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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필역케 하신 하나님

LNCK 2013. 8. 15. 18:42

◈성전을 필역케 하신 하나님                 에스라6:13~15           출처보기

 

 

 

 

본문에 완공된 '성전'은, 신약적으로 해석하면, <성도, 교회>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고린도서에서 말씀했습니다. 고전 3:16, 6:19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에스라서에서 처럼, <성전 재건>은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서론

 

▲바벨론에 포로 되었던 유다백성들이 3차에 걸쳐 돌아왔습니다.

1차는 주전 538년에 지도자 스룹바벨이 성전건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2차는 주전 458년에 지도자 에스라가 율법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3차는 주전 444년에 지도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건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 1장으로 6장은 1차 귀환한 사람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완공한 스토리입니다.

주전 538년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2년 뒤인 주전 536년에 성전건축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좌절되어 16년 동안 성전건축은 중단되고

유다백성들은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16년 동안 하나님의 축복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기근과 자연재해가 임했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조금의 진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 두 선지자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자

유다백성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어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각성되고 부흥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사상에서 에너지가 나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아무 사상이 없으면 나올 아무 에너지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단의 모든 궤계를 물리치는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쓰시는 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받자 새로운 믿음과 태도가 일어나서

다시 성전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페르시아의 닷드내와 스달보내스 (유브라데 강 서편) 두 총독이

다시 시비를 걸고 나왔습니다. 이들이 유다백성들에게

누가 너희에게 성전건축을 허가해 주었는지 이름을 대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유다백성들은 고레스 왕이 허가를 내주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고레스 왕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당시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다리오 왕에게

“유다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는데 고레스 왕에게 허락을 받았다하니

폐하께서는 이것을 조사하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 조서를 받은 다리오 왕은 옛날 문서들이 쌓여있는 서적 곳간(archives)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다리오 왕에게 조서를 올려서

성전건축을 방해하려 했는데,

그 조서를 통해서, 다리오 왕은,

오히려 성전건축을 도와주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결국은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성전건축을 confirm(재확인) 하게 해 주었고, 도와 준 것입니다.

대적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 성취를 도와준 것입니다.

 

 

◑1. 다리오왕의 조서

 

▲드디어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한 두루마리를 얻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레스칙령으로 내용은 에스라 1장과 동일합니다.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도록 허락해라.

또 모든 경비는 페르시아 왕실에서 내도록해라.

그리고 느브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전에서 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성전의 기명들을 모두 그 본처로 돌려놓을 것이라”는 내용의

고레스 칙령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자기보다 28년 선왕인 고레스가 정당한 절차를 걸쳐 제정하고 공포한 법을 존중했습니다.

그리고 다리오 왕의 조서를 공포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총독들은 성전건축의 역사를 막지 말라.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료 강 서편 아바삭 사람들은 성전 건축하는데

얼쩡거리지 말라. 그리고 그 성전건축에 필요한 돈은

너희들이 너희 동네에서 거둔 세금으로 경비를 충당하게 하라.

이 명령을 변개하는 자는 그 집을 거름무더기로 만들 것이니라”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근거해서 조서를 정확하게 발표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나와 내 왕자들의 생명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라”고 다리오 왕이 조서를 발표한 것입니다.

 

▲에스라 5장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 6장에서는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총독도 사마리아 사람도 유다백성도 왕도 똑같았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환경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으나

성전건축을 위한 상황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최악이 최선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삶 가운데 최악의 상황이 있으시면

최선으로 바뀌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뜻만 구하면, 결국은 최선으로 다 바뀌어질 것입니다.

 

 

◑2. 이런 변화의 원인들

 

에스라 5장의 최악상황이 6장에서 최선이 된 4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중 두 가지는 인간적인 원인이고, 다른 두 가지는 영적인 원인입니다.

먼저 두 가지 인간적인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다리오왕의 품성이 좋았습니다.

백성들을 속이고 억누르고 죽이고 핍박하고 착취해서

자기 자신과 가문과 추종자만의 유익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독재자입니다.

그러나 다리오왕은 독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의롭고 자비로운 통치자였습니다.

소수민족의 신앙을 존중해주는 점잖은 통치자였습니다.

