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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영적 침체 사53:1~3 도서 스크랩 中國語
「Lecture to My Students」 11장,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크리스천다이제스트사 pp.243~256. 정리 편집.
아무리 탁월하게 쓰임 받는 자들이라도
인생의 한 때, 어두운 침체의 시기를 경험한다는 사실은
그들의 전기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루터의 생애만 보아도, 그런 경우가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는 환희의 7층천까지 올라가 있는 때도 많았고,
반대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때도 많았습니다.
그는 임종 시에도, 심하게 몰아치는 광풍을 겪었고
마치 대단히 지친 어린아이처럼 마지막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째서 빛의 자녀들이, 때때로 캄캄한 어둠 속을 걷게 되는지, 한번 살펴보십시다.
▲1. 사람은, 세상에서 환란과 고통을 당하는 게 일종의 숙명입니다.
사람인 이상, 환란과 고통 가운데, 때때로 어두운 영적 침체의 시기를 통과하게 됩니다.
구속의 경륜 아래서조차도, 연약함을 견뎌야 하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께서 도우신다’는 약속이 주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환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아니 의인일수록, 환란과 핍박을 오히려 더 받는 측면도 반드시 있습니다.
이래 저래 사람은 영적 침체를 겪게 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없어서.. 영적으로 실족하거나 파산해서.. 영적 침체를 겪게 됩니다.
반대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마귀가 주는 환란과 핍박이 커집니다.
모든 때에 그렇지는 않지만, 인생의 여정 가운데 그런 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이래 저래 사람은 영적 침체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더 심한 영적 침체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당하는 주의 백성들을 동정하기 위해서
주님은 그에게, 다른 이들보다 더 큰 환란의 몫을 주십니다.
그래야 침체를 겪는 양떼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고, 그들을 잘 위로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체를 떠난 영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도록 명하시지 않습니다.
죽은 영혼이 나타나서, 말씀을 선포하거나, 신자들을 말씀으로 위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에게도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역은, 오로지 사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만이, 육체를 지고, 탄식하는 자들의 심정을,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영적 침체가.. 오히려 신자를 강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사람인 이상, 육신이 병들면서, 그로 인해 영적 침체까지 겪게 됩니다.
-소화 기관이 늘 병들어서, 몇 해 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 하는 사람..
-신장이 약해서, 늘 고통을 당하는 사람..
젊어서는 아직 몰라도, 나이가 들면, 자기 몸에 한 두 가지 이상
사람은 지병을 달고 살게 됩니다.
물론 젊어서부터, 그런 건강의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별히 정신적 연약함이라든지, 육신적 장애를 타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건강상 문제로.. 영적 침체에 일정 기간 빠지기도 합니다만,
그런데 오히려 이런 이유로 ‘내가 약할 때 강함이라’는 역사도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식물은, 늪지에서 자라기 때문에, 오히려 약에 쓰이는 특별한 성분을 지니기도 합니다.
어떤 식물은, 음지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특별한 성분을 지니기도 합니다. *인삼이 그렇지요?
배에는, 돛이 있어서, 돛이 바람을 타고 배를 빨리 항해하도록 도와줍니다만,
만약에 배에, 밑바닥에 깔린 무거운 쇠, 즉 밸러스트가 없다면,
그 배는 빨리 가면 갈수록, 균형을 못 잡고 침몰하기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극심한 고통은,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천재성을 일깨워 줍니다.
만약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잠자는 사자’처럼, 나태해져 버렸을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천재성이 발휘되겠습니까?
어쨌거나 고통, 그것으로 인한 영적 침체를 겪는 일은, 힘들고 지치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 고통을 통해서, 내 속에 감춰졌던 잠재성, 천재성도 계발될 수 있으니,
하나님이 다 알아서, 신자에게 적절한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 가운데 사역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요나의 경우가, 그 대표적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대한 한탄, 하소연, 자기 신세타령, 그 울먹임이
예레미야서의 전반부의 거의 줄거리입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사역이나 이사야의 사역이나.. 똑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똑같이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똑바로 길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비틀거리며 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뚝거리지만, 계속 길을 갈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만 올바르다면, 비록 오랜 침체 가운데서도, 계속 사역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시력이 좋았던 라헬과, 시력이 좋지 못했던 레아 사이에서
시력이 좋지 못해서 우울한 삶을 살았던 레아가, 더 많은 족장을 낳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녀를 술술 잘 낳았던 브닌나보다,
자녀를 낳지 못해, 하나님 전에 나와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한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큰 역사를 이루었던 것도, 좋은 예입니다.
