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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영광 요12:23, 17:1 십자가 설교 시리즈 7회
*부제 : 십자가를 구합시다
요12: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십자가’는 죽는 것인데, ‘영광’이라는 말과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모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코 앞에 앞두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던
그 예루살렘 성 바로 앞에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시면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다시 말하면 ‘인자가 십자가를 질 때가 왔도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를
고난으로만 이해하지 않으시고, 영광으로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얻는 그 부활에도 당연히 영광이 있지만
십자가를 지는 그 고난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요.
십자가 고난이 있는 곳에.. 거룩한 영광이 함께 깃들이며,
십자가 고난이 없이 얻는 영광은.. 참 영광이 아닙니다. 세상 영광입니다.
▲자 지금 너나 나나 ‘한국 교회에 영광이 사라졌다.’라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30년 전, 5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한국의 교회들은, 건물도 다 커졌고, 교회 차도 좋아졌고,
교회 예산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지방 중소도시에 가보더라도, 도시마다 크게 지어진 교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모로 보나, 저모로 보나, 과거보다는 다 잘 된 것 같은데,
아니 ‘한국 교회에 영광이 사라졌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그 과거에 작고 볼품없었던 교회에는, 영광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네. 그 작고 볼품없고 가난한 그 교회에 ‘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광이 있었다’는 거죠.
그건 바로, ‘십자가 고난 뒤에 따르는 영광’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중국과 북한 국경지역에서,
그 탈북자들을 섬기는 선교사들의 삶..
그들은 탈북자들과 비슷하게 헐벗고, 탈북자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함께 쫓기는(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오는 영광,
그 희생의 삶에서 오는 영광,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십자가의 영광>과 비슷한 것입니다.
정말 고생하고, 힘들게 고통을 당하는데,
거기엔 어떤 거룩한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달동네에서 가난한 아이들을 봉사로 가르치던 대학생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야학’인데, 성경과 예배로 함께 가르치던 빈민사역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날, 제가 한 번 방문해 보니,
그 젊은 선생님들의 얼굴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습니다.
추우니까 난로를 피우고, 그 안에 나무나 조개탄 같은 땔감을 넣는 과정에서
그을음이 위로 올라와서, 예쁜 선생님의 얼굴이 새카맣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자기는, 그것도 모른 채, 가르침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월급을 주는 일도 아니요, 누가 상장을 주는 일도 아닌데,
오직 달동네 아이들이 불쌍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고생을 하는 모습을 볼 때,
바로 거기에 ‘십자가의 영광’이 환하게 나타나는 거죠.
그을음이 묻어서, 시커멓게 된 얼굴 속에, 성령의 빛과 영광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40년~70년 전에, 한국의 교회들이 정말 가난했고,
땔감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사례비도 턱없이 부족했고,
거기서 사역자들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면서,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눈물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간 그들의 삶은,
보통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저게 뭐하는 건가, 저 젊은 사람이 정말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그들을 무시하고 멸시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동전 이면에는, 거기에 영광이 서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고생, 그 고난, 그 십자가의 길
거기에는 세상에는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십자가의 영광,
그게 서려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사역자들을 무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사역자들을 존경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 영광이 사라졌다’는 말은,
웬만하면 신자들이, 또는 교회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고생되는 일은 피해서 가고, 힘든 일은 거부하고,
자기에게 손해되는 일은 일절 안 하고.. 그러니까 자연히 ‘영광’이 사라져 버린 거죠.
‘십자가 지는 일’이 없는데, 만약 ‘영광’이 있다면.. 그것은 세속적 영광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세속적 영광’은 제법 있고,
또 그걸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 그걸 동경하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영광’은.. 있기는 하지만, 대단히 희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광’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채찍에 내리쳐질 때에
얼마나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비참하고
세상에 구경거리(스펙터클)같이 된 그러한 비참한 모습이죠.
완전히 세상에서 제일 실패한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
‘거기에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자기 죄를 위해서 그렇게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구하기 위해서,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그 숭고한 고난의 길을 가셨을 적에.. ‘영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시고”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셨다고 칩시다.
