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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벽

LNCK 2013. 8. 16. 15:04

◈무너진 성벽                    느1:1-4                                     출처보기

 

※‘성벽’의 신약적 의미 역시 ‘성도’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계시록 21장에,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벽)이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곧 ‘성도’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21:2, 9, 11.

 

그런데 에스라서의 ‘성전(재건)’ 역시 ‘성도의 신앙회복’으로 봅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고전3:16, 6:19.

 

그렇다면 성전의 회복과, 성벽의 재건의 차이는

즉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차이는,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에스라서는 ‘성전의 회복’ .. 즉 ‘내적 신앙의 회복, 영적인 회복, 하나님과 관계 회복’ 측면을 강조한다면,

느헤미야서는 ‘성벽의 회복’ .. 즉 ‘외적 행위의 회복, 현실적 의 회복’을 강조한다고 봅니다.

 

     이런 배경을 무시하고, 느헤미야서를 피터 드러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지도자의 모델'로 보고서

     느헤미야를 통해 배우는 <자기 계발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성경을 거꾸로 읽는 것입니다.

 

 

◑서론

 

▲원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히브리 성경으로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제가 다르기 때문에 두 권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에스라서의 주제는 하나님 말씀의 회복, 예배의 회복입니다.

다시 말해 에스라서의 주제는 예배(worship)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서는 성벽을 재건하는 일(work)이 주제입니다.

 

우리 인생은 예배가 없는 일도 안 되는 것이고, 일이 없는 예배도 안 됩니다.

예배를 안 드리고 일만 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일은 없이 예배만 드린다면 그것도 공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가 있고 느헤미야가 있는 것은

우리의 인생은 예배도 드리고 일도 하는 생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삶이 예배도 있고 일도 있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배경

 

▲느헤미야의 서론으로 구약성서의 전체 구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 이르는 역사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모두 66권으로 구약성서는 39권이고 신약성서는 27권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39권은 17:5:17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의 17은 역사서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에스더서까지 17권이 역사서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있는 5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이렇게 5권을 시가서

혹은 감정에 관한 책(emotional book)이라고 말합니다.

 

나머지 17권은 예언서라고도 하고 선지서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서는 17권의 역사서와, 5권의 시가서와, 17권의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서 17권은 5:9:3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서 17권 가운데 앞의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기록했기 때문에 모세 5경이라고 하고,

 

가운데 9개의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되기 이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포로기 이전의 역사서(preexilic historical books)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3권인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의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에 포로기 이후의 책(postexilic historical books)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역사서 17권은 5:9:3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언서 17권도 마찬가지로 5:9:3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5인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은

분량이 두껍기 때문에 대선지서라고 합니다.

 

나머지 9권과 3권은 소선지서라고 하는데 소선지서 가운데

9권인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는

바벨론 포로 되기 이전의 예언을 한 것이고,

 

뒤의 3권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의 예언을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가운데 9권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선지서요

뒤의 3권은 바벨론 포로 이후의 예언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서는 17:5:17에다 5:9:3의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역사서의 마지막 세권인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와

예언서의 마지막 세 권인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동일한 시대인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이후의 시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시대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8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하는 선택입니다.

 

둘째, 노예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인구 200만 명을 갖춘 대국가로 성장할 인적인 자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해방 혹은 출애굽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400년 만에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고

홍해가 갈라지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습니다.

 

넷째, 가나안 입성입니다.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한 후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입성을 해서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이 없고

오늘날의 판사인 사사들이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돌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그리고 사무엘이었습니다.

 

다섯째, 왕정국가 형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정국가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첫 번째 왕이 되어서 왕정국가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들이 처음에는 훌륭한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하나님 말씀을 다 어겼습니다.

 

여섯째, 배교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은 두 돌비입니다.

첫 돌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둘째 돌비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고 부도덕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배교를 한 것입니다.

 

일곱째, 포로시대입니다.

배교로 말미암아 그들은 포로시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 포로되어 멸망당하고,

남왕국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언약을 어기면 포로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입니다.

