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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따라 행하라

LNCK 2012. 10. 10. 15:12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5:13~26        10.02.21.설교스크랩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5:16


갈라디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4장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5-6장은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자유인이 되었으니

‘그냥 자유롭게 살자. 구원은 받았으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이 주신 자유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보혈을 흘려주셨습니다. 그처럼 값진 대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아무렇게나 사용하면 되겠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이지, 죄에로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게 된 자유를, 잘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구원 받은 후에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방종에 이르지 않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13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육신의 소욕이 쳐들어올 출구를 만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죄가 들어올 틈새를 만들어주면 안됩니다.


갈3:3절에 “너희가 이렇게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하였습니다.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다시 육체로 돌아가는 것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는 것과 같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습니다(벧후2:22)”


15절을 봅시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말씀을 볼 때,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은 구원 받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며 물어뜯는 분위기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옛날에 못된 죄악의 습성이 있어서, 수시로 육체의 욕망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나보다 더 잘 나가고 더 인정받는 사람을 보면 괜히 배가 아픕니다.

비교의식과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동역자들끼리 모이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배우고자 세우고자 하기보다,

뭔가 흠을 잡고 비판하고 깎아 내리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낍니다.


TV를 보더라도 교양 프로그램이나 영어공부채널, 기독교 방송을 보면 좋을 텐데,

자꾸 시시한 오락 프로그램이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것에 자꾸 눈이 갑니다.


이런 육체의 기회, 육체의 욕심, 육체의 소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뭐라고 가르칩니까? 우리 다같이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율법의 힘보다 더 강력한 것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Live by the Spirit.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살라”

“성령님의 조종을 받아서 살아가라”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지배하심을 받아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강력한 바람이나 불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감화력이나 강력한 에너지로 생각합니다.

슐라이어마허라는 자유신학자는 성령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감정적인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뭔가 감동이 있고 가슴이 뭉클한 감격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성령현상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성령을 어떤 심리적인 경험현상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기적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성령 받아라!”

성령이 무슨 야구공입니까? 성령은 그런 수단적인 도구가 아닙니다.


성령은 감정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인격체이십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과 동일본체이십니다.


성령님은 결코 성부, 성자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고귀하고 존귀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지성과 감정, 의지와 계획, 자비와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보고, 듣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아파하고,

탄식하고, 근심하는 성품이 그 분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8:26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서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엡4:30절에 보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지을 때에, 근심하시고 고통하십니다.


요16:13절에 보면 성령님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요14:26절에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계십니다(요14:16, 17).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요16:7).


성령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퍼 부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요3:34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 순례자(크리스천)이 어떤 방에 들어가 보니

벽난로에서 계속해서 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가 보니까

계속해서 기름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강력한 힘과 권세를 공급해 주고 계십니다.

그 성령님의 힘 때문에 우리가 이 죄 많은 세상 가운데서 죄와 싸우며

마음에 평안을 누리며 기쁨과 감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해 나아갈 때에

모든 것들을 공급하시고 섬세하게 보살피시고 지도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율법선생이 아니고, 성령님이 우리를 매순간 보호하시고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호흡을 하지 않고, 심장이 뛰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듯이,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숨 쉴 때에 잘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잘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메시지를 쓸 때마다 그런 체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메시지를 잘 쓰고 빨리 쓰고 싶어도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몇 시간을 본문과 씨름해도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말씀을 깨닫는 영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말씀의 생수가 터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회개하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마치 지붕을 뚫고 햇살이 비쳐 오듯이

말씀의 은혜가 쏟아지는 것을 많이 체험합니다.


내가 아무리 내 머리와 지식을 이용해서 메시지를 잘 쓰고자 할 때는 안 되는데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불과 한 두 시간 만에 끝낼 때도 있습니다.


내 인간적인 머리와 지식을 의지해서,

아무리 사람을 잘 도와보고 역사를 잘 섬겨보고자 해도 안 됩니다.

