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0

착한 행실 / 中國語

LNCK 2013. 7. 31. 16:21

◈착한 행실         마5:13-16, 8:3, 엡5:9, 행9:36~42     10.01.30.설교스크랩         中國語

 

김명혁 목사 / 다니엘교회 새시대교회 통합기념강좌 *원제목 :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라고 다윗이 시를 읊었는데

다니엘교회와 새시대교회가 연합하여 동거하게 된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가 범하고 있는 두 가지 큰 죄가 세상을 따라가는 ‘세속화’의 죄와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는 ‘독선’과 ‘분열’의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교회와 새시대교회의 통합을 축하드리며,

오늘의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진리는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소금과 빛”과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팔복에 관한 말씀을 하신 다음

결론적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너희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을 가리키고,

신자들이 함께 모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과 교회가

세상에서 어떤 존재들인지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신자들과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금과 빛”이 무엇을 하는 존재들인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소금과 빛”이 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1. 착한 행실은 - 그야말로 착한 일, 불행한 사람을 돕는 일

 

▲“착한 행실”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과 교회가 지녀야 할

너무너무 중요한 덕목입니다.

“착한 행실”이란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행실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행실입니다.

 

①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1,15)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②사도 바울이 자기의 유익이나 기쁨을 구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많은 사람의 유익과 기쁨을 구하며 산다고 고백했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고전10:33).

 

③사도 베드로는 그런 “착한 삶”을 예수님께서 사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10:38).

 

④복음서들도 그것을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저주받은 문둥병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만져주시며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마8:3).

그것이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⑤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 후 가버나움에 들어가서

그 당시 개 취급을 받던 이방인 로마 사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⑥“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마8:13).

그것이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⑦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찾아가서 세상을 등지고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부도덕한 여인 하나를 만나서 그와 이야기하면서

그 여자로 하여금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너무 기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요4:28,29). 그것이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⑧예수님께서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게 된 한 창녀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과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그 여자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⑨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보려고 뽕 나무에 올라갔던 세리장이고 죄인인 삭개오에게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뽕 나무에서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신 다음

삭개오에게 이런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그것이 예수님의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2. 착한 행실은 - 내가 십자가를 지며,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

 

▲여기 나타난 “착한 행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착한 행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봅니다.

 

“착한 행실”이란 결국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말씀 가운데

“착한 행실”의 의미가 다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착한 행실”의 중심과 근원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의 중심과 근원에는 십자가의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고백했습니다.

 

올해 100세가 되시는 방목사님께서 교회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교회는 십자가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사 중의 한 분이신 최복규 목사님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1월 8일 아침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모임에서 이목사님이

“새해의 소망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너무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 말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느냐?

그것은 우리 신앙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십자가 사건이

우리 삶 가운데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강단에서 십자가가 강력하게 선포되지 아니하고

회개의 복음이 강력하게 선포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이 귀한 축복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함께 주어진 풍요로움과 축복 속에 머물러 있다 보니까

십자가는 보이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과 축복, 성공, 이런 것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여 결심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첫째도 예수님의 십자가요, 둘째도 예수님의 십자가요, 마지막도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을 회복하려면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한국에 너무 단체도 많고, 장도 많고, 그래서 많은 단체들과 장들이

서로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하나님보다 인간의 일이 앞서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철저한 회개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첫째 사명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반드시 “착한 행실”로 전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유창한 설교로만이 아니고

심오한 신학으로만이 아니고

놀라운 이적으로만이 아닙니다.

“착한 행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목사님이 지적 한 대로

십자가 신앙보다는 현실의 축복과 성공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과 마케팅과 엔터테인먼트에 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성장과 정치권과의 유대관계에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 함양보다는,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각종 음악과 프로그램 개발에 열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문화와 유행에 너무 민감한 것입니다.

 

교회의 중심과 근원에는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착한 행실”의 중심과 근원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야 하는데 말입니다.