 

여덟째, 칙령시대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약 70년 하다 보니

하나님이 고레스라고 하는 페르시아의 왕을 일으켜서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주전 538년 고레스 칙령을 발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를 가리켜 칙령시대라고 합니다.

 

유다백성들 가운데 5만 명에서 103명 모자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간단히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백성들은 주전 515년에 성전을 완공했습니다.

그것이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그리고 제사도 회복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전을 완공하고 제사를 회복했지만

주전 515년으로부터 약 70년의 세월이 흘러도 거기서 더 발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전제사를 드려도 안전하게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도시에 성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전 444년에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가 귀환하기 2년 전인

주전 446년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가 통치하던 제 이십년에

수산궁에 있다가 한 형제가 예루살렘에 갔다와서 예루살렘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의 이름은 하나니입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에게 “형제 하나니여 예루살렘에 있는 우리 동포의 형편이

어떠하며 예루살렘성의 형편이 어떠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니가 대단히 절망적인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큰 환난과 능욕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벽이 무너져 없어져 버리고 성문이 다 불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주저앉아 울면서 여러 날을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슬픈 영화만 봐도 금방 눈물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외형상으로 궤휼과 권세가 많아 도무지 울 것 같지 않게

생긴 사람들도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페르시아에 태어나서 페르시아에서 성장한 유대인으로 대단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그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에서 출세한 유대인이 별로 없는데 그는 페르시아의 경찰에 투신해

페스시아의 왕 아닥사스다의 생명을 보호하는 술맡은 관원장의 높은 위치까지

지위가 올라갔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청와대에서 주방 안전을 책임지는 경호실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연약해서 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느헤미야가 여러 날을 주저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2. 성벽의 중요성

 

오늘날 성벽이 좀 무너졌다고 뭘 그렇게까지 우느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벽이 없는 도시는 도시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서 시대에 성벽은 네 가지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성벽은 “구원”입니다.

성경에 성벽은 구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사야 60장 18절 후반에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벽이 구원이라는 것은 영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육신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외적이 아무리 쳐들어와도 성벽이 버티고 있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성벽이 높은 성 안에 살고 있는데 외적이 성벽을 기어 올라온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위에서 벽돌 같은 것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붓거나 장대로 사닥다리를

성에서 떨어지게 만들면 적이 성안으로 침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벽이 단단하게 서 있다는 것은 곧 구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벽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다는 것은 원수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게 됩니다.

그 성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은 구원입니다.

 

▲둘째, 성벽은 “안전”입니다.

잠언 18장 11절에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고 기록되었습니다.

 

부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현금과 부동산과 주식을

높은 성벽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내게는 재물이 많아 나는 안전하도다.

나의 노년기는 안전하도다. 나의 미래는 안전하도다.

나의 많은 재물이 내게 높은 성벽이로다.”라고 생각합니다.

 

성벽은 안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

여리고성에 성벽이 서있는 동안에는 여리고성의 주민들은 안전했습니다.

아무걱정을 안했습니다. 성안에 있으면 성 밖에 군대가 쳐들어와도 호랑이가 와도

곰이 와도 독사가 득실거려도 걱정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안에 있고 성벽이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백성들과 7일 동안 성을 계속 돌다보니

성벽이 무너져 버렸고, 성벽이 무너지자 여리고성도 결코 안전한 곳이 못되고

결국 망해버렸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 성벽이 훼파되었다는 것은

그 성이 전혀 안전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에도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 보초를 세우고 자야 됩니다.

왜냐하면 외적이 쳐들어와서 자기 가족을 잡아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낮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곡식을 쌓아두어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성벽이 없는데 누가 밤에 와서 훔쳐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벽은 곧 안전을 의미합니다.

 

▲셋째, 성벽은 “능력”입니다.

한 도시의 능력은 그 도시에 군인이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벽이 얼마나 높고 길며 견고하냐에 따라서 그 도시의 능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북경에 가면 만리장성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경은 능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지금이야 만리장성 때문에 능력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옛날에는 만리장성 때문에 북경은 능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예레미야 1장 18절로 19절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가리켜

“너는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벽은 능력입니다. 성벽이 든든한 도시는 쳐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이 없다고 하는 것은

유다백성이 약한 백성이 되었고 좌절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 성벽은 “분리”입니다.

