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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도 축복인가?

LNCK 2013. 10. 22. 17:24

 

◈저주도 축복인가?      창49:1~7, 28         출처보기

 

◑본문 설명

 

본문 창49장에 보시면, 그 야곱의 12아들들의 미래가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와 인생의 주체가 본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하나님의 객체로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을 객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 주체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하나님을 떠난 우매한 인간들이

엉뚱한 것으로 위로를 삼고, 행복의 근거로 삼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러한 세상의 위로들이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들의 처참한 현실과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한 때) 경험케 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만을 오롯이 소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복입니다.

 

그리고 그걸 경험케 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바로 축복입니다.

 

따라서 때때로 성도의 삶 속에 들이닥치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나 시험,

혹은 죄인 됨과 불가능함과 무력함의 들킴 등이 축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주제

 

▲오늘 본문을 보시면서 조금 의아해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분명 야곱이 자식들을 축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죽기 전에 아비로서 자식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있단 말입니다.

본문 28절을 보시면, 분명 야곱이 지금 축복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요?

 

(창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그렇지요? 그런데 축복은 축복인데 ‘그들 각 인의 분량대로’ 축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 야곱의 열 두 아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맞기는 한데

각 사람이 맡은 역할이 달랐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중 우리가 오늘 집중적으로 공부할 부분이

첫째 르우벤과 둘째 시므온, 그리고 셋째 레위에 대한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읽어 보셔서 아시겠지만 르우벤과 시므온, 그리고 레위가 받은 축복은

거의 저주에 가깝습니다.

 

▲먼저 르우벤을 향한 야곱의 축복을 보세요.

 

(창49:3-4)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장자 르우벤은 똑똑하고 능력도 있는 사람인데

자신의 서모와 통간을 했기 때문에 으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보았을 때, 마치 지금 야곱이 자기의 명예에 먹칠을 한 큰 아들을

저주하는 것 같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그것이 축복일 수가 없지요?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이 저지른 죄와 실수와 넘어짐을 근거로,

심판을 하시고 저주를 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르우벤과 함께 영원한 저주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신부들로서 끊임없이

이 세상의 신과 간음을 하고 있는 파렴치한 사람들이니까요.

 

성경이 이 저주 같은 예언을 축복이라고 명명하고 있다(:28)는 것을

절대 놓치시면 안 됩니다.

 

이 내용은 단순히 르우벤이 저지른 일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그를 저주하는 그런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저주의 상황이 그렇게 결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인 것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그러면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에게 내려진 축복을 한 번 보지요.

 

(창49:5-7)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 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성을 급습하여, 할례를 받고서 맥을 못 추는

그 성 남자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 성을 약탈해 옵니다.

 

야곱이 바로 그 일을 반추하며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도 축복이랍니다. :28

 

역시 시므온과 레위의 포악함과 성급함으로 인한 저주의 현실이

그렇게 결론지어지지 않을 것임이 전제가 되어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야곱의 세 아들을 향한 ‘저주의 축복’을 보시면서

개혁주의 5대강령의 제일 첫 번째 항목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Total depravity, 인간의 전적 타락 말입니다.

지금 야곱의 세 아들은 바로 전적 타락의 인간들을 모형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가

창49장, 야곱의 열두 아들 축복 사건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시므온 지파는 (위의 예언대로)

나중에 유다 지파에 부속이 되거나, 북쪽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에서도 가장 적은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의 예언대로 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지파도 한 곳에 모여 살지 못하고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지요?

 

그러나 시므온 지파와는 달리, 레위 지파는 제사장으로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축복된 흩어짐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함의 되어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흩어지고, 지리멸렬하게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시므온 지파는 다른 지파에 복속이 되고, 북쪽으로 흩어지는 처지가 되었지요?

그런데 레위지파는 똑같이 흩어지긴 흩어지는데 제사장으로 흩어집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가 되었는데

그 언약이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결론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회복된 레위 지파

 

이스라엘이 시내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 앞에서 패역의 극치를 보여주었을 때, 레위 지파가 한 일이 있어서입니다.

