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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언약 신앙의 특징인 자율, 인격적 관계 / Chinese

LNCK 2013. 7. 25. 18:53

마음에 새긴 율법 - 김영준 목사 주일설교 (1/2).wmv - YouTube

 

◈새언약 신앙의 특징인 자율, 인격적 관계     히8:8~13       07.05.27.설교스크랩, 출처

 

*원제목: 마음에 새긴 율법   Chinese 

 

◑서론/ 종교에는 ‘자유’가 중요합니다.

 

▲최근(2007년)에 터키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 터키 대통령 선거에서 결정한 것은,

그들이 이슬람 국가이지만 세속국가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결정입니다. 왜 그들은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첫째는, 이슬람 신앙을 갖지만, 그것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최소한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판단을 한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려면 안 믿을 수도 있는 자유도 있어야 된다는 판단입니다.

 

둘째는 그런 자유가 있을 때만이 신앙이 오히려 진실 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그렇지 않고 국가가 법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종교적으로도 해가 되고, 국가적으로도 해가 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이런 가장 극단적인 예로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있지 않았습니까.

탈레반은 아랍어로 ‘(이슬람학교) 학생조직’이라는 뜻인데,

성직자들이 정치 지도자가 되어서 종교원칙을 법으로 책정해서 강요하고 집행했습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는데,

여자들이 직업을 갖는 것이 금지되다보니 의사, 교수, 전문직의 여성들이

삽시간에 거지가 되어서 길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고

모든 성인 남자는 수염을 기르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모하멧이 수염을 길렀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 국가 발전에

큰 잃어버린 세월이 되고 불관용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합중국 건국 시에 국가와 교회를 헌법상으로 분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교분리의 원칙>이고 미국 헌법에 아주 중요한 규정입니다.

 

그 이유는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이 불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 중에는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구세계의 출신입니다.

유럽,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인데 구세계에는 국가의 종교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퓨리탄(신교)과 큰 갈등을 빚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유럽 대륙에도, 구교와 신교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차이로 전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건국하는 나라에서까지 그것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기는 믿되,

믿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양심의 영역에 두어 각자 결정하는 것이지,

국가가 법으로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국가와 교회의 분리 원칙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 미국도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19년에 <금주법>을 헌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헌법이 술 마시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영향이었습니다. 술을 죄악으로 보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킬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법 집행자들도 몰래 술을 마셨으니까요.

지킬 수 없는 법이 오히려 범죄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패가 있는 듯이 들리지만, 세속화는 신앙에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세속화라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이 세속화 사회라는 것은, 신앙과 불신앙이 공존한다는 얘기이고

생각의 시장에서 서로 경쟁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짜 신앙은 검증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라고 검증되었기 때문이고, 교회가 그만큼 전도에 힘을 쓰기 때문이며,

기도하고, 성령의 순수한 역사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새언약(신약)의 특징

 

구약이라는 말은 옛 언약이라는 뜻이고, 신약이라는 말은 새 언약이라는 뜻인데

본문에서도 새 언약, 옛 언약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왔다는 것은,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왔다는 얘기입니다.

이 새 언약을 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당신의 십자가의 피로 이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큰 흐름의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신앙의 내면화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계신 분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외적인 행위나 형식이나 제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내면화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신앙이 외적인 형식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거듭난 사람, 중심이 거듭난 사람, 그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둘째, 신앙의 자율화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그 표본을 볼 수가 있는데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처음 아이덴티티를 갖게 된 순간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노예로 있었던 애굽에서 자유함을 얻은, 해방을 얻은 사건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들이 종으로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출 5:1)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

 

그들이 노예 신분에서 자유함을 얻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처음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신앙의 자율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강요받는 것이 아니고,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앙은 각자 원하는 것이고, 선택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든, 섬기는 것이든, 순종하는 것이든,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것이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셋째, 신앙인의 인격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라고 해서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돌에 새긴 법규입니다.

그 동기가 밖에서부터 주어집니다.

 

반대로 은혜는 우리의 마음에 새긴 율법으로, 동기가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부터 우러나옵니다.

 

우리가 기뻐서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요15:15)

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이고,

우리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인격적으로 따르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새언약)이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간의 성숙함 입니다.

 

이것을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과 비교할 수 있는데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성숙한 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시민의식이 없이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정착하지 못하는 나라를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경제적 빈곤과 폭력의 역사, 그리고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발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호등이 한 예입니다. 교통신호를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바른 교통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지켜보고 있다가, 신호를 어기는 사람을 적발해서 벌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카메라 고발제도가 있었지요.

