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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바람에 쫓기는 삶

LNCK 2013. 6. 30. 15:47

◈神바람에 쫓기는 (강력히 이끌리는) 삶     행27:1~44       출처보기

 

◑1. 서론

 

‘쫓기다’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일에 몹시 몰려 지내다’입니다.

‘일에 쫓기다, 사업에 쫓기다, 시간에 쫓기다’ 등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지요.

내가 드리븐(driven)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 행동에 대해, 나의 주도권이 상실 되고,

내 소원과 의도와는 별개로 내가 행동해야 하거나, 끌려가는 것이 쫓기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움직이긴 하는데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입니다.

 

본문 15절, 17절에 이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미국 IVF의 이사를 지내신 찰스 험멜이 쓴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 - 10주년 기념판』이란 책이 있습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시간의 횡포 아래서 늘 급한 일로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성경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결론적으로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도

주어진 일상 속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소명을 충실히 실천해나가는 삶이

<늘 급한 일에 쫓기지 않는 삶>인데

그 전형을 예수님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과 작전 타임을 갖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작전 타임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에 기준해서 삶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정하여 살 때

우리는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를 제시합니다.

'시간 관리'라는 용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도 없고 쌓아 두거나 잃어버릴 수도 없으므로,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시간은 단지 그리스도의 주권 속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일 뿐이며

우리는 그 시간이 주어지고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작전타임을 통해

스스로를 관리함으로써 쫓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청사진이나 미리 정해진 계획표를 갖고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매일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지시를 들으셨다.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다.

그리고 집중적인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 성령의 능력을 입어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실행해 가신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긴급한 요구, 때로 합당할 뿐 아니라

절박하기까지 한 그 요구를 거부하셨다. 정말로 중요한 일,

곧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봅니다.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이라는 제목에서 ‘쫓긴다’라는 말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무턱대고 부정적으로만 대할 단어는 아니라는 겁니다.

 

살펴본 대로 그 말의 의미는 내가 의도한 대로 살기 보다는

나 외적인 요인에 의해 몰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쫓기는 상태 - 그 자체를 바꾸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쫓기게 되는 급한 일을 바꾸어야 해요. 쫒기는 건 여전히 쫓겨야만해요.

안 쫓기면 예수 믿는 사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쫓겨야 해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쫓겨야 해요.

단지 신앙에서 쫓기는 삶이 다른 점은 자발적으로 쫓기기를 원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흐르는 급물살에 스스로 뛰어 드는 것과 같습니다.

급물살에 몰려가지만 내가 원한 것이지요.

 

요약하면 예수 믿는 사람은 스스로 원해서 하나님의 뜻에 쫓기는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쫓기지 않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쫓기는 이유가 바른 것이 중요하지요.

 

◑2. 유라굴로 광풍 이야기.. 너무 길지 않나요?

 

이제 사도행전이 마무리 지어 지는 단계로 접어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령행전이라고도 하는 사도행전을 마무리 해가는 단계에서 나타난 이야기치고는

참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로마로 가는 사도바울 일행이 승선한 배가 광풍을 만나 14일간을 환란 가운데 있다가

구원 받았다는 줄거리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생생한 현장 묘사도 아닌데

뭐 이렇게 장황하게 로마로 가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차라리 다른 사도들에 대한 간략한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이 때 사도 베드로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이 때 요한의 근황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마가 때문에 서로 안 좋게 헤어졌던 바나바는 구브로 섬에 계속 머물고 있었는지 말입니다.

 

이런 궁금한 얘기들 다 제쳐두고

유라굴로 광풍 만난 이야기를 이렇게 자세히 하나싶어요?

 

이 광풍 만난 이야기는 간단히 처리하고

차라리 로마에서의 바울의 사역에 대해 좀 더 지면을 할애해서 소상히 알려 주고

사도행전을 끝냈었다면 어떠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러나 성령님의 분명한 의도가 들어 있는 본문이지요.

모 교회에서 사도행전 29장의 삶을 살자고 외치듯이

사도행전적인 삶을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이어가기 위한 기본적인 마음바탕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는 바울처럼 이방전도 등과 같은 특별한 일을 위해

구별된 사명자가 있을 것이고

아니면 선장이나 선원 백부장 같이 일반 적인 직업을 갖고 사는 사람일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사도행전적인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 기본이 되어야 하는 마음 바탕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적인 삶이란 어떤 겁니까?

찰스 험멜도 언급했듯이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삶’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어떤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쫓겨 다니는 삶>입니다.

광풍에 쫓겨 다닐 때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3. 신앙인은 ‘쫓기는 삶’

 

광풍 유라굴로를 만나 사투를 벌이는 상황을 묘사하는 중에

17절에 ‘쫓겨 간다’ 말이 나옵니다. 헬라어의 에페론토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을 본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에 맞춰 이해하자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몰리는 상황을 뜻합니다.