 

(출32:25~28)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으로 출애굽을 한지 50일째 되던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을 오순절이라 하지요?

그 날에 이스라엘의 패역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레위지파가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레위지파는 야곱의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는 것입니다.

 

(출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그렇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꼭 숙지해 놓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레위지파는 '제사장' 지파이지요? 그럼 그 레위지파는 일차적으로 누구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이스라엘의 장남들을 대표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남은 남자를 대표하는 것이고, 남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것이므로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레위지파는 이렇게 이중적 상징을 함의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지파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동시에 그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레위지파가 야곱의 유언에서 저주를 받은 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타락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품어 안고 그 진노를 심판으로 뿌려대는 출애굽기에서의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사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흩어져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이, 그들과 연합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죄와 저주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게 야곱의 저주와 시내산 아래에서의 사건이 품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용서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그런 지파인 것입니다.

 

▲비슷한 경우를, 한 군데 더 봅니다.

민수기 25장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거할 때

그들이 이방 여자인 모압 여자들과 음행에 빠지는 사건이 나오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염병을 내리셔서 이만 사천 명을 죽여 버리십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를 누가 멈추게 합니까?

레위지파, 아론의 손자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를 대신 시행함으로 해서 멈추게 합니다.

그 일로 비느하스의 일가가, 이스라엘 나라에 계속 대대로 제사장 일가가 되는 것입니다.

 

(민25:11~13)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레위지파 제사장 비느하스의 헌신으로 이스라엘에 내려진 저주가 풀립니다.

여기서 비느하스는 참 제사장, 참 레위지파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 제사장, 참 레위 지파는,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의 분을 뿜어내는데

    자신의 몸에 그 저주를 쏟아 부어 자신이 저주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대 제사장이시라는 것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요?

    아울러 예수님이 참 제물이시라는 것도 함께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레위의 저주를 풀기 위해 참 레위 지파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정말 저주받아 죽어야 할 자들을

    하나님의 질투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서 7장에서 10장까지의 내용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로로, 저주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는 것입니다.(벧전2:9)

 

그러니까 저주로 말미암아, 영원한 심판에 처해져야 할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 레위지파가

진정한 레위지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저주의 심판에서 건져지게 되는 구속사의 장엄한 드라마가

그 시므온과 레위를 향한 저주 속에 예시되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김성수 목사)의 설교 준비

 

사족이지만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한편 준비하기 위해

책과 논문, article 들을 거의 40시간 가까이 읽고 연구를 합니다.

 

특히 창세기는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털어, 1장부터 50장까지 흡족하게 강해를 해 놓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 본문이 정해지면, 그것과 연관이 있는 초대 교부들의 저서에서부터

종교 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의 논문들까지 다 뒤져서 거의 40여 편 이상의 논문을 사서 읽습니다.

 

독일의 튀빙겐이나 괴팅겐 신학교, 에즈베리, 커버넌트, 웨스트민스터 등의 건전한 신학교의 도서관이나

국회 도서관 등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확인해 보고 논문을 온라인으로 삽니다.

 

그 가격이 만만치 않아요. 창세기 같은 경우에는 거의 일주일에 800불 이상을

책과 논문을 사는 데에 투자를 했습니다.

거의 한 달이면 3,000 불이 넘는 돈을 설교 자료 구입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고3 수험생처럼 코피가 터지도록 이틀을 꼬박 다 읽습니다.

누가 설교에 원가가 안 들어간다고 합니까? 그건 공부 안하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애를 쓰고도

어떤 때에는 설교 원고 작성에 필요한 단 한 줄도 못 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혹시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인사이트가 있지 않을까하여,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제가 가족들 먹 거리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심지어 크레딧카드 빚이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는 것을 감수하고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분에게 바른 것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들이 책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후배들에게 올바른 강해서를 하나 남겨주고 싶은 열망 때문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낮은 데로 임 하소서’의 작가 이청준 선생이

‘창작은 천형(하늘이 내린 형벌)이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돌아가셨지요?

