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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 담겨 있는 복음 / 김성수

LNCK 2013. 6. 27. 07:02

◈에덴동산에 담겨 있는 복음     창2:8‐17       김성수 목사님 창세기 12강, 출처

 

 

※구약도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라.. 는 명제는 참 입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구약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과거에 우리는 특히 구약을 '삶의 교훈, 삶의 요령(복)을 주는 지침'으로 해석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선악과와 생명나무에 관해 공부를 하면서

그 두 나무의 상호관계가 지향하는 하나의 합일 된 원리를 찾아내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는 ‘죽음 속에 꽃 피는 생명’이라는 복음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가지고 십자가를 만드시고

그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 안에는, 선악과를 따먹고 죽어야 할 죄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된 산 자들이

함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한 죄인들은

반드시 그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은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에 관해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고

오늘 본문의 <에덴동산의 묘사에 담긴 복음의 메시지>에 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악과

 

▲먼저 우리는 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향해야 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내용과 원리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창2:1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을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게 되면, 인간이 선악을 알게 되어 죽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인간은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이 없을 때, 선악을 모를 때.. 참 인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렇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적어도 인간이라면 선악을 분별하여,

선은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을 모를 때에.. 참 인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하겠지요?

제가 전에 성경에서 ‘선’ ‘토브’라는 말이 가장 처음 쓰인 곳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지어지고 나면

그 때마다 ‘참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쓰인 단어가 ‘토브’ ‘선’입니다. ‘참 선하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선’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목적대로 완성되어 존재하는 상태’를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추구해야 하는 성경이 말하는 ‘선’은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 낸

윤리나 도덕이나 도리(道理)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맞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의 주장과 고집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100세에 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그 아들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이 ‘선’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윤리관하고는 안 맞지요?

 

그 때 만일 인간의 윤리를 따라 ‘어떻게 어린아이의 몸에,

그것도 친자식의 몸에 칼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할 짓이 못돼’하고 그 명령을 어기게 되면

비록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것을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를 비롯해서

육축(六畜)까지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을 하셨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선’입니다.

만일 도의적인 차원에서 아이들과 여자들과 살진 가축을 살려두면

그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라면 죽이는 것이 ‘선’입니다.

 

기생 라합처럼 비록 거짓말을 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관심을 두고 행하는 것을 ‘선’이라고 하는 것이고

윤리를 따라 국가에 충성하겠다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선’을 행하게 되는 것이고, 그 때 비로소 참 인간 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 순종의 상태, 그 상태가 바로 선악을 모르는 상태인 것입니다.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선이라고 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하는 것을, 악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은 오직 하나님만이 판별하여 결정하실 수 있는 영역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알게 되자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들 스스로 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가 선악의 판별 자가 된 것입니다.

 

▲(창 3:22)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는 말은

선과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이 판별을 하시고 구분을 하시는 것임에도

인간들이 선악과 열매를 먹게 되자

인간이 하나님처럼 스스로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별하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하나님의 말만 잘 듣고 순종하며 살면 되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였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에

인간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선악과의 순종은, 생명나무로 가는, 징검다리였던 것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예표

 

▲그런데 인간은 티끌입니다. 거름더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지 않을 때의 인간은, 그야말로 똥 더미에 불과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그 사실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참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을 때에만 가능 한 것이라는 것을

에덴동산에서부터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나무를 통해 인간의 불가능함을 지적하시고

그 선악과나무에서의 실패를 통해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생명나무 열매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 원리가 그대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로 확대되어 보여 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고 하지요?

몽학 선생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헬라와 유대 사회에서

어린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도덕과 윤리와 기초적인 학습 교육을 담당하던

가정교사 노예를 말합니다.

 

그 몽학 선생은 아이가 성숙해서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인간이 선악과에서의 실패를 통해 은혜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생명나무 열매를 인식하게 되듯이

율법에서의 실패가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나무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몽학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 그리고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비교해 보세요.

 

▲인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생명나무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다리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로 생명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를 먹은 것입니까? 예수를 먹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티끌’인지라 도저히 그 율법을 지켜 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허망함과 보잘 것 없음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선악과’ 이지요.

 

그리고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를 사모할 수 있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하던 율법이

바로 선악과로 미리 힌트 된 것이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나무로 힌트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비로소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며

하나님은 이제 새롭게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렇게 하나님께만 순종하며 그 분께 모든 삶을 의뢰하는 자들로

그 분의 백성을 삼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처음부터 에덴과 아담과 하와가 목적이셨던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과 아담과 하와를 통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힌트 하시고

만일 그들이 불순종하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며

그 나라는 어떠한 원리로 완성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경이며 역사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께만 의존하며 그 분께 꼭 붙어 있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신약에 잘 설명이 되어 있지요?