내 의지와 노력으로 아무리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고 싶어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성령께서 도와주시면 죄의 소욕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는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인간이 모든 지혜와 지식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10~11절에 보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지와 무능, 육체의 욕망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 인간의 노력과 의지,

도덕과 수양, 율법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성령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뜬다는 것은, 기도원에 가서 무슨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의 카운슬링을 받는 것입니다.


매사에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께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칼빈학회 회장이신 John Hesselink 박사를 만났는데, 그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는 것이다.”

“To live by the Spirit is to be guided by the Spirit and governed by the Spirit”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지배권아래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육체의 지배권아래 살았기 때문에 육체의 방송, 육체의 주파수,

육체의 전파에 자극을 받고 반응하고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권아래 살게 되면 성령께서 송출해 주시는 성령의 방송을 듣고,

성령의 전파에 반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령과 더불어 살고 성령과 교제하며 살게 됩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받아서 살게 됩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나오는 것처럼,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점점 불어나서 강물이 되고

거기서 고기들이 헤엄을 치듯이 우리도 성령의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과 같은

그런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율법조문을 지키며 힘들게 도덕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물 없는 바다에서 괴로이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의 바람을 타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성령님은 제쳐놓고, 내 마음대로,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내 혈기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럴 때에 육체의 소욕이 비집고 들어와서 나의 생각을 점령해 버립니다.


우리가 운전을 할 때에 헛 생각하지 않고 앞차를 바짝 뒤쫓아 가면

다른 차들이 끼어들기를 하지 못하잖습니까?

그러나 조그만 한 눈 팔고 딴 짓하고 있으면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옆 차가 와서 새치기를 하고 끼어들기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을 오직 주님께 고정시키고 성령님께서 가시는 대로,

성령님을 바짝 따라가기만 하면 죄의 소욕이 틈을 타고 들어오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내 인생을 100% 성령님께 맡기고

성령님께 의탁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니라” 성령님께서 100% 나를 점유하시는데

어떻게 감히 육체의 욕심이 나를 지배할 수가 있겠습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두 자아가 싸우고 있습니다.

항상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역사가 충돌합니다. 그 해법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에 있지 아니하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의 날개아래서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감히 육체의 소욕이 우리 안에서 활개를 치지 못합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서는 가끔 반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선원들이 자기들끼리 작당을 해서 배안에서의 세력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주는 배를 멀리 내 보낼 때에 선장에게 막강한 권세를 부여합니다.

마치 한 나라의 총사령관처럼 옷을 입히고, 권총도 지급하고,

그 배에 모든 총괄권을 선장에게 부여합니다.


그리고 선원들은 선장에게 절대복종하도록 명령을 합니다.

만약에 선장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자기 나름대로 하는 자들은,

배 밑바닥에 있는 감옥에 가두도록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틈만 나면 육체의 소욕이 선상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육체의 소욕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배 밑 감옥에 꼭꼭 가두어야 합니다.

우리인생의 선장되신 성령님께 전권을 양도해야 합니다.


다윗이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가 항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성령께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었습니다.

자기욕심대로,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파도타기를 하듯이 성령님과 밀착된 가운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고 일이 안 풀릴 때는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내기보다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며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내

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18편)”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에는

육체의 소욕이 그를 주관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그를 물어뜯고 죽이고자 하여도, 절대로 악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무엘서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답습니까?

그런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된 뒤에 편해지니까,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게을리 했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성령님께 순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보다는

자신의 감정과 혈기대로 방만하게 살았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험에 들어서 정욕에 죄에 넘어지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선상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성령님을 선장으로 보시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는데

긴장을 늦추니까 금방 악한 마귀 사단이 육신의 정욕을 충동질해서

큰 죄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정욕의 죄뿐만이 아니라 거짓과 탐심과 살인의 죄까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이 왕이고 선장인데

실제로는 사단이 왕이 되고 선장이 되어서, 그의 인생의 배를 침몰직전까지 몰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생동안 깨어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왜 반드시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까?

