 성도인데,

즉, 단아한 무대 매너와,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인데,

 

그 속의 신앙적 깊이는 전혀 없는..

만약 그런 신자들로만 교회가 넘쳐난다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바탕과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

저 토저는 우려하는 것입니다.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서 살펴봅시다.

한 지역교회에서 목회자를 새로 청빙하려고 할 때,

청빙위원들이 가장 잘 보는 점이, 새로 부임할 목회자의 ‘눈에 띄는 인품’인 것 같습니다.

 

척 보니, 그가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그의 외모가, 태도가 말투가, 영락없는 훌륭한 목사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해가 지나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서로의 속과 내면을 보게 됩니다. 그건 감출 수 없습니다.

그때 기초가 부실한 지도자는 결국은 표가 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청빙은 대단히 성공적입니다.)

 

동네 이웃집 아이들 중에도 보면,

운동회 때나 학예발표회 때, 무대에 나와서

뛰어난 자기 재능을 나타내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대에서 잠깐 ‘단 몇 분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대에서는, 훌륭한 재능을 나타내지만, 가정이나 학교에서 뒤처지는 아이도 있고,

무대에서는 뒤에 서서 자리만 채우고 있지만, 가정이나 학교에서 성실한 아이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점점 <외모지상주의>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외모>가 아닙니다.

외모만 아름답게 꾸미고, 속은 텅 비어 있는 것은.. 부실한 건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교가, 겉만 아름답게 꾸미는 부실 건축이 아니라,

원래 기독교 신앙의 원리대로,

성령, 은혜, 권위 있는 말씀, 믿음, 인애, 등에.. 튼튼히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 방향으로 꾸준히 지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 외 다른 것들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고후6:15

   Accepting Christ Means Rejecting All Else

 

by A. W. Tozer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면만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한 구절만 떼서 보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전부인 것 같지만,

성경을 전반적으로 보면, <영접>과 동시에 <버리는 것, 포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쉬는 숨을 예로 들면, 들숨과 날숨이 있습니다.

들이쉬는 숨이 있으면, 내쉬는 숨도 있습니다.

그게 두 개가 번갈아 일어나는 것입니다. 계속 숨을 들이쉬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동시에 내가 밖으로 내 버리는 것들이 반드시 있다.. 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면,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와 같이 지낼 수 없는 것들은.. 내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같이 지낼 수는.. 불가능합니다. 고후6:15.

 

그래서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일생에 어느 날 한 번, 내가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정으로 그 영접하는 역사가 자기에게 일어난 사람은,

그리스도가 자기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적이지 못한 모든 것들을, 내버리는 작업을

죽어서 천국에 갈 때까지,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육신과의 전쟁, 마귀와의 전쟁, 죄와의 전쟁은,

일평생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그 영적 전쟁에서 면제되는 날은,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날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리스도만 내 속으로 영접하는 것만.. 내게 일어나고,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내어버리는 역사가, 만약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면, '지식적 동의'로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지,

진정한 회심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아닙니다.

 

즉, 자기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런지는 모르나,

주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주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는,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그를 구원해 주시지는 않은 것입니다.

 

(※구원은.. 내가 스스로 믿기로 결단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주님이 나를 '초자연적인 역사로' 구원해 주셔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조건 좋은 일만 생긴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도록.. 우리에게 환란과 연단을 주십니다.

 

여러분, 만약에 세일즈맨이 물건을 팔 때,

그 물건의 장점만 얘기하고, 단점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면에서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물건의 장점만 소개 받고, 그 물건을 사게 됩니다.

 

여러분, 부흥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는,

예수 믿으면, 무조건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일즈맨이 홍보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예수 믿어서 치러야 하는 대가, 십자가 고난.. 이런 것 죄다 얘기하면,

누가 선뜻 예수를 믿겠다고, 그 자리에서 결신하고, 따라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전도 방식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웁니다.

아예 잘못된 선입견으로 기독교신앙을 출발하면, 좀처럼 그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세상을 사는 원리가 다 그렇습니다.

Give and Take 라고 하나요?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고요,

들숨이 있으면, 날숨도 있습니다.

들숨만 계속 쉬고, 날숨을 안 쉬면.. 그는 곧 사망합니다.

 

그리스도를 들이쉬는 것은,

그리스도와 반대적인 것들을, 다 내 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세일즈맨의 과도한 열심에 속아서,

기독교는 들숨만 쉬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다 내어버리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다만 이 글의 주제는

‘영접하는 것’ .. 한 면만 생각하지 말고

‘버리는 면’ .. 이것도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