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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은 계시에 고난이 더해진 데에서 나온다 / 워치만 니

LNCK 2013. 6. 2. 17:44

◈사역은 계시에 고난이 더해진 데에서 나온다          고후4:1, 골1:23                출처보기

 

워치만 니

 



 

간단하게 수학적 공식으로 본다면.. 계시 + 고난 = 사역입니다.

 

사역은.. 계시고난이 더해진 데에서 나옵니다. ←전체 주제.

계시가 없다면 그에게 공급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사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계시가 있을지라도, 만일 고난이 결여된다면,

그는 사역을 가질 수 없습니다.

만약 계시 (여기서는 성경 지식, 신학 지식을 뜻합니다.)는 있는데,

고난이 없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일종의 가르침이나 은사일뿐 사역은 아닙니다.

가르침의 은사가르침의 사역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가르침의 사역은.. 더 높고 깊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르침의 은사는.. ‘사역’과 비교하면, 얕고 값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계시, 즉 깊은 깨달음, 또는 통찰력 있는 말씀을 받았다면,

그 분은 당신으로 하여금, 사역을 갖도록 하기 위해

당신을 고난 가운데 두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기록으로부터

그가 고난 받기 전에, 계시를 얻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시를 얻은 후에 그는 즉시

계시를 사람들에게 가르침이나 지식으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가르침이나 은사의 발휘일 뿐.. 사역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가 계시를 얻은 후, 주님은 그를 여러 고난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러므로 그의 모든 서신들에서, 다음과 같은 순서를 갖습니다.

 

첫째는 계시이고, 둘째는 고난이며, 셋째는 이 두 가지에서 나온 사역입니다.

계시+(플러스) 고난=사역입니다.

 

▲계시를 얻는 것과, 이 계시가 역사(사역)되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예를 들면, 도자기에 그림을 새겨 넣는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어떤 그림을 도자기에 그리고

그런 다음, 그림이 완전히 도자기와 하나가 되도록, 도자기를 가마 속에 넣습니다.

 

불가마를 거쳐서 비로소,

도자기와 그림은.. 하나를 이룹니다.

문향이라는 말이 더 고상하지만, 쉬운 말로는 ‘그림’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또는 깨달음, 또는 신령한 지식을 얻는 것은

마치 우리 위에 그림을 그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우리와 하나를 이루기 위해, 우리 안으로 완전히 새겨져서

우리 몸과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일단 그림 또는 문향이, 도자기에 새겨져서, 불가마를 통해 완전히 구워지면,

그 무엇으로도 문향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도자기와 문향은 나눌 수 없게 됩니다.

도자기와 그림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도자기가 깨질 때 그 문향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 도자기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몸통에 새겨진 그림 또는 문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 또는 문향이, 불의 용광로를 통과해서, 도자기와 일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성경 지식이, 말씀이.. 우리 몸에 체질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의 사역자가 되려는 사람은,

고난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그저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고,

고난을 통과한 사람은.. 자기 몸에 새겨진 성경 지식,

즉 더 살아있고 체험적인 생생한 지식을.. 전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생명을 얼마나 공급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풍성이 얼마나 있는가는

전적으로 우리가 계시를 얼마나 얻었고,

우리가 얻은 계시가 고난을 얼마나 통과했는가의 두 가지 요소에 달렸습니다.

계시에 고난이 더해져야만 우리는 사역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어떤 가르침이나 은사의 차원을 넘어서, 사역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사역, ministry)을 받아 』(고후4:1절)

 

그는 또 『 나 바울은 ... 일꾼 (사역자, minister)가 되었노라 』(골1:23절)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강사나 교사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사역자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성경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 자기 몸에 체득된 살아있는 생생한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은사와 사역의 차이

우리는 발람의 당나귀를 예로 들어, 은사와 사역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이방 선지자의 당나귀가 갑자기 말을 했습니다.(민22:28-30)

이것을 사역이라 부를 수 있는가요?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발람의 은사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당나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은사이지, 사역은 아닙니다.

 

사역은 우리의 어떠함의 표현인 반면에,

은사는 단지 일종의 연기입니다.

(여기서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자기의 재능, 탤런트, 자기의 주특기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원숭이 조련사는

때로 원숭이를 사람처럼 연기하도록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일종의 은사 혹은 연기입니다.

 

▲오늘 기독교의 많은 활동 중, 거의 대부분이 연기에 속할 수 있습니다.

가령, 사도 바울이 우리 교회를 한 달 동안 방문한다면

우리는 "바울의 삶 자체가, 바로 그가 사역하는 것 자체이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가 본 것은, 또는 그가 받은 말씀은,

이미 그의 온 존재 안으로 조성, 즉 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그의 존재요, 인격의 어떠함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곧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학식이 있고,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특별한 옷차림으로 단상 위에서 독특한 어조를 띄고 설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일종의 연기일 뿐, 사역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는 아직, 고난을 통과하지 않았고,

그가 아는 말씀이, 자기 몸에, 완전히 유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들, 시대마다 쓰임받았던 종들도, 그런 지도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신령한 교회 건축’에 있어서

은사(탤런트)는 사역만큼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역자는, 말씀이 자기 몸에 유착된, 그래서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자리에 있기만 해도

사람들에게 생명이 공급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두 편의 서신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는 소극적으로 언급된 은사이고,

고린도후서에서 열쇠가 되는 단어는 바로 적극적으로 언급된 사역입니다.

 

바울은 전서에서 은사를 낮춘 반면에, 후서에서는 사역을 높였습니다.

후서에서는 은사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전서에서는 은사가 여러 차례 언급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은사가 필요 없다거나,

성경 지식이나, 신령한 계시를 받는 것이.. 중요치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수준에서 만족하지 말고,

진정한 사역을 하기 원하고, 진정한 사역자가 되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사람을

고난의 용광로와 풀무불을 통과하게 하셔서

자기 은사, 자기 지식, 자기 계시가

마치 도자기의 문향처럼, 완전히 자기 몸과 하나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이 쓰실 말씀의 사역자들은,

그렇게 말씀 플러스 고난으로, 진정한 사역자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