19-21절을 봅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혈기와 감정과 정욕대로 살면, 그때는 편하고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마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 때에 어떤 축복이 주어집니까?

22, 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아름답고 찬란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게 해 주십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나무에 열매가 맺히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은 누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맺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선교지에서 UBF의 대 선배님들과 함께 다니며 교제할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전요한 선교사님과 둘이 한 방을 쓰며 밤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시카고 센터에서는 배사라 선교사님과 그레이스 선교사님의 풍성한 사랑을 받으며

교제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은, 저의 영어강의 노트를 일일이 체크해 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레이스 선교사님은 건강이 좋지 못하신대도, 때마다 식사를 챙겨 주시며 보살펴 주셨습니다.


안요셉 선교사님, 안마리아 선교사님은 환갑이 훨씬 넘으셨지만

얼마나 겸손하시고 어린아이같이 순수하신지 은혜가 넘쳤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분들이 지난 40년, 50년 동안 성령을 좇아 사셨기 때문에

그 내면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종들에게 풍겨 나오는 믿음의 향기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3주 동안 선교사님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멕시코, 베네주엘라, 미국 다 언어가 다르고 음식과 문화도 달랐지만

성령을 따라 행하는 주님의 자녀들은 다 통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 봉사하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야 하겠습니다.



◑2. 성령을 따라 살려면


24절을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 즐기던 정욕과 탐심을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더 이상 정욕과 탐심이 나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님과 교제하며 성령과만 상관하며 삽니다.


25, 26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요, 온유와 절제의 영인데

어찌 자기 영광을 구하고 시기하며 싸우고 다투겠습니까?


물과 기름이 함께 섞일 수 없듯이, 성령님과 죄는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죄를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엡6:17절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말씀과 더불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전파할 때에

그 말씀을 속에서 숨 쉬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18절에

“항상 성령 안에서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성령충만함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전요한선교사님과 함께 지내면서,

이분이 2달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시면서 전혀 지치지 않고

모든 선교사님들을 일일이 돌아보며 섬길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새벽기도였습니다. 새벽 5: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서 기도하셨습니다.

호텔에서 주무실 때는,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열심히 기도합시다.


찬양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습니다. 에베소서 5:18, 19절에 보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하였습니다.


찬양은 말씀과 기도의 혼합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에 곡을 붙여 놓은 것이 찬양입니다. 기도에 운율을 넣은 놓은 것이 찬양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에 육신적인 생각, 육체의 소욕이 틈탈 수 없습니다.

찬양할 때에 어두움의 영이 물러가고 묶인 영이 해방되는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할 때에 질병이 낳습니다. 찬양할 때에 마음에 슬픔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평강과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미국에는 우울증 depression 환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면 약을 엄청나게 준다고 합니다.

간호사이신 Sweety Lee 선교사님은 말씀하시기를

미국은 전 세계 인구의 2%밖에 살지 않는데, 약 소비량은 전 세계에 40%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사들이 돈을 아주 잘 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약의 부작용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약물치료가 아니라, 음악치료가 인기라고 합니다.

사울도 정신질환에 시달릴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며 찬양할 때에 악령이 물러갔잖습니까?


루터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기도하고 찬양했다.

그때에 주님께서 내게 어려움을 이길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다”


루터나 칼빈이나 다 찬송가를 좋아하고

직접 찬송가를 작사작곡 했던 음악의 대가였습니다.


지금 제일 부흥하는 남미에도 가보니까, 예배시간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찬양을 하는지,

찬양시간에 이미 은혜를 다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찬양을 생활화해야 하겠습니다.


주일예배 시간에도 일찍 나아와 온 힘을 다해 찬양함으로 마음을 예비하고

말씀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서 성령 충만함으로 한주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율법이나 윤리 도덕으로 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을 따라 살 때에 가능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작은 죄라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고 목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리할 때에 날마다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