혹자는 주님을 ‘슬픔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나실 때부터 ‘볼품이 없었고, 사람에게 멸시를 받았으며,
일평생 고난을 많이 겪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53:2~3
더욱이 주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지, 우리 자체가 무슨 찬란한 보배는 아닙니다.
그 질그릇에, 여기 저기에 흠이 있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대수이겠습니까.
어차피 질그릇인데요!
▲3. 사역을 진실하게 감당할수록.. 마귀의 공격에 노출되어.. 침체가 심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사53:1
메시아에 대해서 전했건만, 믿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팔(즉 능력)이, 예수께 분명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사역자는 침체와 우울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전해도 안 믿으니까요!
진리를 전하면.. 더 뜨거운 반응이 나타나야 되는데
진리를 전할수록.. 더 냉담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를, 모두가 칭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저 스펄전은, 흙으로 구운 사기 인형을 보면, 그 속이 텅 비어 있는데,
꼭 사역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기 영혼을 다 쏟아 부어서, 설교를 하고 나면, 사역을 하고 나면
마치 속이 텅 비는 것 같은, 그런 피로감이 오는 것입니다. 진이 다 빠진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사도바울처럼, 진력을 다 쏟아서 사역하게 되면
큰 칭송과 박수가 따라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쩌면 반대의 반응도 나타납니다.
오히려 바울처럼, 어디를 가든지 핍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4. 최고봉에 오른 사람일수록, 외로움은 더 심합니다.
세상에는,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인간적 외로움이 커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일반 병사들은 숫자가 많지만, 대위, 대령, 장성으로 갈수록.. 숫자가 희소해집니다.
그러니까 장성급이 되면, 더 외로운 것입니다.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으니까요. 높다고 다 불편해 하고, 피해 버립니다.
조직적 관계는 형성되겠지만, ‘인간적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지도자의 위치로 높이신 사람은,
그가 높은 위치에 있는 만큼, 외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가 자기 외로움을 해소하는 길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산꼭대기 정상에 홀로 장엄하게 서 있으면,
산꼭대기까지 올라오지 못한 사람들과는, 자연적으로 거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고독함을 만약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서만 이야기 나누는 기회입니다.
물론 주위의 다른 ‘최고봉’들을 만나서 교제하면서
그 외로움을 해소할 수도 있겠지만,
먼저는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더 깊이 가지면서, 그 외로움을 해소해야 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십시오.
홀로 외롭게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곁에 제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 수준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주님이 홀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처럼
오직 하나님과 대화로, 자기 외로움을 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둘씩 짝 지워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본질이 어떠한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를 돕는 짝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바나바, 실라, 누가, 디모데가 있었지만,
히말라야 산맥의 정상과 같은 그 사도에 비하면,
바울의 주변 인물들은, 주변의 낮은 봉우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당신이, 어떤 분야의 최고봉이라면,
그 위치에서 오는 외로움은, 그냥 달게 받으십시오.
그리고 같이 교제할 수 있는 다른 최고봉을 찾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최고봉이신 주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외로움을 달래고,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길입니다.
▲5. 밧줄을 너무 세게 당기면 끊어집니다. 너무 세게 당기지는 마십시오.
육체를 너무 혹사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화가는 자기의 붓을 늘 씻습니다. 붓을 아낍니다.
대장장이는 자기 연장을 늘 잘 관리합니다. 날을 수리하고, 잘 갈아둡니다.
사냥꾼은, 자기의 매나 사냥개를 늘 잘 관리합니다.
음악가는, 자기의 악기나 활을 얼마나 정성스레 관리합니까.
그런데 유독 학자들, 목회자들은,
자기 몸을 소홀히 다루는 것 같습니다.
저는 Lucan이 말한 격언을 늘 기억하면서 삽니다.
“밧줄을 너무 세게 당기지 마십시오. 그러면 툭 끊어져 버립니다.”
목회자들이, 어떤 연구에 몰두하다보면,
한 자리에서 몇 시간동안 꼼짝하지 않고, 펜을 움직입니다. (요즘은 타자를 칩니다.)
그러면 눈, 몸, 다리 등.. 여러 기관에 무리가 가게 됩니다.
중간 중간 쉬면서 연구해야 하는데...
전혀 집중을 못해서.. 문제인 사람들이 많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너무 집중한 가운데..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은 시간을 맞춰놓으면, 한 시간 지나면 때르릉 울려주는 타이머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산길을 걷는다고 해서, 자기 영혼이 은혜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혜 다음으로 좋은 것입니다.
밧줄이 끊어져서, 오래 일을 못하는 것보다는
밧줄이 끊어질 정도로는, 무리해서 당기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영적 침체가 찾아오는 시기
▲1. 큰 성공, 업적을 이룬 후에, 영적 침체가 쉽게 찾아옵니다.