 

◑에덴동산은 ‘구원의 도리’를 보여 줌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한 마디로 뭡니까?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이렇게 창조부터 시작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의존하여

그 분께 붙어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었는데

타락을 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처음부터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타락과 심판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명을 잘 지키고 순종할 때,

다른 말로 하나님께 꼭 붙어있을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께 꼭 붙어 있는 자들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여기서 계명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지켜내야 할

도덕법이나 제사법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내거는 구절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 자는 계명을 지킨 자가 되었다’라는 선포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로 회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일 2:3‐6)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안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하나님께 바치는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구절도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키는 자라야,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이 구절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분 안에 거하게 된 자들은

이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켜낸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된 자,

다시 말해 계명을 지킨 자가 된 것이라는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 구절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를 입은 자들이, 실제로 계명을 지키는 삶을 추구하게 되고

성숙하게 되며 결국에는 그렇게 완성이 될 것이라는 복된 선포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구절들이 문자 그대로 율법을 다 지켜내는 자가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자신의 구원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좌절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계명을 지킨 자로 회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고,

그 분께 맡기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왜 우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실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생명나무 실과를 먹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었는데도

 

왜 이렇게 여전히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이며 살까요?

왜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그의 말년에 자기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의 괴수’라는 표현을 썼을 만큼 우리는 여전히 악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인격과 오성 속에서,

그리고 이 역사 속에서 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의 상호관계가 지향하고 있는

십자가라는 은혜의 복음을 삶으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완성된 그 현실을 인격과 오성 속에서

육으로 경험하여 체득하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자마자 성자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때부터 ‘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나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시간이, 그렇게 짧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러분에게 그렇게 자주 실망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때로는 절망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알면 알수록

우리 속에서 나올 것은 쓰레기밖에 없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안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나’라는 존재가 점점 명확하게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옥까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삶에 은혜가 없으면 난 도저히 불가능한 존재’라는

깊은 자각을 하게 되는 것이고(선악과)

 

그 절망은 우리를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자주 절망하도록 놔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인생 속에서, 아담이 되는 것이고 가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가 주는 참담함을 맛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아브라함이 되고, 바울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의 행복 또한 경험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아담이 되고, 가인이 되면서

동시에 노아가 되고, 아브라함이 됩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 열매를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여러분의 삶으로 직접 맛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원리로 사셨습니다.

 

▲그렇게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삶으로 살다 가신 분이 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연합되셨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겪는 암흑 속에 던져지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동산인 에덴에서 쫓겨나

세상이라는 땅에 갇혀 버렸던 것처럼 (地獄)

 

주님은 죽음이라는 감옥에 갇히셨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 분의 삶 자체가 선악과와 생명 나무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무덤 속에 들어 가셨을 때에 성부 하나님께서 은혜로 다시 살려내시지 않으셨으면

영원히 무덤 속에 계셔야 하는 지경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대표와 내포적 대신이 되셔서

그 분은 하나님의 감옥인 무덤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놀라우신 은혜로 우리를 품고 감옥에 들어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사면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삶을 그대로 살다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의 무덤을 천사가 열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너무 힘을 쏟으셔서 힘이 없으셔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이 손수 그런 것을 하시는 것이, 그 분의 명예에 흠이 되기 때문입니까?

 

(히 13:20) “20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여기서 ‘이끌어 내다’라고 번역이 된 ’아나고’는

재판정에서 쓰던 법정적 용어입니다.

 

(행 16:34) “(간수가) 저희를 데리고(아나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이렇게 ‘아나고’는 법정에서 쓰던 법정적 용어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예수님의 무덤 문을 열고

예수님을 이끌어 내시는 장면을 연출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고 지옥에 갇혀버린 아담처럼

그 분의 백성들과 함께 죄인의 자리인 죽음이라는 감옥에 들어가셨다가

간수에 의해 풀려나는 그 모습을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을 사용해서 그림으로 그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들이 겪어야 할

암흑을 겪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의 부활을 육신을 입고 경험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그 예수의 삶을 그대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깊이 경험되면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언제든지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티끌 같은 우리의 존재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그 때 우리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꿈과 야망과 소원을 좇아 살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주님이 지신 순종의 십자가를 달게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삶을 거룩한 삶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거룩한 삶이 사랑하는 삶이며 사랑하는 삶이 곧 하나 됨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이고

 

하나 됨을 지키는 삶을 예배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삶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창2:15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들에게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뭘 어떻게 다스리며 지키라는 말일까요?