 

그게 인간의 영혼을 향한 설교일 때는 어떨 것 같으세요?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설교 한 편을 만들어 내는 데에 쏟는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에너지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좀 감안하시고 여러분이 설교를 들어 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수요 예배와 주일 예배의 설교를 준비해서

예배 시간 직전에야 겨우 수정을 다 마치고 탈고를 해서 강대상에 올라와 청중들의 표정을 보면

‘재미있는 얘기나 많이 해 주었으면, 혹은 오늘은 빨리 끝내주려나?’하는 그런 표정들입니다.

그럴 때 설교자는 정말 좌절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러 오실 때에는 그 전날부터 준비를 하고 오셔야 합니다.

나의 영원한 생명과 직결이 되는 거잖아요? 예배 전날에는 잠도 일찍 주무시고,

쾌적하고 깨끗하고 정갈한 마음 밭을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그 전날도 늦게까지 비디오나 보고, 파티나 가고 잠도 못잔 상태에서

예배당에 와서 딴 생각이나 하지 않으면 꾸벅 꾸벅 졸고 있다면

그 사람 머리에 어떻게 이 어려운 설교가 담길 수 있겠습니까?

제발 말씀 앞에서 더 진지해 지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축복 내용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 즉 야곱의 축복이 어떻게 구속사의 과정과

개혁주의의 교리 강령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지를 좀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장자 르우벤과 차자 시므온 그리고 셋째 레위는

아주 처참한 어두움과 죄악과 저주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자 르우벤에게 내린 축복의 내용 중에 ‘그는 위광이 초등하고’라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초등’이라는 말의 뜻은 '드높다'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 힘, 내 정력의 첫 열매라, 너무 우쭐하고 세차구나,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

걷잡을 수 없는 홍수 같아 끝내 맏아들 구실을 하지 못하리라’

 

르우벤은 정력이 대단하고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은 힘이 있고, 지혜가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의 교만이 의붓어머니를 간통하는 음행으로 터져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걷잡을 수 없는 정력으로,

내 힘으로, 내 꾀로 일하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르우벤을 지적하시면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오히려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패역한 죄라는 것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이런 성품이 영웅다울 것입니다.

‘내 힘과 내 지혜로도 나는 얼마든지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며 하나님을 도울 수도 있다’

괜찮은 호기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절대 통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유대주의이며 알미니언 주의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넘쳐나는 힘으로 사는 것이

하늘의 장자다운 모습이라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하늘의 장자는 아버지 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비우고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이 축복받기 전의 심성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세상 적 관점에서의 장자 되는 것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넘치는 정력과 뛰어난 꾀로, 자기의 목적을 성취하는 자로 사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것이며

하나님의 엄위 앞에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주의나 율법주의, 거기에서 파생이 된 성공주의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고지론 등은 르우벤의 범죄인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어떻습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의 잔인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복수에 나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 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심성이 예수님의 마음일까요 아니면 정의로움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분노를 자신의 성질대로 폭발시키는 것은, 사내다움도 아니고 영웅다운 모습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두움이며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죄악 된 특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고,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라’라고

강조하여 명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와 어두움으로 타락한 땅을,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과 은혜로 점령해 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이 이 야곱의 축복 사건을 유심히 잘 정독을 해 보시면

첫째와 둘째와 셋째의 현실,

즉 죄인들의 현실을 하나님이 치고 들어오시는 형국으로 전개가 된다는 것을

금방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잘 보시면, 성경이, 셋째까지의 패역함을 기술한 후에

넷째 유다에게 내리는 축복에서 ‘실로’ 즉 메시아의 도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실로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키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다음 주에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제가 수 백 페이지를 읽고 연구해서, 한 페이지 정도로 요약을 해 놓았습니다.)

 

아무튼 실로는 지명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의 도래를 가리키는 그런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어, 그 저주의 땅을 축복의 땅으로 점령해 내시겠다는 암시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스불론과 여섯째 잇사갈에게 내린 축복을 보면

땅을 차지함으로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일곱째 단과 여덟째 갓에게 내려진 축복에는

심판과 전쟁이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셀에게 내린 축복에서는 추수가 예언이 되어 있고

요셉에게 내린 축복에서는 전생의 승리가,

베냐민에게 내린 축복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전리품을 나누는 것으로 축복이 종결이 됩니다.