 

내 인생을 위해 내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 외부의 힘에

본의 아니게 맡겨진다는 겁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선장과 선주와 선원들로서는

더 이상 배를 조정할 수 없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냥 광풍이 부는 대로 내어 맡겨진 채

광포하게 요동치는 물결을 따라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쫓긴다는 말은 광풍에 내 몰리는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단어를 빌자면 광풍에 드리븐(driven) 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광풍 속에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성경을 늘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풍랑을 만났습니다만

-특별히 노아홍수 때 방주에 몸을 실은 8명의 노아의 가족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는 지중해 한 모퉁이에 불어 닥친 유라굴로 광풍정도가 아니었지요.

전 지구를 집어 삼키는 홍수였으니까요.

 

지구의 표면을 뒤 덮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홍수에

내어 맡겨진 채로 150일을 그냥 창일하는 물 위에서 떠다닌 겁니다.

 

노아의 방주와 알렉산드리아 배가 처한 상황이, 이처럼 쫓긴다는 점에서는 똑 같습니다.

배의 움직임에 대해 내가 전혀 의도한 대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처한 상황이 같은 중에도

이 두 경우 사이에는 아주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함께 타고 있는 대형 곡물선 알렉산드리아 배는

조종이 가능한 배였습니다. 방향키가 있었고 바람을 이용할 수 있는 돛이 있었습니다.

 

위급한 때에 구조를 위해 구명보트격인 거룻배도 달고 다닌 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조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노아의 방주는 처음부터 조종이 불가능하게 만들어 진 배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조정을 안 한다는 전제하에 아예 처음부터 작정하고

방향키조차 없게 만든 배였던 겁니다.

만들어 지기를 애초에 조종하는 배가 아니라 쫓기는 배로 만들어 졌던 거지요.

 

◑4. 깨달았으면 ‘자발적 쫓김’으로 나아가야!

 

방향키 없는 방주에 타고 홍수의 물결을 따라 내 뜻과는 상관없이 쫓기는 것은

사실 노아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요. 평생 쫓기면서 살아왔으니까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조정하려 했던 모든 사람들이

홍수에 쫓겨 죽음으로 빨려들어 갈 때

평생을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쫓기면서

인생의 조종관을 놓고 살았던 노아는 방주 안에서 살아남습니다.

 

자발적으로 쫓겨 가는 자라야 합니다.

내 스스로 쫓아가고 향해가고 손 안에 잡으러 가다가

역경과 환란을 만나서야 쫓겨 가는 자가 되어서는 참 인생 불행해집니다.

쫓기지 않는 한 움직이지 말아야 하지요. 아주 방향타를 내 인생에서 빼버리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쫓기기 이전에

이미 자발적으로 늘 쫓기고 있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바람 그러니까 신바람에 출렁이는 물결에 몸을 맡기고

드리븐 되어 살았던 사람이지요. 인생자체를 노아의 방주처럼 살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도 유라굴로라는 거센 바람 이전에 신바람에 의해 로마로 쫓겨 가고 있었던 중입니다.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라고 합니다.

 

선장과 선원들과 선주 그리고 백부장이 유라굴로 광풍에 쫓기고 있는 동안도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줄곧 쫓겨 가게 될 것입니다.

 

▶유라굴로 같이 눈에 보이는 환란을 만나고 나서야

방향타를 놓고 쫓기는 처지가 되는 사람이.. 제일 미련한 사람입니다.

 

모든 상황이 다 이만큼이라도 편안할 때

우리가 그 것을 맞서서 내 인생을 내가 조정해 나가선 안 되는,

보이지 않는 신의 바람을 봐야 해요.

 

우리의 삶에 유라굴로가 닥치기 전에 앞서서

하나님의 뜻의 바람이 우리를 향해 불고 있었어요.

 

그런데 선주와 선장과 백부장처럼 이 바람을 전혀 못 보고 산다면

반드시 이러한 환란을 통해 신의 바람을 깨우치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배의 선장과 선주와 선원들이 광풍에 쫓겨 가는 모습!

역설적으로 이 모습이 바로 사도행전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단지 유라굴로 대신에 하나님의 뜻의 바람에 쫓기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내 인생에 대해 방향키를 뽑아 버리는 겁니다.

뿌리 깊은 방향키 의식! 이것이 바로 죄의 뿌리이지요. 쉽게 뽑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내 인생에 대해 죽기 전까지는

내 인생의 배의 조정키를 나는 놓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아버지, 늘 바쁜 일에 쫓기는 삶에서부터 바뀌어져야합니다마는

쫓기는 삶의 형태가 바뀔 것이 아니라, 늘 바쁘다고 생각되는 일 대신에

하나님의 뜻의 바람에 의해서 쫓기는 삶으로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