특별히 그 때에 조심해야 합니다.
큰 성공을 이루고, 큰 업적을 성취한 후에는
더 기뻐하고, 더 즐거워하며, 영적으로 더 상승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방심하면, 교만해져서, 영적으로 침체를 겪게 되기도 합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승리에 취하여, 필요 이상으로 기뻐 날뛰는 것을
그런 교만의 위험에 빠지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도 갈멜산에서 큰 업적을 이룬 후에, 영적 침체에 빠져버렸습니다.
오죽 심했으면, 그는 ‘죽기를 갈망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는 사람은,
크나큰 기쁨과 흥분의 순간이 있으면,
그 후에는 반드시 침체가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면서.. 스스로 미리 대처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크나큰 승리 후에, 큰 영적 침체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침체는 ‘내가 나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야곱은,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 하면서, 결국 새벽이 되어서,
씨름이 끝나자, 다리를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와 싸움과 그 승리를.. 자랑할 수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들었지만
그의 육체에 가시가 생겨서, 사탄의 사자 역할을 하는 것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부흥으로 말미암아 자기 발이 공중에 떠오르게 되고
대중적인 인기로 말미암아 높이 치켜세움을 받고
영혼을 구하는 일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헛된 영광을 받게 될 때
반대로 우리가 크게 파선하는 일을, 주님은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야 다시 벌거벗은 몸으로, 만세반석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분만 간절히 의지하는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바람에 나는 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하십니다.
▲2. 큰 성취를 앞두고도, 영적 침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취가 너무 크고 위대한 일이라서, 마치 여리고성 앞에 선 것처럼
우리 영혼이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말입니다.
여리고 성이,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는데,
그 거인 같은 아낙 자손들 앞에서, 자신이 메뚜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눈으로는, 당연한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이기에, 그 성들을 함락시키고, 그 거인들을 정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가 다시스로 도망가 버린 것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니느웨가 어떤 성입니까. 앗수르가 얼마나 잔인한 민족입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이방 신인 여호와를 가서 전파하라고요?
그 큰 임무 앞에서, 잠시라도 침체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 누가 있겠습니까!
제 스펄전이 런던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 그랬습니다.
이제 대도시 런던으로 청빙을 받아서, 제 목회의 장래가 활짝 열려있다는 생각이 들수도 있었지만,
저는 반대로, 깊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부름 받은 모세와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이기에, 이 엄청난 무리들을 계속해서 인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실제 나이도 약관 20대이었습니다.)
그러나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으면, 그 후에는 은혜의 단비가 내리는 셈입니다.
거친 옷을 입은 선지자 세례요한 후에는, 주님이 등장하시는 법입니다.
목동이 양을 치며 홀로 두려움 가운데 지낼 동안에,
여호와께서 그 목동에게 나타나 주시는 법입니다.
먼저 광야를 지나야,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법입니다.
비둘기에 앞서, 까마귀가 먼저 보냄을 받는 법입니다.
(우리에게도 까마귀가 먼저 찾아옵니다.)
영적 침체를 겪은 이후에는, 더 크고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법입니다.
▲3. 목회를 하는 중에, 침체가 오기도 합니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형제가, 등을 돌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설교자의 마음이 한동안 괴로움과 비통한 마음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평소에 신앙생활 잘 하던 신자가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목회자는, 그게 다 자기 책임인 것 같아서,
멀리 광야로 들어가서, 영원히 그곳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거기에다 불신자들, 세상의 조롱, 폄하하는 발언들, 교회를 향한 비방을 들을 때
목회를 관두고, 다시는 그런 비방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목회를 10년 한 고생보다,
아히도벨 같은 배반자, 데마 같은 사람에 의해서 단 몇 시간 충격 받는 것이,
아마 더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공격을 받아도,
겉으로 내색을 하지 않고, 덤덤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내면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입니다.
저는 서리 음악당의 그 처참한 사건 이후에 극심한 어두움의 공포를 겪었습니다.
*Surrey 뮤직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 몇 명이 깔려죽는 압사 사건이 일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저는 그 당시 엄청난 압박을 받았고,
그 처참한 불행의 무게 때문에 한없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소요와 공포, 사람들이 죽는 (가상의) 일들이 밤낮으로 제게 엄습했고,
제가 살아 있다는 자체가 짐으로 여겨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예수)를 높이시니” 라는 본문이
제 영혼에 은혜로 다가오는 순간, 저는 그 공포의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저렇게 고통을 당하나
예수께서는 여전히 위대하시다는 사실이 저를 일깨워서 이성과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영적 침체가 닥칠 때에, 오로지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구원만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만, 침체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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