 

다리오왕의 조서 내용이 분명하고 단호하며 자비롭습니다.

에스라 6장 12절 후반에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찌어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을 50%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면 더 많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리오왕의 조서를 보게 되면 그가 얼마나 분명하고 권위 있으며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겸손한 부탁까지도 아울러 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통치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좋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그가 비록 불교신자나 유교신자, 혹은 이슬람 신자라 해도

그의 성품이 좋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품만 좋아도 교만하지 않고 하늘의 하나님께 겸손하고

소수 민족의 종교도 인정해 줍니다.

 

기독교의 신앙도 인정해줘서 복음의 문도 열어주고 선교의 문도 열어주게 됩니다.

통치자들은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성품만 좋아도

하나님의 교회에 간접적인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북한에도 중국에도 인도에도 미국에도 좋은 성품을 가진 지도자가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두 번째 인간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혜롭고 겸손한 것입니다.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매우 거만한 자세로 유다백성들에게

누구에게 건축허가를 받았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때에 유다백성들이 교만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 5장 11절로 17절에 그들이 대답한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종이라고 하는데 건방지다고 시비 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정치에 아무런 해도 끼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일을 믿는 대로 하겠다는데 싸울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죄인들의 후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무릎 꿇고 나오는데, 전쟁을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런데 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보내주고 건축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지혜로운 대답을 하자 총독들의 분노가 사그라졌습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성질을 내며 왔으나, 유다백성들의 지혜롭고 겸손한 대답을 듣고

그러냐며 점잖게 돌아갔고 다리오왕의 마음도 움직인 것입니다.

 

잠언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과격한 사람들은 대화를 해도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순한 대답만 해도 사람들이 분노하고 왔다가도 분노를 쉰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밖에서 화가 나는 일을 당해가지고 집에 와서 짜증을 부려도

아내가 유순하게 “여보, 김치찌개 끓여 놨으니 이것 잡수시고 화 좀 푸세요.”라고

하면 남편의 화가 풀리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짜증을 부린다고,

아내가 같이 화를 내면 결국 서로 싸움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격한 말을 하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공식적인 회의를 할 때도 과격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데 목소리만 크게 말하면 사람들이 상종을 안 합니다.

 

그러나 조용하게 말해도 논리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말하면

사람들이 굴복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하나님 백성들처럼 언제나 조리 있고 유순한 대답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이 최선으로 바뀌게 된 인간적인 원인 두 가지는

다리오왕의 좋은 성품과, 하나님 백성들의 지혜롭고 겸손한 대답이었습니다.

 

▲두 가지 영적인 원인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었습니다.

 

잠언 21장 1절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리오왕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왕이 조사하도록 마음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고레스왕의 칙령도 찾아내게 한 것입니다.

 

에스라 6장 2절에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칙령이 있는 것을 알게 하셔서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선교지의 교회가 때로 불신자 정치가들의 손에 생명이 걸리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공산권 국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그 곳 정치가들의 마음이 조금 변하면 교회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불신자일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

교회는 보호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지역에도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이유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각성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말씀을 성실하게 증거 했습니다.

그 말씀은 다리오 왕이 들은 것도 총독들이 들은 것도 아니라

유다백성들이 들은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크리스천들은 교회 안에서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큰소리치는데

그렇다고 무슨 사회가 변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밝으면

저절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소금으로서 맛을 잃지 아니하면 세상은 부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어두워지고 소금이 맛을 잃으면 이 세상은 저절로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세상이 어두운 이유를 세상 사람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비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어둡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싸우면 세상이 싸웁니다.

교회가 어두우면 세상이 어둡습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요나 한 사람이 불순종하면 배가 풍랑을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밝아야 됩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 어두움이 있다면

그것은 불신자의 책임이 아니라 신자가 빛을 환하게 비취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심지어는 목사님이라고 해도

어두운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먼저 밝아져야 되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고 말씀을 사랑해서 우리 영혼이 밝아지고

우리 안에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면

세상은 저절로 밝아지고 정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3. 변화의 결과는 성전의 필역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자 5년 만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에스라 6장 15절에

“다리오왕 육년 아달월 삼일에 전을 필역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다리오왕은 주전 521년에 즉위했으므로 다리오왕 육년은 주전 515년입니다.

