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한 손 스8:15~23 출처보기
◑서론
▲유다백성들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을 마치고,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성전도 짓고 번제도 드리는 등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큰 변화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1차 귀환하고 성전 짓고, 2차 귀환할 때까지 약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영적인 지도자 공백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공백상태에서 그들은 이방인과 혼인관계를 맺고 우상숭배를 도입했습니다.
에스라가 주전 458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 4개월 동안
유다백성들의 영적인 문제를 진단해 보고
“이것이 큰 문제로다. 이방인과 결혼해서 우상숭배를 들여왔으니
유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재앙이 또다시 임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이 문제를 치료하고자 한 것이 에스라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에스라를 “제 2의 모세”라고 부릅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신앙의 사람으로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성장과 육신적인 성장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점도 있고, 완전히 반대되는 점도 있습니다.
육신이 성장할 때에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듯이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로 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습니다.
그런 면으로는 비슷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반대되는 면이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독립성이 있습니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성장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더욱더 하나님을 의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존성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자립심(independence)이 높아지지만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은 의존성(dependence)이 높아집니다.
이것이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더욱더 의존하게 되는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본문 에스라 8장도 큰 일을 앞두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사 에스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찾는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열왕기서와 역대서는 유다의 왕들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이 별개로 기록된 것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역대기는 하나님을 찾은 왕은 잘되었지만,
하나님을 찾지 않은 왕은 잘못되었다는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왕일지라도 하나님을 찾을 때는 형통하였으나,
하나님을 버릴 때에는 형통치 못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여호와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라서나 역대기는, 모두 다 포로 귀환 후에,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 8장의 핵심사상은 22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에스라 8장의 중심 진리는, 하나님을 진실로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돕지만
배반하는 사람은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1.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
지난 여름성회부터 우리는 여호와를 찾으라는 주제를 계속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seeking the Lord)이 말로 하기는 쉽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냐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에스라 8장을 통해서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냐는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준비 없이 그냥 찾아지게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어려운 일이나 큰 일이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에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학사 에스라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율법)책의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인데, 그의 생애를 보게 되면
책이 먼저 나오고 기도가 뒤따라 나옵니다.
사람이 많은 기도를 해도, 율법에 따르지 않는 기도는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율법’이란, 신약적 의미로 ‘복음’을 가리킵니다. 율법도 잘 쓰면, 선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아뢴 것입니다.
(율법)책이 먼저요, 기도가 나중에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는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호와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평소에 준비 없이 상황이 어려워진다고 하나님을 찾는다고 해서
금방 하나님을 찾을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평소에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해있고 준비될 때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영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어려움 없는 평소 여러분 영혼에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찾는 마음의 준비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찾는 일에는 뿌리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요 절대 능력자이시라는 신뢰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이 무능해 “내가 너를 도와주고 싶어도 돕지 못하겠다.”고 하시면
하나님을 찾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능력에 대한 신뢰가
여호와를 찾는 일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 7장 27절에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페르시아 왕이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가졌을까?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고레스 칙령을 냈을까?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릴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데
하나님은 유다의 왕이든 이방의 왕이든
모든 인간의 절대 주권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위기가 와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실망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여러분을 도우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을 감사하는 태도로 여호와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에는 바른 태도가 필요합니다. 바른 태도는 감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현재의 위기가 너무 크다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저에게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라며
데모하는 식으로 나가지 말아야 됩니다.
백성이 세상 왕에게 나아갈 때에 신문고를 쳐 왕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왕 앞에 나가자마자 “왕이시여, 어떻게 저에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나아가면 혼만 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왕이 잘못했을지라도 “폐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렇게 예의를 갖춘 다음에 얘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왕에게 나아갈 때도 감사의 태도를 가지고 나가야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감사치 않는 불평, 원망의 태도를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현재 지옥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할 제목을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내가 내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있다,
오늘 점심에 내가 내 입으로 밥을 먹는다, 오늘도 내가 호흡을 코로 하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얼마든지 감사한 제목입니다.