 

◑3. 착한 행실은 - 한 사람에게 온정을 베푸는 일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을 때

수많은 대중을 상대하시기 보다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을 상대하시곤 하셨습니다.

 

물론 5천여 명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게 하신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중을 상대하시기 보다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을 상대하시곤 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120명 택하시지 않고, 열 두 명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사람 도르가 한 사람을 보시고, 욥바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사람 고넬료 한 사람을 보시고, 가이사랴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착한 사람 루디아 한 사람을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숫자와 군중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둘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선주야, 길선주야!” 라고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조선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르시고

그를 통해서 제주도에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며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숫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구약 사사 시대에 기드온을 따르는 백성들이 3만 2천명이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기드온의 용사 3백 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대 교회주의로 대형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중심으로 흐를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히려 작아져야 하고 약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약할 때 강하게 되고 가난할 때 부요하게 되고

어리석어질 때 지혜로워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하신 말씀을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8,9).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4,17).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너무 커지려고 하거나, 너무 부자 되려고 하거나,

너무 강해지려고 하거나, 너무 지혜로워지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약함과 궁핍과 가난함을 오히려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2:10).

 

◑예루살렘 초대교회, 한국초대교회에 나타난 착한 행실들

 

▲첫째,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교회와 신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교제’와 ‘구제’와 ‘봉사’에 힘썼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착한 행실”이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2-47).

 

결국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신자들은 “착한 행실”을 계속해서 나타내 보였습니다.

행4:32,34을 읽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행4:32,34).

 

그런데 여기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기록했습니다.

앞으로 사도행전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             *권위자: 격려하는 자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행4:36,37).

성경은 이렇게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한 사람을 주목해서 기록했습니다.

 

▲둘째, 욥바 복음화의 주역이 된 도르가도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여인이었습니다.

 

도르가는 유창한 설교를 한 사람도 아니었고

신학공부를 잘 한 사람도 아니었고, 놀라운 이적을 행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소박한 여인이었습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9:36).

 

그가 나타내 보인 “선행”은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서 나누어 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 띠였고 귀하게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과부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감동시켰습니다.

 

그런데 도르가가 병들어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도르가가 죽었을 때

많은 과부들이 달려와서 울면서 도르가의 ‘선행’을 말했다고 했습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행9:39).

 

하나님께서 그곳을 내려다보시면서

그곳이야말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곳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베드로를 보내셨고

베드로로 하여금 도르가를 살리게 하시는 이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베드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마음에 깊은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40).

 

도르가는 살아났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9:42).

 

욥바에 구원의 역사와 복음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까?

도르가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한 사람 도르가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욥바 복음화의 주역은 도르가였고 조역은 베드로였습니다.

 

▲셋째, 가이사랴 복음화의 주역인 고넬료도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고 아직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세례를 받지도 않았지만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1,2).

 

여기 “경건하여” “경외하며”라는 말은, 아직 예수님을 정식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싶어서 자기 나름대로 기도하며 구제하던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던 이방인 고넬료는

유대인들의 칭찬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행10:22).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기특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냈고 나중에는 베드로를 보냈습니다.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행10:3).

 

베드로에게도 환상 중에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이사랴의 이방인들에게로 찾아 가라는 환상과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지만, 하나님께서 강제로 가게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이르러 그곳의 분위기를 파악했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이루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리고 나사렛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베드로가 이 말할 때에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저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행10:44-47).

 

가이사랴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이방인 고넬료를 통해서

이런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복음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이사랴 복음화의 주역은 고넬료였고 조역은 베드로였습니다.

 

▲넷째, 안디옥과 소아시아 복음화의 주역이 된 바나바도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이 예루살렘 교회의 ‘착한’ 신자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행4장에 기록되었는데,

여기 안디옥교회의 설립자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행11장에 또 다시 기록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2-24).

