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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옥외 노천 설교의 역사 / Spurgeon

LNCK 2013. 10. 1. 13:19

www.youtube.com/watch?v=iHHPZhEzFCc

◈옥외 노천 설교의 역사           눅19:40                  도서 스크랩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17장. 크리스천다이제스트사. pp.370~376. 요약, 정리.

 

 

◑기독교에는, 노천 설교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옥외 노천 설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노천 설교가 불가피했습니다만.. 어쨌든,

 

창세기의 에녹은, 강단이 별도로 없이 언덕에서 예언하였고,

의를 전파한 노아는, 그의 방주를 짓는 현장에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역시, 노천에서 무수한 무리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폭풍우가 치는 가운데 길갈의 들판에서 설교하였고,

주께서는 그 설교를 통하여 백성들을 책망하시사, 그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 서서, 우왕좌왕하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느냐?’고 외쳤습니다.

 

요나 역시 니느웨의 거리(노천)에서 경고의 말씀을 외쳤고,

곳곳마다 다니면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같이 수문 water gate 앞에 있는 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 도처에서, 이처럼 옥외 노천 설교의 예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옥외 노천 설교

우리 주님도 주로 산기슭이나 해변가나 거리에서 설교를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야말로 그 의도와 목적으로 볼 때, 과연 노천 설교자이셨습니다.

 

그는 회당에서도 잠잠히 계시지 않았습니다만, 들판에서도 똑같이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록된 설교들 중에, 교회당 안에서 행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 대신 산상 설교와 평지 설교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최초의, 가장 신성한 설교 양식은,

주로 주님 자신이 행하신 노천 설교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옥외 노천 설교

주님이 떠나신 후, 그의 제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실내에서, 특히 다락방에서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도 설교가 가장 흔하게 행해진 곳은

성전 뜰(노천)이었고, 또한 그와 같은 탁 트인 공간이었습니다.

 

거룩한 곳이라거나 성별된 교회당 개념은, 그들에게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들이 성전 뜰에서 설교한 것은,

그곳이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집집마다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였습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은 집을 빌려서, 혹은 회당에서도 긍휼의 메시지를 전했지만,

동시에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어느 곳에서나 설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초대교부들도, 옥외설교를 행하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역사가 유세비우스(265?~339?)의 증언을 들어보십시오.

 

사도들의 그 거룩하고 고귀한 제자(교부)들은,

어느 곳에 가든지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하였고,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의 씨앗들을 뿌렸다.

 

당시 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자기 나라를 떠나 기독교 신앙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로 가서,

전도자의 일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복음의 기록들을 그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믿음을 심어 인도자와 목회자들을 세워

그들에게 이 새로운 밭(교회)을 보살필 임무를 부여하고 나면,

그 즉시 성령의 은혜와 강력한 역사하심의 도우심을 받아 다른 나라로 옮겨갔다.

 

 

◑중세 교황주의 때는, 노천설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중세의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점차 쇠락해 가는 교회 가운데서

당시 탁월한 설교자들도

역시 옥외 노천설교를 행했는데,

그들은 순회 수도사들로서, 기독교 신앙과 경건을 생생하게 보존했으며,

또한 그 신앙 단체들의 위대한 창설자들이었습니다.

 

▲라티스본 Ratisbon地名 의 베르톨드 (Berthold 1210~1272)는

보헤미아의 글라츠 근처의 들판에서 6만 명 혹은 10만 명의 청중들 앞에서 설교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르나르 (Bernard 1090~1153)와

파도바地名의 안토니우스 (Anthony 1195~1231), 그리고 토마스 등

유명한 순회 설교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시간이 지금 없습니다.

 

액서터의 주교 라빙턴 Lavington 박사는,

초기의 수도사들이 노천에서 사람을 끄는 일에 능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투로 말했는데,

그것은 감리교도들이 노천설교에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 것입니다.

 

그는 베로나의 피터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는 설교에 신적인 재능이 있었는데, 교회당이나 거리나 장터에서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유식한 주교는 그 이외에도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들이 선한 의도이든 악한 의도이든

“옥외 노천 설교가 굉장한 힘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중세시대 교황주의가 온 세상을 휩쓸기 시작하였을 때,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은 모두가 옥외 노천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브레시아의 아놀드는, 바티칸 교황청 정문 앞에서

교황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탈하였음을 외치기도 했습니다.

 

신앙 부흥 사건들이 대개 빈번한 옥외 노천 설교와

혹은 이례적인 장소에서 설교들이 있은 후에 이어졌다는 사실은

입증하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최초의 개신교 교리에 대한 단호한 설교는,

거의가 옥외에서나 혹은 예배를 위한 것이 아닌 장소에서 행해졌습니다.

 

예배를 위한 장소들은 교황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시작 초기에는

위클리프가 한동안 리터워스의 교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존 후스 와 제롬, 그리고 사보나롤라 등도

한동안 교회 체제 내에서 복음적 성향을 띤 설교들을 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더 충실하게 깨닫고 전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타락한 교회를 떠나, 다른 장소(옥외, 노천)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시작 단계에 있어서

개혁자들은 아직 그 머리 둘 곳조차 없었을 당시에,

천군과도 같은 일단의 무리들이 노천에서 복음을 선포했고,

목자들과 일반 백성들이, 들판과 거리에서, 복음을 기쁘게 들었습니다.