 

본문 15절 이하를 보시면

다스리며 지키라는 명령과 함께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함께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피조물을 다스리며 지키는 일의 내용이

바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제사장으로 세우시고 그들을 다스리고 지켜서

인간에게 떨어진 ‘하나님께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에덴동산의 삶의 원리 안에서, 그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된 우리는

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의존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다른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데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다스리며 지켜 내야 하는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집중력 회복을 위해, 쉬었다 가는 지점>.........................

 

 

◑에덴동산의 네 강물은, 성령을 상징

 

그러면 이제 에덴동산에 흐르는 네 강과 그 묘사에 등장하는 보석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0절을 보세요.

 

창2: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잘 보시면 에덴동산에서는 강물이 하나였는데

동산 밖을 벗어나서부터는 강이 네 줄기로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네 방위를 나타낸다고 했지요?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어떤 특정한 지역만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흐르는 강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 강이 에덴동산 안에서는 이름이 없었는데

에덴동산 밖에서부터 이름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서 성자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냥 성자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비로소 이름을 가지십니다.

그 이름이 뭡니까?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다’입니다.

이름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 계시던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이름을 가지시고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내용을 순종하여 완성하시는 것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덴동산 안에서 이름이 없던 한 강이

사방으로 갈라져 이름을 갖게 되는 장면과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넷으로 갈라진 그 강들이

에덴동산 밖에서 어떤 이름을 갖게 되는지 보겠습니다.

 

▲첫째 강의 이름은 ‘비손’입니다. 그 뜻은 ‘풍성하다’입니다.

두 번째 강의 이름은 ‘기혼’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터져 나가다’입니다.

 

세 번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입니다. 그 의미는 ‘화살처럼 빠르다’입니다.

네 번째 강의 이름은 ‘유브라데’입니다. 그 의미는 ‘달콤하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네 강은 ‘풍성하고 달콤한 것이

온 세상을 향해 화살처럼 터져 나가게 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강이 에스겔서에는 이렇게 등장을 합니다.

 

▲(겔 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다시 성전 문으로 갔는데, 보니,

성전 정면이 동쪽을 향하여 있었는데,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의 오른쪽에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서, 제단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2 또 그가 나를 데리고 북쪽 문을 지나서, 바깥으로 나와, 담을 돌아서,

동쪽으로 난 문에 이르렀는데, 보니, 그 물이 동쪽 문의 오른쪽에서 솟아 나오고 있었다.

 

3 그가 줄자를 가지고 동쪽으로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보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발목에까지 올라왔다.

 

4 그가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보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그가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러,

나더러 물을 건너보라고 하기에, 건너보니, 물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5 그가 또 재면서 가다가 천 자가 되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는 물이 내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쳐서나 건널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물은 아니었다.

 

6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사람아, 네가 이것을 자세히 보았느냐?"

그런 다음에, 그가 나를 강가로 다시 올라오게 하였다.

 

7 ○내가 돌아올 때에는, 보니, 이미 강의 양쪽 언덕에 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로 내려갔다가,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9 이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그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그 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될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

 

10 그 때에는 어부들이 고기를 잡느라고 강가에 늘 늘어설 것이다.

어부들이 엔게디에서 부터 에네글라임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그물을 칠 것이다.

물고기의 종류도 지중해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와 똑같이 아주 많아질 것이다.

 

11 그러나 사해의 진펄과 개펄은 깨끗하게 고쳐지지 않고,

계속 소금에 절어 있을 것이다.

 

12 그 강가에는 이쪽이나 저쪽 언덕에 똑같이 온갖 종류의 먹을 과일 나무가 자라고,

그 모든 잎도 시들지 않고, 그 열매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나무들은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을 것인데,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사람들이 먹고, 그 잎은 약재로 쓸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보았던 장면이지요? 에스겔이 성령의 감동으로 강물을 봅니다.

그런데 그 강물은 성전의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그 강물이 지나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만물이 소성하며

번성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는 에덴동산의 그 네 강물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를

조금 더 밝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계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요한은 그 강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나와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수의 강이라고 합니다. 점점 확실해 지지요? 정리를 해 볼까요?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강, 에스겔서의 성소와 성소에서 흐르는 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은 정확히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물은 하나같이, 만국을 소성 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 온 세상 사방으로 보내심을 받아

풍성함과 달콤함을 화살처럼 터뜨려서 만국을 소성 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시지요? 증거를 대 드리지요.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께서 그 분의 백성에게,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요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니까 에덴동산에서 발원하여 사방으로 갈라져 흐르게 되는 그 강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인들만이 아닌

온 세상에 퍼져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고 소생시키게 될

성령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보석 - 보석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

그래서 그 강물이 흐르는 곳에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 같은 보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보석과 같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등장하는 보석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보석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것은 이미 대 제사장이 흉패에 열 두 보석을 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제사 의식에서 이미 힌트 되었던 것이지요.

