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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탄생에는 고통이 따른다 사66:9, 눅22:44 십자가설교 5회
성도가 십자가를 지는 삶이 당연한 이유는, 생명을 탄생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탄생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생명의 탄생이 없다면,
심판대에 하나님 앞에 서서,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 예수를 믿었지만, 생명의 탄생 하나 없었으니까요.
그럼 왜 생명의 탄생이 없었던 것일까요?
살면서 십자가의 고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사66: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임신하게 하시고, 또 아이가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직접 또는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알겠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그 생명의 탄생은, <고통을 반드시 동반>합니다.
즉,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내 주위에 영적 자녀가 태어나지 않는 것은.. 고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약, 오늘 내 주위에 많은 고통이 있다면.. 영적인 자녀가 태어나고 있다는, 신호가 됩니다.
이것이 이 설교문의 주제입니다.
▲우리 기독교 또는 교회에서 하는 일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새롭게 탄생 시키는 일입니다.
육신의 탄생도 중요 하지만, 영혼의 탄생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탄생은, 영원히 그가, 억만년의 세월을 더 사는 것이기 때문에
약 길면 백년을 사는 육신의 탄생보다 훨씬 더 영혼의 탄생이 중요한데요,
육신의 탄생에는, 반드시 산고의 고통을 동반하듯이
영혼의 탄생에도, 반드시 산고의 고통을 동반하며,
내 십자가의 고통(고난)을 통과해야,
영혼의 탄생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에게 십자가의 고통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좋아할 일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거 내가 안 질수록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영혼의 탄생(전도, 구령) 한 명도 없는 사람이, 천국 심판대 앞에서 편안할까요?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한 학생이 산부인과를 하는 친구(의사 아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1층에서 4층은 병원과 입원실이었고, 5층은 살림집으로 꾸며진 곳이었습니다.
그가 5층 친구의 집에, 잠시 한 시간 머무르는 동안
그는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산모들의 비명소리를 쉴새 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입원한 수십 명의 산모들 가운데, 적어도 서너 명은 진통을 하니까
그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병원에 콘크리트 벽으로만 되어있어서, 방음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공명이 되어서, 그 비명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서둘러 산부인과 병원을 빠져나오면서
혼잣말을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생지옥이 따로 없구만!’
그랬습니다. 생명이 탄생되는 곳에는 그저 웃음만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생살을 찢는 듯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생명의 탄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말씀처럼,
오늘 여러분이 정말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
또는 ‘정말 울고 싶다’ .. 이런 마음이 들면, 기대하시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고난 뒤에는, 반드시 생명의 탄생의 기쁨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만,
때가 되면, 회개하고 거듭나는 체험, 새 생명의 탄생을 체험하게 됩니다.
(radical conversion이란 말을 쓰는데요.)
쉽게 지적 동의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사람이,
성령의 변화의 역사로, 한 번 뒤집히는 때가 있는데요..
요한복음 3: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셨죠.
여기서 ‘물’은, 말씀을 뜻합니다.
엡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에서 ‘성령’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원해서 거듭 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성령으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변화 시켜 주셔야,
그 사람의 본성을, 죽은 생명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변화 시켜 주셔야 된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입니다.
(하나님이 다 예정하시고, 택하셨지만)
‘물’은.. 자기가 해야 되는 거예요.
물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연구하고, 전도를 받든지,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쪽에서 해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의 심령과 영혼을 확 변화시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radical conversion’ 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회심시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보통의 경우에 회개를 동반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 내가 죄인이지’ 하는 단순한 회개가 아니라,
마치 땅바닥을 뒹굴며 하는 듯한,
그것도 회개의 시간이 일 분만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며칠을 두고 회개를 하는 것이 동반되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이 설교의 포인트는,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탄생하는 그 순간에는
“큰 고통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처절하게 회개하는 그 자체가 고통이지요.
요지는, 자기 자신이 고통을 당하든지
아니면 그를 위해서 타인이 고통을 당하든지,
그를 위해 기도를 해 주는 고통을 당하든지
그 영혼을 위해 계속 전도를 하든지,
그가 깨닫지도 못하는 말씀을, 계속 가르치든지,
“생명의 탄생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통 후에, 생명의 탄생,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생명의 탄생에는 고통이 따른다.. 이것은, 자연 법칙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십자가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오늘 내 주위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만약에 생명의 탄생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생명의 탄생’이 뭐라고 했죠?
중생의 역사,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거기에는 고통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고통의 대가를 치루지 않았다..
누군가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지금 당신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이 흐르는 만큼의 고통을 당하고 있고,
(체면상 대놓고 울 수는 없지만) 울고 싶은 정도로 마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오늘 십자가를 지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곧 생명의 탄생, 영혼의 중생이 일어날 것이므로
슬픔 가운데,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에 ‘웃으셨다’고 상상하는 분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결과를 내다볼 때,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겟습니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십자가
▲그런데 우리가 읽은 본문 이사야서 66장9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도권 initiative 을 쥐시고
하나님이 임신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또 해산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주어와 주체가 “내가”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종들로 하여금, 임신하게 하시고, 해산하게 하시고.
즉 해산의 고통을 겪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래 잉태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산고의 진통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해산의 고통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십자가를 강권적으로 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산모가 애를 낳다가 중단하면, 큰일이 일어난다고 하지요?
산모나 태아의 생명이 위험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애를 낳다가 중단하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
임신케 되는 역사, 해산의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사람만이,
자기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 받는 그러한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를 낳다가, 중단케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종들도, 십자가를 지다가, 중단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중단하면 더 위험하다니까요.
(그런데 자기가 끝까지 불순종하면 가룟 유다처럼 되겠지요.)
▲이러한 산고의 고통을 치르신 대표적인 분이신 예수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22장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이 단락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실 때,
그분의 기도의 중얼거림 속에, (2천년 후의) 내가 그 기도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기도하실 때,
그분이 바라보는 환상가운데는, 2천년 후에 내가 거기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모든 인류가 거기에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은 그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 먼 훗날을 꿈꾸듯 바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실 때, 모든 인류가 구원받는 꿈을 바라보신 것입니다.
주님 계신 천국에,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그 행복한 날을 꿈꾸시면서
그 모진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기꺼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최후의 기도는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고통과 십자가 수난도
바로 나의 구원을 위해, 견디시고 참으시고 당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시면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내 마음이 슬픔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같이 기도 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기도 하시면서
저 천국에 내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습만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또 예수님은 지옥 구덩이에서 신음하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 아무개를, 또 인류 모두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하는데
아니면 저들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인데..
그 두 가지 모습을 교차적으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기도 하시면서
바라 보셨다는 것입니다.
내 고통을 바라 보셨습니다.
내 영원한 지옥에서부터, 그 뜨거운 불로부터 고통당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시니까
예수님은 그 험한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우리를 임신케 하시고 또 해산케 하시는 그러한 길을 가게 하실 적에
우리가, 예수님만큼은 아닐지라도, 영혼들의 구원을 생각하고
영혼들이 영벌에 처할 상황을 내다보며,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갈 수 있는 하나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영혼들이 구원 받는 역사가 내 주변에서 일어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PKH typ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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