벽이 있으면 안과 밖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성벽이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외부와 내부의 구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성벽이 무너져버리다 보니, 이방의 종교가 마구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와 마구 섞이고 혼합되어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세상과 교회가 섞여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벽은 구원이요 안전이요 능력이요 분리입니다.

이렇게 성벽이 중요하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진 채로 앉아있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궤휼과 권세가 능하고 출세한 예레미야가 홀로 성벽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 우리 고향 예루살렘에 성벽을 세워달라고

앉아서 수일동안 울며 기도한 것입니다.

 

 

3. 느헤미야의 사명

 

13장으로 구성된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성벽을 중건하고 다시는 수치를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2장 17절에 “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우리의 당한 곤경은

너희도 목도하는바라 예루살렘이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져 버리니 환란(trouble)과 수치(disgrace)가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을 중건하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1~6장은 성벽재건의(rebuilding) 기록이요,

7~13장은 예루살렘 세워진 성벽 안에서 학사 에스라가

율법을 재교육(re-instruction)한 기록입니다.

 

 

결론

 

여러분 삶에 혹시라도 환란과 수치가 임하여있지는 않습니까? 느헤미야 1장 3절에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풍성한 삶을 누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왜 내 삶에는 고통과 수치가 임하였는가?”라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느헤미야서는 그 이유를 답하기를 성벽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느헤미야서의 주제는 성벽을 다시 세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첫째, 영적인 성벽을 세워야 합니다.

기도의 성벽, 말씀 공부의 성벽, 헌신의 성벽,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성벽,

봉사의 성벽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스가랴 2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불성곽이 되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 주시므로 마귀와 그의 졸개인 악령 귀신들이

우리 가정을 공격해 와도 안전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주시고

우리 가정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런 가정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씀공부도 안하고 헌신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는 등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부지런히 찾아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적인 성벽이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결국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귀신, 악령, 마귀가 들락날락 하며 하고 싶은 것을 다해서

결국 성도의 삶이라 해도 환란과 수치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소한 얘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정이든 교회든 직장이든 사회든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어주시는 곳은

든든한 줄로 믿습니다.

 

거기에는 세상과는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고 안전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성벽을 다시 세워야 됩니다.

 

기도생활 하기를 싫어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마음을 고쳐먹고

하루에 10분이라도 기도하십시오.

아침잠이 많아 새벽기도 나오기가 힘드신 분은 저녁기도를 드리면 됩니다.

자기 전에 성경을 한 장이라도 읽고 10분이라도 하루를 돌아보며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것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기도응답이 즉각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가정에 불성곽이 되어 주셔서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도 일곱 길로 쫓겨 가고

가정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고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성벽을 다시 세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정신적인 성벽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이 정신이 건강해야 됩니다. 잠언 25장 28절에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마음이 요동하고 안정되지 못하면

성벽이 무너진 도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잘 제어해야 됩니다.

 

분노하는 일이 있어도 분노를 잘 다스리고

미운일이 있어도 미움도 잘 다스려야 됩니다.

 

아무리 화가 놔도 마음을 잘 다스리고 “아버지 저 악한 인간은 주께 맡기나이다.

나는 저 인간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만약 돈을 떼어먹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미워하다가는 우리가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제 돈을 떼어먹어서 사람 하나라도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일입니까? 저의 억울한 것은 주님께서 갚아주시옵소서.”

이렇게 해서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성벽도 잘 세우시고 마음도 잘 제어(control)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분리의 성벽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분리시켜 놓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따로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옥 갈 사람들하고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언제 죽어도 천국에서 내가 받아주겠다고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됩니다.

말하는 것도 다르고 노는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소망하는 것도 달라야 됩니다.

 

기독교인인지 불교신자인지 유교신자인지 알 수 없고

도무지 예수냄새가 전혀 나지 않으면 그는 분리의 성벽이 무너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분리의 성벽인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면서 영적인 성벽, 정신적인 성벽, 분리의 성벽을 다시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가정과 내영혼의 불성곽이 되어 주시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