 

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 제사장께서

보석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고 하나님 나라로 입성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강이 흐르는 곳에 보석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그러니까 지금 에덴동산은

계시록 21장과 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형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내실 것임을

창조 때부터 만물과 역사 속에 언약으로 담아 놓으신 것입니다.

그 원시적 에덴이 어떻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이 되는 지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티끌에 불과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석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내시는가를

설명하는 책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언약으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편에는

‘내가 반드시 나의 은혜로 티끌인 너희들에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신약(新約)과 구약(舊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에서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엄청난 사랑 앞에서 무엇을 더 달라고 땡깡을 부리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조하셨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에덴을 창조하실 동안, 아담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흙(마른 땅)에서 올라오게 하신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끌고 들어가시는 모습과

아담이 흙에서 올라와 에덴동산에 놓이게 되는 모습을 비교해 보세요.

 

정확히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는 그 과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신 32:10‐12)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이렇게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업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흙에서 올라와 창조된 아담은, 에덴이 만들어지는 동안 어디에 있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등에 업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티끌로 만들어진 인간을 등에 업으시고

여호와의 동산인 에덴을 정성스럽게 만드셔서

그 티끌인 인간을 에덴으로 집어넣으시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떠한 사랑으로 진행이 되고

완성이 될 것인가를 미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에덴동산에서도 요한계시록을 보는 것이고

그 크신 사랑으로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티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된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등에 업혀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등에 업혀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상황 속을 살고 계신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계신 곳은 하나님의 등인 것입니다.

내 상황만을 바라보면 ‘여기가 정말 하나님의 등인가?’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얼마나 혼이 났는지 아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광야에서 너희를 업어서 인도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가 당하는 어떤 모양의 환난과 고통도

모두 다 우리를 완성하시고야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고 연단하실 때에도, 우리를 업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잘 이겨내십시오.

거기가 바로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등입니다.

 

▲제가 지난 월요일에 배심원 호출을 받고 san fernando court에 jury service를 갔었습니다.

제가 배심원으로 들어가게 된 재판의 피고인은

강도 혐의를 받고 있는 흑인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하도 배가 고파서 집 근처의 check cashing하는 곳에 가서

메모지 에다가 Give me the money라고 적어서 내밀었다가

강도 혐의로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해서 받아 가지고 도망한 돈이 고작 25불이었습니다.

 

그는 무기도 없었고 사람을 해할 만큼 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강도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았습니다.

 

마치 오래 전에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레즈 감옥에 끌려갔다가

시체로 돌아온 헨리 영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헨리 영은 어린 여동생이 너무 굶주려서 괴로워하자 가게에서 5불을 훔쳐 달아나다가 잡힙니다.

그는 그 일로 그 유명한 알카트레즈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곳에서

독방에서만 3년을 지내다가 결국은 변사체로 나왔습니다.

 

여러분 만일 그 정도의 죄로 징역을 3년이나 살아야 한다면

제가 들키지 않고 지은 죄를 다 합치면

저는 3,000년을 감옥에 있어도 모자랍니다. 단지 발각되지 않았다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닌가요?

 

하물며 그 범죄의 대상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었을 때는

그 죄 값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당장 죽어서 지옥에 간다 해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은혜입니까?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나를 등에 업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내 입에 물려주시며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간수들을 보내어 우리가 갇혀있던 그 죽음이라는 감옥에서

우리를 이끌어 내 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에덴동산에 숨어있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으로 여러분의 만족을 삼으려 하지 마시고

그 은혜의 하나님과 은혜의 복음으로 행복해 하시고 기뻐하십시오.

절대 여러분의 상황에 무릎 꿇지 마세요.

그리고 여러분을 괴롭히고 무시하고 안하무인으로 대하는 자들을

오히려 측은히 여기세요.

 

그들은 그렇게 여러분은 연단하고 성숙시키는 데 잠시 쓰이다가

지옥 불에 떨어질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마십시오. 불쌍한 자들입니다. 우리를 위한 소품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소품들 때문에 여러분의 거룩에 흠집을 내지 마세요. 허허 웃어주십시오.

여러분들은 보석이니까요.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