 

이렇게 야곱의 축복을 전체적으로 보면 저주와 심판의 땅에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전쟁과 심판을 통하여 승리를 하시고

전리품을 나누어 주시는 것으로 요약이 됩니다.

그게 구속사 아닙니까?

 

그 언약의 현실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달은 자들이, 축복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빠져 나와야 하는 죄악 된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침투해 들어와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 하나님 나라 입성을 위해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 등을 경험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이들이, 바로 축복을 받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게 내려진 저주.. 또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어떤 현실을 살다가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은 자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경험을 할 수도 있는가 하면

(왜? 타락한 인간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것들의 유한성과 포악성과 어두움과 파괴력 등을 경험케 하시기 위해),

 

예수의 십자가 삶을 실제화 하여 살게 되는 유다와 요셉의 삶을 경험하다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각인의 분량대로,

이 세상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곳이 은혜로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그 현실을 감사와 함께 깨닫고 가는 것이 축복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 전체 구속사와 이 역사의 결론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 속에 있는 죄의 정체를 폭로하시기도 하시고,

그들의 포악함을 드러내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빌하를 강간하게 허락하시기도 하시고,

세겜 부족들을 몰살시키게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필연적으로 내어 놓을 수밖에 없는, 그 죄악의 현실을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를 똑바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런데도 너희가 계속 그렇게 이 세상에 뿌리를 박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살겠느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저주도 축복인가?’라고 잡은 것입니다.

네, 그럼요. 이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은 저주받은 인생이야’라고 손가락질 하는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은 삶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오매불망 아이의 대학 입학을 기다려 왔는데

아이가 어처구니없이 대학에 떨어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저주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대학에 실패하고 나서

자신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교만에서 내려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꼭 붙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아이는 너무나 쉽게 일류 대학엘 들어갔습니다.

그 아이는 그 일로 자신에 대한 신뢰가 더 커졌습니다.

‘난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잘 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야’하며 기고만장합니다.

 

둘 중에 어떤 사람이 축복을 받은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겪은 일이 그리 호락호락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고후11:22~27)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때,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이미 결정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축복을 받은 것입니까? 저주를 받은 것입니까?

 

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간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복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가치와 힘의 획득이나, 개선, 진보, 일취월장,

만사형통의 모습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입성으로 성취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저주 받은 사람으로 취급을 합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의 가치와 힘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세계관으로는

그가 절대로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는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지요.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습니다.

자기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가 있겠냐는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제자들은 모두 참수를 당해 죽거나, 돌에 맞아 죽고 유배를 당했습니다.

 

왜 교회를 상징하는 열 두 사도가 모두 그렇게 처참한 꼴을 당해야 합니까?

그들은 복 받은 자들의 전형, 교회의 전형으로 이 세상에 존재했던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왜 복 받은 사도들, 복 받은 교회들이, 이 땅에서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다가 가야 하지요?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까?

 

카타콤 지하 무덤 속에서, 기름 가마 속에서, 맹수의 우리에서 죽어간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애초에 축복과는 상관없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가요?

 

그들은 모두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이 세상의 잔인함과 포악함과 불가능함을 폭로하시고,

또 직접 경험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그렇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완성된 미래를 알고, 그 완성된 미래로 입성을 하는 자들을.. 축복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이 당황스러운 일들을 겪으면서

‘왜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지 않으실까?’하고 하나님을 원망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심을 채워주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지 않도록 지키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시에 그를 ‘서서’ 지켜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에게 날아오는 돌을 막아주지 않으셨을까요?

그게 동행입니까? 그게 지키심인가요?