학사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에 하나님께 불평, 원망의 정신으로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살아계시면 이 민족을 이처럼 포로 되게 하고
고통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까?”라며 나가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우리가 잘못 했는데도 하나님은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서 이렇게
조서를 내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셨으니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께 나올 때에는 감사의 자세를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우리가 감사의 마음, 감사의 자세로 나아가서
여호와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여호와를 찾는 일”은 사람의 육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에스라 8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육신을 죽인다는 것은 자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육신은 살과 뼈를 의미하는 “body”가 아니라 “flesh”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죽인다는 것은 몸을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인다고 하는 것은 영어로 “존재자체를 없애 버린다(kill)”는 뜻이 아니라
“기운을 싹 빼놓는다(mortify)”는 의미입니다.
“mortification of the flesh” 즉, 죄성의 기운을 싹 빼놓는다는 것입니다.
죄성의 기운을 빼놓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금식입니다.
금식을 하면 배가 고파 힘이 없어 아무리 흉악범일지라도 살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에스라와 유다백성들이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2절로 13절에 바울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we have an obligation)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그 인생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써 육신을 죽이면, 너희는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죽고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우리 육신을 죽이면 삽니다.
그러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전반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육신이라는 죄성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하는 일은 현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 즉, 죄성이 우리 속에서 행하는 일은 무엇이냐?
19절 후반으로 21절에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육신이 우리 속에 행하는 일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즉, 성적인 부패입니다.
성적으로 부패한 사람은 육신에게 져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시간이 오래 지나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이 우리 속에 행하는 일은 우상숭배입니다. 종교적인 부패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에 많은 사람들이 사주팔자를 보고 점을 보는데, 회개해야 됩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이 우리 속에 행하는 일은 또한 인간관계의 부패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원수 맺고 분리하고 투기하고 분내고 시기하고 당 짓는 행위를 합니다.
당을 지어도 좋은 일로 지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옳지 않은 일로 당을 짓는 것은 육신에 속한 일입니다.
또 개인적인 사생활의 부패,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은
모두 육신이 우리 속에 행하는 일입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육신을 죽이면 삽니다.
그러므로 영으로써 육신을 죽이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라가 아하와 강가에 모인 유다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하루만 금식을 해도 다리에 힘이 없어서 못 피우게 됩니다.
또 이틀만 금식해도, 나가서 주먹 쥐고 싸워라 그래도 주먹에 힘이 없어서 못 싸우게 됩니다.
금식은 육신을 죽이는 강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일을 앞두면 금식하여 육신을 죽이며 여호와를 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라와 유다백성 5천명은 위험한 여행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직선거리로 900km입니다.
돌아서 가면 1,500km를 가야됩니다. 네 달을 걸어가야 되는 거리입니다.
어린 아이들과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을 30톤이나 가지고 가므로 강도를 만날 위험이 많았지만,
에스라가 평소에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선한 손이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라고 큰 소리를 쳐놨기 때문에
왕에게 가서 보병과 마병을 달라고 얘기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고 여호와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자 왕이 보더니 30톤의 은과 금을 가져가는데
그냥 가면 위험하다고 마병과 보병을 붙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기도만 했더니 왕이 알아서 마병과 보병을 붙여주셨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어렵고 큰일을 앞에 두고서는 여호와를 찾아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호와를 찾습니까?
육신을 죽이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여호와를 찾은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응답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마귀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 속에 들어있는 “육신”도, 역시 우리의 대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매일 죽여야 될 가장 큰 원수입니다.
육신이 우리의 승리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육신이 성령의 부으심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또 육신이 가정생활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을 따라 살게 되면 교회의 평안도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교회에서 당을 지어 서로 싸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신을 날마다 죽여야 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나님 제가 오늘도 이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분냄과 시기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후반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기록되었고,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육신을 죽여야 하는 의무는 우리 성도의 평생의 의무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찾는 방법은 육신을 죽이며 기도하며 찾는 것입니다.