그럴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가정해서
예수님께서 황제같은 왕으로서, 불 말과, 불 수레와, 천군천사를 대동하시고
영광스럽게 이 땅에 내려오셔서 “고난 없이”
왕으로서 일평생 사시면서, 십자가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셨다... 그래서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가정할 때,
거기에 영광이 있었을까요? (없습니다.)
‘십자가 영광’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자기와 관련 없는 타인의) 구원, 죄인의 (not 의인의) 구원,
나(원수의)의 구원 이라는.. 그 고귀한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이 모진 고통을 받으시고, 모진 학대를 받으시고
모진 가난을 겪으시고, 모진 아픔과 고통을 겪으시는
그 죄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그 길을 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는 영광이었다. 예수님은 영광의 길을 가셨다.” 라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국 교회에 영광이 사라졌다’고 말 할 적에
(그 말의 의미는 각자가 해석하는 바에 따라서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뜻인 것 같아요.
뭐 이렇게 좀 사역이 커지고, 선교단체가 커지고, 이렇게 외적으로 성장은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영적인 지도자들이
뭔가 희생하고, 자기 살을 깎는 희생,
예를 들면, 그 차가운 방에서 막 고통을 받으면서 땔감이 없어서 오들오들 떨면서
그런 가운데서 그러한 ‘십자가의 부흥’을 이룬 것이 아니라,
꼭 물질적으로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명예나 다른 그런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사역자들이 진리를 위해 고생하다가 (일제시대처럼) 감옥에 갔다와가지고,
그런 식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막 이렇게 고생 하신 분들도 아니고,
또 어떤 분은 순교를 통해서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목사님처럼)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 것도 아니고,
나름 다들 고생하고, 희생하고, 헌신한 면면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만약에 그것이 ‘십자가 고난’없이 이룬 외적 성장이라면,
지금 우리가 ‘영광 없는 전성기’를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십자가 영광’이 나타난 적도 있었습니다.
2007년도에 아프간에서 순교하신 배형규 목사님, 심성민 형제님,
이러한 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영광이 한때 회복된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의 순교가, <한국 선교 역사>에 굉장히 값진 공헌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왜냐면 2007년 아프간 순교 이전의 한국교회 해외 선교와
그 이후의 한국교회 해외 선교가 나누어지고, 달라지는 분기점(터닝포인트)이
두 분의 순교가 되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합니다.
2007년도에 한국 교회 부흥을 위해서 ‘again 1907’이란 슬로건을 내 걸고,
그 2~3년 전부터 계속 기도하고, 1년 전인 2006년에는 릴레이 기도도 하고
이렇게 2007년의 부흥의 재현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는데,
2007년도에 그 수 백 만의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게 뭐냐,
2007년 7월 말, 두 분의 순교였습니다. (그 외는 아무 것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 해석이 맞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그 두 분의 그 고귀한 희생을 통해서,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한국 교회 해외 선교가 방향이 달라지고 물줄기가 바꾸어 졌다면,
(양적인 선교에서, 질적인 선교로 바뀌어졌다고 합니다. ‘나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경각심도 갖게 되었고요.)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교였다, 영광스러운 십자가였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다시 정리합니다.
‘한국 교회에 영광이 사라졌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뭔가 이렇게 커지고, 이렇게 성장하고, 뭔가 이렇게 외형적으로 잘된 것 같았는데
그 과정에서 십자가를 지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견디고,
고난 받고, 고통의 길, 가시밭길을 간 그런 사람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간 그러한 분들이 계실 것이고,
또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십자가의 길, 그러한 길들이 있을 거에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렇게 보니까
뭔가 좀 쉽게, 쉽게,
또는 세상적인 영광, 영광,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뭔가 외형적으로 잘된 것 같은데, 뭔가 성취된 것처럼 보이는데,
‘거기에 십자가의 영광이 드러났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면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에 한때 유행했던 ‘교회성장’ 열풍,
과거에 활발했던 ‘건축을 통한 성장’
또는 귀에 솔깃한 ‘기복적 메시지’
그런 몇 가지 성장 요인들 가운데, ‘십자가의 영광’은 없었던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걸 가르친 사람도 없었고, 그걸 구하러 좇아간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금, 뒤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십자가의 영광’을 구하자는 겁니다. ←설교의 주제 및 제목
▲과거에 50년 전에는, 너무 찢어질듯이 가난하고,
너무 고난의 길이요, 가시밭 길이였지만,
거기 뭐 아무 볼 것 도 없고, 완전히 생고생 하는 것 같고,
정말 아까운 사역자들이, 자기의 소중한 젊음과 인생을 허비하는 것 같았지만,
그 분들의 희생의 삶에는,
그 분들의 얼굴에는, 그 분들의 가시밭 길에는,
‘아 저것은 영광스러운 삶이었다. 저 분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다.