 

누구든지 교통법규를 어기는 사람을 카메라로 찍어서 신고하면 돈을 받는

아주 몹쓸 제도가 있었습니다.

 

마치 공산주의 사회가 서로 고발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국가를 지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민들 간의 싸움을 낳습니다. 얼마나 괘씸합니까.

교통법규를 쉽게 어길 수 있는 전략적인 위치에

망원렌즈를 단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가, 위반하는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한 장소에 세, 네 명의 카메라맨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분노와 피해의식을 갖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통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모름지기 법규를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옳기 때문이고,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지,

누가 벌을 줄까 두려워해서 하는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지금 구약과, 신약의 새언약을 비교해서, 예를 들어 설명 드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고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주기 때문에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下)’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경외하는 것은 존중하고 존경하고 높인다는 것이고,

두려워하는 것은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죄사함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우리에게 자녀가 될 수 있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떤 징벌과 심판과 두려움의 관계가 아니고

사랑과 신뢰와 순종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새언약의 위험성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 맹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민주주의 사회가 자유의 범위가 넓다보니까,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장점은 자유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점을 단점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기쁜 소식이요, 좋은 것인데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소위 <앤티노미아니즘-도덕률 패기주의>입니다. *율법폐기론, 무율법주의.. 다 같은 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용서하시니까 마음대로 살자, 마음대로 죄를 짓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마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은 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험 때문에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려는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고민이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에서 지향하는 것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한계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자녀가 주입식으로 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창의적인 사고를 배우기 원합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스스로 선택할 줄 알기를 원합니다.

장차 우리나라에 필요한 인재는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방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입식 신앙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격체요, 선택할 수 있고, 책임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자율적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한 길을 분별하고, 바른 길을 선택해서 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로봇은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에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이것이 신약을 일컫는 것입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히8:10

 

더 이상 돌에 당신의 법을 새기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법을 기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과 대비가 되느냐 하면 돌에 새긴 율법과 대비가 됩니다.

돌에 새긴 율법은 주입식입니다.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거 해라, 빨리 밥 먹어라, 숙제해라, 자라, 일어나라,

또 죄수들을 가르치는 것도 이렇습니다.

 

교도소에 가보면 수감자에게도 자유가 없습니다.

“일어나, 식사, 식사 끝” 이런 식으로 그들을 다스립니다.

 

그것이 돌에 새긴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가 당신을 믿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스스로 판단하되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의 율례를 좇아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믿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이 가능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 중에 하나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적용

 

▲어떤 여성 교인이 아침마다 일어나서 옷장을 열고

‘하나님,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요?’라고 여쭙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하던데

그것은 믿음이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왜 자신의 취향에 따라서 옷을 입지 않고, 그것마저도 하나님께 물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일일이 그런 것까지 지시해주시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나 봅니다. 이런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일일이 지시해 주시면 편합니다.

내가 결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나에게 책임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자율적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 뜻대로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하십니다.)

 

▲배우자를 선택해야 되는 미혼 남녀에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기 전에

마음속에 누구를 사랑하는지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왜 당신이 원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물으십니까?’

 

누군가를 사랑합니까? 그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벌써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인간은 전적 타락한 존재이며, 양심마저도 부패해 있습니다.

 

내 생각, 내 소원, 내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정도가 되려면,

그가 아주 신앙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나.. 가능합니다.

 

아닌 경우, (대부분 그 수준에 못 이릅니다.)

내 마음속에 원하는 누구로 결정할 경우,

내 육신의 소욕대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면도 있습니다.

 

▲하루는 제가 정치에 큰 뜻을 품은 부부와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어떤 국제단체의 회장직을 맡아야 될까 말까를 놓고 고민을 하는데

부인은 전통적으로 접근합니다.

 

부인은 제게 묻기를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 제가 정답을 말해 줄 것으로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정계 지도자가 되려는 마음은 아무나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국가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미 인도하신다는 증거입니다.’라고 했더니 얼마나 고마워 하든지요.

 

위의 ※표를 참조하세요.

 

▲예수님은 소경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거지요, 소경인 바디매오에게, 어느 누구도 그의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마는

예수님은 ‘네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안다’시며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믿음이 어디 있었습니까? 믿음이 무엇을 통해서 나타났습니까?

바디매오의 소원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 소원 속에 그의 믿음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목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제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소원이 있습니까?

가장 먼저 달려오는 소원,

하나님이 나에게 물으실 때 주저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소원,

여기에서 하나님 뜻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에 새긴 성령의 법’의 증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