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오늘 어디로 끌려가고 계십니까? 고전12:1~3 설교스크랩, 편집
▲뉴턴의 놀라운 <중력의 발견>
1665년과 1666년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할 때에, 캠브리지 대학이 문을 닫습니다.
그때 대학에 연구원으로 있던 아이작 뉴턴이 고향 시골에 내려가서
2년 동안을 지나게 되는데, 이 2년을 사람들은 ‘기적의 해’라고 얘기합니다.
왜 기적의 해냐?
이렇게 연구실에서가 아닌 연구실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서 한가하게 지내는 동안에,
뉴턴이 인류사회에 남을 위대한 발견들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빛이 프리즘 현상을 일으킨다’고 하는 광학이론 등, 여러 원리를 발견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게 <중력의 발견>이에요.
그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중력을 기반으로 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체계화시켜 나가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력이 이게 참 신기한 거예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그야말로 ‘떨어진다’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여러분,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와 지구에서 정반대에 있는 나라입니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질 때와,
우리나라에 대한민국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질 때는
방향이 거꾸로 인 셈입니다.
소위 우리가 상식적으로 느낌 안에서 느끼는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떨어진다’는 말이 맞지를 않지요.
과학적으로 맞는 표현은, 사과가 ‘잡아당겨진다. 끌려간다’입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사과나무도, 아르헨티나에 있는 사과나무도
지구 중심을 향해서, 잡아당겨지고, 끌려가는 겁니다.
끌려가는 것이고 잡아당기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이 우주에는 아래와 위가 없는 겁니다.
이 중력과 관련해서, 성령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령도, 중력과 마찬가지로, 뭔가 끄는 힘, 잡아당기는 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잡아당기고, 주님께로 끌고 가는 일을.. 바로 성령님이 하십니다.
◑성령님은, 중력처럼, 나를 끌어당기십니다.
성령의 임재 때,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증거는 뭔가요?
내게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가장 보편적인 증거는 ‘중력의 발견’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끌려가고 있다>는 걸 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임재의 증거라는 거예요.
끌려가고 있음, 그런 어떤 중력 같은 힘을 느끼고 있지 못한다고 하면,
오늘 내게 성령이 임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나는 그 성령님에 끌려서 살아갑니다.
중력에 끌리듯이 말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내가 아는 것이,
나에게 큰 축복이 됩니다.
중력이 끌지 않는 곳이 없듯이, 성령님이 항상 나를 끌어당기십니다.
혹시 내가 힘겨운 도전을 마주할 때도,
그때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 때’.. 나는 큰 위로를 얻습니다.
나의 능력과 내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내 속에 거주하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도와주십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그 분의 능력이,
세상에 있는 어떤 이보다 크십니다. 요일4:4
성령님이, 나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여, 처리해 나갑니다.
우리는, 그 성령님을 결코 떠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내게 말씀하시고, 그분은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분은 나를 막으시기도 하십니다.
오늘 나는, 어떤 힘에 의해서 끌리고 (잡아당겨지고) 있습니까?
성령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입니까?
◑성령과 반대로 끄는 힘도 있습니다.
고전12: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여기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는 구절에, 주목해 봅시다.
그리고 오늘 일부 신자들의 모습을, 여기에 한 번 대입해 봅니다.
과연 성령님에 의해 끌리지 않고 있는 신자들은,
말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지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좋은 집을 갖고 싶다, 우리 마음이 소원을 하게 됩니다.
근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좋은 집을 소원하지 않고, 대신에 좋은 차를 소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은 작품을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서 훌륭한 사업가가 되고 싶다.
소원이 다 다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못 보고, 고백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요,
다시 말해, 성령의 임재가 임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거예요.
성령님께 끌리기 전에는, 사람들이 자기 소원, 자기 야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재하면서, 사람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소원을 갖는 게 아니라
우리가 끌려가는 것이고, 사로잡힌 것이고, 주님의 노예화가 되어갑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더라도 ‘주님 어디로 갈까요?’ 묻습니다.
주님의 응답이 뚜렷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삽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지 못하면,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끌려가는 겁니까?
세상의 중력, 내면적 중력의 중심부에는 마귀가 있는 걸 봐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돈을 벌 만한 것으로, 명예를 얻을 만한 것으로,
이 세상에서 이룰 꿈과 비전을 갖고 싶어 할 만 한 것으로,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으로, 제시하고.. 우리를 끌어당기는 겁니다.
이 끌어당기는 마귀의 힘의 방향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그게 자식이라도, 그게 가족이라도, 그게 아내이고 남편이라도,
내가 좋아하기 이전에.. 내가 내 육신에 끌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남편에게 끌리는 게 아니고, 아내에게 끌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자식에게 끌리는 게 아니라,
자식 배후에 있는 마귀가 하나님과 반대방향으로
내 마음을 끌어가고 있는 중력(육신)의 작용이라는 겁니다.
◑적용
참 묘합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주는 나의 피난처, 요새, 나의 방패, 나의 바위, 나의 산성’
그런데 이것은 전부 방어적인/수동적인 단어들입니다.
다윗은 왕이거나, 왕이 되기 전에도 수하에 수백의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가 운용할 수 있고, 부릴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힘, 자원, 동원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주님께 이끌립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 요새, 나의 방패, 나의 바위, 나의 산성’에 자석처럼 이끌려버립니다.
자기 뜻을 품고, 웅지를 품고, 영웅다운 비전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간 자가 아닙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 안쪽으로 후퇴해서 피난했습니다. ‘하나님이 피난처이십니다!’
문제를 자기 뜻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항상 도망가서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시다. 방패시다.. 하면서, 해결하려 했습니다.
왕이 되고, 지도자가 되고, 힘이 있을 때,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처럼 언제나 주님께로, 이끌림을 받는,
즉 성령의 임재가 늘 함께 하는, 그런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나중에 다윗에게
많은 용사들이 스스로 나아왔습니다. 다윗을 찾아와서 충성을 다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될 때도, 자기가 면류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나와서, 간곡하게 부탁해서, 왕이 되어준 것입니다.
다윗은 철저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가 되고,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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