 

▲영국 전역에는 아직도 “가스펠 오크”라 불리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저 스펄전은, Surrey地名의 오래된 오크 나무 가지들이 널리 퍼져 있는 곳에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옛날 존 녹스가 잉글랜드에 잠시 머물 때에

바로 그 나무 아래에서 설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거친 광야와 외로운 언덕, 그리고 숲 속의 은밀한 곳들이 설교를 위하여 구별되었고,

동굴들과 협곡, 그리고 산꼭대기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아직도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 옛날 그런 곳들에서, 신실한 무리들이 모여서 주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옛날 그런 외딴 곳에서만

설교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순회 설교자들의 강단으로 쓰이지 않은 시장, 장터가 거의 없었습니다.

 

위클리프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 휘하의 전도자들이 온 나라를 누비며,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했습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의회 포고령(1382)은,

두터운 겉옷을 걸친 사람들이 마을마다 다니면서

교회 당국의 면허도 없이 교회당이나 교회의 뜰 혹은 장터나 장날 거리에서

설교를 행하고 있고,

그것이 당시 성직자들에게 상당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신들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군인들이 일반 백성들과 섞여서,

혹시 그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자들이 있을 때에는

칼로 그 설교자들을 지켜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위클리프가 사망한 후, 그의 추종자들도 똑같은 방식(옥외 노천 설교)를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스윈더비 Swinderby 에 대해서는, 특별히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파문당하여 교회나 교회 뜰에서 설교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주교의 멸시를 받는 가운데’ (옥외에서) 설교하였다.

 

도시에서나 시골 각처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는데,

그의 설교를 합법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때보다 오히려 그 숫자가 배나 증가했다.”

 

▲독일을 비롯한 기타 유럽 나라들에서도

종교개혁은, 옥외에서 수많은 무리들에게 전한 설교들을 통해서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루터파 설교자들은 나라를 순회하면서 장터에서나 무덤 가에서는 물론,

산과 들에서도 무리들에게 새로운 도리를 선포하였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고슬라 Goslar 에서는 한 비텐베르크 의 신학생이

라임 나무가 심어진 들에서 설교했는데,

그의 청중들을 가리켜 ‘라임 나무 형제들 Lime Tree Brothren’ 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도비네 (D'Aubigne 프랑스 개신교 역사가)는,

개혁자들이, 아펜젤地名에서는, 교회당을 쓸 수 없어서

들판과 공공 광장에서 설교가 행해졌는데, 아주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산과 들과 언덕들이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 메아리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개혁자 파렐의 생애에서도 우리는 옥외 설교와 관련된 사건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로 그가 메츠에서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교회당 뜰에서 처음 설교했을 때,

그를 반대하던 자들이 교회의 종을 모조리 울려서 시끄럽게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마치 우레와 같아서, 종소리보다 더 크게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뇌샤텔 에서는 “온 마을이 그의 교회당이 되었다. 그는 장터에서,

거리에서, 문앞에서, 집들 앞에서, 광장에서 설교했는데,

그의 설교는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으로 돌아오게 했다.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몰려들었고, 위협으로도, 회유로도,

그들을 돌아가게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와일리 Wylie 박사의 <개신교의 역사>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첫 야외 설교가 1566년 6월 14일에 겐트 근방에서 행해졌다고 전한다.

설교자는 헤르만 모데트 였는데, 그는 과거 수도사였던 사람으로서,

당시 우데나드 (地名)의 개혁파 목회자가 된 사람이었다.

 

교황주의의 한 역사가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공중 앞에서 설교를 감행한 최초의 인물인데,

그가 처음 설교할 때 7천명이 모여서 들었다’고 한다...

 

두 번째 큰 야외 설교는 이듬해 7월 23일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겐트 근방의 큰 들판에 모였다.

 

그 당시에는 (기름부음이 있는) 말씀이 희귀했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기를 정말로 사모하여

이틀 동안이나 계속해서 땅 위에 서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예배를 위하여 운집한 평화로운 무리라기보다는

캠프를 치는 군대의 모습과 비슷했다.

 

예배자들 주위로 마차들을 따라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입구마다 보초들이 지키고 있었다.

마차 위에 두터운 판자로 된 즉석 강단이 세워졌다.

 

모데트가 설교자였고,

그의 주위에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를 들었는데,

그들은 창과 손도끼와 각종 무기들을 옆에 놓고 있었다.

 

집회장 주변에서 망을 보고 있는 보초들이 신호만 하면,

즉시 무기들을 잡을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입구 앞에는 좌판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금서禁書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시골로 들어가는 길가에는, 사람들이 지켜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권유하여 복음을 듣게 만드는 일을 하였다. ..

 

집회가 끝나면 그 무리들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서

거기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캠프를 치고,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렀고,

그리하여 서부 플랑드로 전역을 두루 다녔다.

 

이 집회들에는 언제나 클레몽 마로(人物) 와 테오도어 베자(人物)의 책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된 “다윗의 시편”을 노래로 불렀다.

 

오천 명에서 만 명의 목소리로 히브리 왕의 찬송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나무와 들판을 지나, 먼 거리에서도 들려서,

밭 가는 사람들과 지나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길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정리하면,

종교 개혁에 속한 위대한 설교자들이, 교회당과 집회소에서만 설교했더라면,

과연 종교개혁이 성공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는 순회전도자들과 서적 행상인들과

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넓은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강단을 삼아

말씀을 전했던 그 담대한 사역자들이 없었더라면,

과연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복음을 접하고, 신앙의 도리를 배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의 옥외 노천 설교자들이여,

힘을 내십시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옥외 노천 설교자들은, 매 시대마다 있었고,

오늘은 당신의 차례입니다.

 

 

 

 

※오늘날의 옥외 노천 설교는, '공중 on Air' 에서 행해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