◑2. 여호와를 찾은 결과 - 하나님의 손이 선을 베푸셨다.
▲첫째, 함께 귀환할 사람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귀환 하겠다 할 때에 사람들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에스라 8장 1절로 14절까지는 유다백성 열 두 가문에서
1,496명이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에 귀환하겠다고 지원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바벨론에 남아있는 유다인구의 0.2%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아주 극소수가 지원을 한 것입니다.
1,496명이 지원을 하자 에스라가 그들을 아하와(Ahava) 강가에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살펴보니 제사장은 있는데 제사장을 돕는 레위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레위지파 중에 아론의 후손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고,
나머지 레위지파 사람들은 아론의 후손 제사장을 돕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한 명도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에스라가 “레위인들이 어디에 많이 사냐?”고 묻자
가시뱌 지방에 많이 산다 해서
그 지방의 족장이 누구냐 물어 잇도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17절에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가시뱌 지방은 레위인들이 많이 사는 지방이었습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가 똑똑한 사람을 보내 족장에게 레위인을 보내달라고 그러자
족장 잇도가 지원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38명이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들을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 9장에 보면 히위 사람들이 변장을 해 여호수아에게 와
“멀리서 온 사람입니다. 살려주십시오.”라고 해서
여호수아가 그만 기도도 안 해보고 살려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바로 옆에 사는 히위족속이더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할 수 없이 그들을 나무패며 물 긷는 사람으로 썼습니다.
레위인의 지시를 받아서 나무패고 물 긷고 청소하는 외국인들이 느디님 사람입니다.
이 느디님 사람 220명이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1496명과 38명과 220명,
모두 1,754명이 나옵니다. 남자만 1,754명이 나오고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여 약 5,000명이 2차 귀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을 붙여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9장 37절로 38절에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일군을 공급해주셨습니다.
▲둘째, 필요한 물질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에스라 8장 26절로 27절에 에스라에게 왕과 방백과 바벨론에 남아있는
유다백성들이 준 물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은이 육백 오십 달란트요 은 기명이 일백 달란트요 금이 일백 달란트며
또 금잔이 이십개라 중수는 일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 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이 두 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놋그릇은 두 개 밖에 없고 전부다 은금인데 이것을 계산해보면 30톤입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물질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셋째, 먼길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스가랴 8장 31절, “정월 십 이일에 우리가 아하와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쌔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가는 길에 강도도 있는데, 하나님이 막아주시고 보호해 주심으로써
은금 삼십 톤과 오천 명이 무사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은 에스라 8장에서는 공급(provision)과 보호(protection),
이 두 가지를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육신이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healing)도 해 주실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필요한대로 다양하게 하나님의 선한 손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3. 여호와를 찾은 목적
▲에스라와 유다백성들은 여호와를 찾음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받아서 무사히 예루살렘에 귀환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한 근본 목적은
예루살렘에 와서 사업을 일으켜 부자가 되려는 것도,
예루살렘에 와 큰 국가를 이루어 세계를 정복해보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한 목적은 율법(즉,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재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회복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앙을 다시 회복시키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자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그들은 여호와를 구했던 것입니다.
◑결론
에스라가 개인적인 기도제목도 많았겠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신앙의 회복과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위해서, 여호와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해도
이런 요소가 결여된다면, 그것은 소용없는 기도입니다.
이기적인 목적만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타종교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여호와를 찾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요소가 꼭 들어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고자 하는 근본 동기를 가져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울 줄 믿습니다.
아무리 위기와 어려움이 있어도 여호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와주십니다.
필요한 것은 공급해주시고, 보호할 것은 보호해 주시고
치료할 것은 치료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돕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찾으십시오. 그러면 선한 손이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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