 

하나님의 지키심은 날아오는 돌로부터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돌이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죽도록 지키시는 지키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숨과 그의 명예와 그의 재산을 지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처참하게 묵사발을 만드시고 그가 끝까지 용서를 견지하고,

사랑을 수호하며, 분노에 지지 않고, 원망으로 무너지지 않게 지키신 것입니다. 그게 지키심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지키심은 환경의 개선이나 상황의 진보나 사건의 형통 등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더욱 견고케 하는 모습으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행복은 마치 알베르트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에 나오는

그 거인이 굴리는 돌과 같아서 굴려 올라가면 또 굴러 내려오고,

또 다시 있는 힘을 다해 굴려 올라가면 또 다시 굴러 내려가는 허무한 것들인 것입니다.

진짜 참 행복 속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것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꾸 우리의 옛사람이 공격당해야 합니다.

 

르우벤의 교만과 음행, 시므온과 레위의 포악함 등이 하나님의 공격에 묵사발이 되고

하나님의 땅으로 점령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여러분의 풀을 죽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기를 살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겪는 일이 여러분, 옛 사람의 풀을 죽이고 있다면

여러분은 축복의 길을 가고 계신 것이 맞습니다.

철장을 들고 여러분에게 달려오시는 예수의 열심이 여러분을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십시오. 제가 올바른 교회와 그릇된 교회의 분별 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그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시고

르우벤이나 시므온이나 레위처럼 여러분의 기가 살아나면.. 그 교회는 그릇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는 티끌에 불과한 존재구나’하고 여러분의 풀이 죽으면.. 그 교회는 올바른 교회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풀죽음은 하늘에 대해 사는 거룩한 풀죽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축복의 삶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치셔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바드 대학 입학을 목표 삼아 살게 하지 마시고, 천국 입학을 목표삼아 살게 하세요.

그게 진짜 부모 된 자로서의 올바른 축복인 것입니다. 아이들을 나의 욕심의 배에서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아이들을 산채로 먹고 내 마음대로 소화를 시키려고 하니까, 소화불량에 걸려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내 마음대로 소화가 안 되지요? 그 아이들을 뱉어 내세요.

그리고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세요. 그게 진짜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산 채로 먹고 자기 마음대로 소화액을 뿌려 소화를 시키는 존재는, 이 세상에 뱀밖에 없습니다.

오직 뱀만 음식을 산채로 먹고 가만히 앉아서 소화를 시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원하노니’하며 하나님마저도 종처럼 부리려 합니다.

아닙니다. 그건 뱀입니다. 그건 마귀입니다. 그게 르우벤이며 시므온이며 레위입니다.

그들을 진정한 승리자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구원이며 축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자꾸 놓아 버려야 합니다.

 

제 교회 후배 중에 한국에서 빈민 목회를 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참 독특한 친구인데 목회를 하다가 6개월간의 안식년을 갖게 되었을 때

전세 돈을 몽땅 빼들고 아이들과 함께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물론 아이들 학교는 모두 휴학을 시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르쳐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6개월간 배낭여행을 하고 돌아 왔을 때,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는 딸에게 인도로 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배낭하나 달랑 메고 세상을 이리 저리 둘러보고 온 고등학생 딸은 흔쾌히 인도의 불편함 속으로 떠났습니다.

 

그 친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딸을

인도에서도 아주 시골인 가난한 작은 마을의 고등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곳에서 가난한 인도의 빈민들과 아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교를 다니며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 모두 불편하고, 지저분한 이웃들과 학우들과 부대끼면서

‘선한 것이 행복’이라는 진리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을 그런 딸에게 장가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부와 명예에 열광하며 명품과 보석에 비굴해 하는 그런 여자 아이들보다,

세상을 넓게 보며 가난도 초라함도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그런 아이와 우리 아이들이 결혼을 할 수 있다면 더 없는 영광으로 여길 것 같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축복으로 물려주세요.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며

‘너희들이 힘겨운 삶을 살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게 된다면

난 기쁘게 그 삶을 축복하겠노라’하고

당당히 자녀들에게 손을 얹었던 그런 부모(야곱)가, 멋진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진짜 축복을 물려주는 진짜 아름다운 부모의 삶, 우리가 먼저 살아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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