 

바나바를 소개하면서 행4장에서는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둔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여기 행11장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에 파송한 선교사였는데

선교사의 기본 자격은 ‘착함’입니다.

 

설교를 잘 하는 것보다 능력이 많은 것보다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모든 사람들을 부드럽게 대하는 ‘착함’입니다.

 

바나바는 무엇보다 먼저 “착한 사람”이었고

그 다음에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결국 큰 무리가 주께 더했다고 했습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

 

▲다섯째, 빌립보와 유럽 복음화의 도구가 된 루디아도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는 평범한 이방 여자였습니다.

옷감 장사를 하기 위해서 고향인 두아디라를 떠나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장사를 하던 이방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도 착했고 손도 착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착한 사람”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다음 루디아는 사도 바울 일행에게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까지 열었습니다.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 했습니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16:15).

 

숙식을 제공했고 모든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이와 같은 “착한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하면서

무수한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했던 숨은 비결 중의 하나는

루디아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나타내 보인 “착한 행실”과 “사랑의 수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옥에 갇혔을 때 이런 글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4:1).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4:10).”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것을 보내었도다”(빌4:14-16).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빌4:19,20).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 중 수많은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하면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는

루디아를 비롯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나타내 보여준 “착한 행실”과 “사랑의 수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볼 때 “착한 행실”은 하나의 인간적인 휴머니즘적인 선행에 그치지 않고

교회를 튼튼히 세우고 선교의 일을 하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는 일에 사용되는 천사의 손과 천사의 팔과 같은

귀중한 천상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제주도 복음화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 윤함애 사모님도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착함과 섬김”의 사역이

너무너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착함과 섬김”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착함과 섬김”의 사역으로 제주도 복음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님의 “눈물의 기도”와 “착함의 섬김”이

이기풍 목사님을 도와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어내고 말았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이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습니다.

윤함애 사모님은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착함과 섬김”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의 막내 딸인 이사례 권사님과

여러 해 동안 교제를 나누면서 어쩌면 그렇게도 겸손하고 소박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아름다운지 많은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제주도의 복음화는 이기풍 목사님의 헌신적인 선교사역과 함께

윤함애 사모님의 “착한 행실”의 사역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기풍 목사님과 윤함애 사모님은 제주도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추는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곱째, 작은 예수로 살다가 죽은 장기려 박사님도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예수로 빛을 비추며 산 사람 장기려 박사

 

 

▲한 두 마디만 더 드립니다.

저는 지난 23년 동안 영등포 지역의 노숙자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광야교회의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를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일년에 한 두 번은 방문하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저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합동 결혼식 주례를 다섯 번 했습니다.

 

저는 성남과 구로 등지에 흩어져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교회와 중국동포교회의 김해성 목사님과 이선희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일년에 한 두 번은 방문하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저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역 근처의 노숙자들에게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는 김범곤 목사님도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곳도 가끔 방문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들과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이 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를 강조하면서도

“착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착함의 중심과 근원이고

모든 착함은 십자가의 필연적인 열매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6:10).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살전5:15).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8,19).

 

착한 일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동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청소를 할 수도 있습니다.

불우한 노인들을 찾아가서 생필품을 나누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동회에서 추천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그만 격려금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여 년 이상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이름으로

중국 연변지역에 있는 주로 고아 아이들 260여명에게

매달 5만원씩 사랑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지 모릅니다.

 

설교 한 마디 안 했는데 수많은 조선족들과 조선족 어린이들이

주님을 진실하게 믿고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착함”의 손길을 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과 몸과 세포 속에

“착함”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상에 “착한 행실”을 나타내 보이는

아름다운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이런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25:21).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4-36).

 

 

 

'분류 없음 > 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득불 해야 할 일 / 中文  (0) 2013.08.18
아버지의 뜻 / 中國語  (0) 2013.08.11
전도인의 일을 다하라  (0) 2013.07.22
성령을 따라 행하라  (0) 2012.10.10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0) 2012.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