유다백성들은 스룹바벨 성전을 필역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열왕기상 8장 5절에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솔로몬 왕이 어마어마하게 큰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거행할 때 양과 소가 몇 마리인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스룹바벨 성전 봉헌식 때는 제물로 드린 짐승의 숫자가 정확히 나올 정도로

성전도 봉헌식도 초라했습니다. 에스라 6장 17절에

“하나님의 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일백과 수양 이백과 어린 양 사백을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수염소 열 둘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17절 후반의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수염소 열둘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를 주목해서봐야 됩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지파는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인데

이 두 지파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표해서

수염소 열 둘을 놓고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5만 명에 가까운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의 대표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신앙을 가진 “남은자”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열 지파는 불신앙으로 떨어져버렸고,

두 지파 가운데서도 98%는 바벨론에 남아있고 2%만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바로 신앙의 남은자입니다.

 

19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10장 21절에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은자는 돌아오리라(The Remnant will come back)”는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세상이 아무리 악이 득세하고 악한 자들이 횡행하고 거짓이 이기는 것 같아도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다수가 넓은 길로 가더라도,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됩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이 영생 길이요 생명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로 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 자만이

남은자가 되는 것입니다.

 

▲580년 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고

잃어버린 양들을 찾도록 하셨습니다.

구약의 열둘은 “남은자(The Remnant)”의 상징이고,

신약의 열둘은 “택함 받은자(The Elect)”의 상징입니다.

 

이들이 합하여 참 이스라엘(true Israel) 즉, 영생을 얻을 교회를 이룹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남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며 삽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멸망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예수를 진실로 믿고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실히 믿는 사람은

남은자가 되어, 영생을 소유하고 영원한 승리자가 될 줄로 믿으십시오.

 

불신자들이 아무리 잘되어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잠깐 누리다가 없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은 남은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6장에 남은자의 행한 두 가지가 나옵니다.

21절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남은자는 먼저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렸습니다.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사상적으로 더러운 것과 스스로 분리시켰다는 것입니다.

 

점을 치러 다니고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영적인 더러움입니다.

예수 믿는 남은자는, 영적/ 윤리적/ 사상적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였습니다.

(They sought the Lord).

 

이번 여름산상부흥성회의 주제가 “여호와를 찾으라(사 55:6)” 였습니다.

시편 105편 3절에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찌로다”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호와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환경은 하나도 즐거울 것이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구하면 즐거움이 옵니다.

 

여러분 마음에 즐거울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분들은 여호와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16장 9절 전반에도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찾으면 즐거움(joy)과 능력(power)이 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에스라 6장 22절에 이루어졌습니다.

“즐거우므로 칠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로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저희에게로 돌이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전 역사하는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중요한 단어가 하나는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힘 즉, 능력(能力)입니다.

유다백성들에게 즐거움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더니

즐거움과 능력이 와서 결국은 일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

 

진실로 예수를 구주로 믿는 남은자가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눈은 “남은자”를 향해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의 축복의 눈은 남은자인 나를 향하고 있어

세상이 연합되어 나를 죽이려 해도 나는 죽지 않고 죽어도 다시 산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둘째, 남은자는 스스로 격려하여 용기를 내야 하나님의 축복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 핍박도 있고 반대도 있고 좌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와도 주저앉아있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성전을 세워야 됩니다.

 

일어나서 돌 하나라도 갖다놓아야 됩니다. 사람이 일을 하지 않고 주저앉아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서 일을 해야 됩니다.

할 일이 없으면 등산이라도 하고 교회에 와서 작은 봉사라도 해야 됩니다.

설거지라도 청소라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저앉아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서 무슨 일이라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남은자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손으로 일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내 발이가면 하나님의 복이 거기 임하며, 내게 복이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 남은자가 된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입니까?

 

셋째, 남은자는 세상과 분리하여 여호와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은자는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고 여호와를 찾아야 됩니다.

그러면 즐거움과 능력이 우리와 항상 함께 따라서

우리는 복있는 사람으로 살다가 복있는 곳에 돌아갈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남은자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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