저 삶은 영광스러운 희생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체는 아니더라도
자 그래서 우리는, 지금 늦더라도 다시
‘십자가를 구하자. 그러한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가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일부 신학생들이
큰 교회 목회자가 되어서, 자기가 유명해지려고 신학교에 지망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도 십자가의 영광을 기도로 구하셨습니다. 오늘의 요절이 되겠습니다.
요17:1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도로 구하셨어요.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인데,
1절에 시작부터,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한 영광을 기도로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영광이 아니라
호의호식하고, 좀 더 부유하고,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세상 적으로 잘 되고,
냉장고도 더 큰 것으로 바꾸고.. 이렇게 사는 것을 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할지라도, ‘십자가의 영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의 본능이지, 십자가 복음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에 호소하는 설교자들은, ‘십자가의 원수’일 수 있습니다.)
▲마치는 말
내가 뭐 십자가 목걸이를, 큼지막하게 나무로 깎아서 목에 걸고 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십자가’라는 말을 내 입에 늘 달고 다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삶이 십자가의 삶이 될 적에, 거기에는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치스럽고, 고생스럽고, 환란이 많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정말 자기 자녀들마저도 ‘엄마 아빠, 왜 그래요? or 엄마. 우리 아빠는 이상해졌어요.
or 나는 우리 집에 태어난 것을 불행하게 생각해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영광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분란이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 어머니까지,
자기 아들이 가는 길을, 딸이 가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 우리가 애를 잘 못 키웠다. 왜 저렇게 우리 아들은 출세도 못하고,
우리 딸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느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자기가, 하나님 부르신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거기에
‘역설적인 영광’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에는,
완전히 고생만 있고, 환난만 있고, 핍박만 있고, 조롱만 있는 것은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그 이면에는
십자가에서 오는 하늘의 영광, 성령의 위로,
세상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떠한 영적인 영광이,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처럼
십자가를 기도로 구하는 그러한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세상 구원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오해하는 것이,
‘뭔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인생 역전이 일어나야 되고,
예수님이 부르신 그 길을 걸어가게 되면, 내가 뭐 부자가 돼야 되고,
내가 뭔가 지금은 고생하며 살더라도, 나중에 10년 후에는
내가 은행에 잔고를 두둑이 넣고 살겠지..’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은, 대형 승용차 타는 그런 영광이 아니고,
십자가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고생스럽고, 환난이 많고,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러한 거룩한 영광, 하늘이 주시는 위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정.
그런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우리가 잃지 않고, 계속 누리고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니 뭐 세상에 얼마나 보여줄 것이 없으면 (이게 다 부러워서 하는 말입니다만),
얼마나 보여줄 것이 없으면, 목회자가 자기 돈 자랑을 합니까.
얼마나 보여줄 것이 없으면, 목회자가 자기 아파트 평수를 자랑합니까.
(다 이게 질투심이 나서 하는 말이겠지만) 뭐 돈 많으면 좋고, 아파트 평수가 크면 좋고,
자기가 한 달에 쓸 수 있는 판공비가 수백만 원 이상 되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게 부러운 것 이긴 하지만
거기에 성경이 말씀하는 십자가의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도 없고요.
▲성 프란시스도 두 가지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주 예수님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내려주십시오.
첫째 제 영혼과 육체의 고통을 겪어서 당신의 십자가 고난을 맛보게 허락하옵소서.
두 번째,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참으셨던 일,
그 불타는 사랑을 제가 간직하게 하옵소서.”
성 프란시스도 <십자가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 그것을 구하는 기도, 그러니까 그가 큰 부자가 아니었지만
성 프란시스가 13세기경의 사람인데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약 200년 전에,
역사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그 당시의 유럽을 구했다, 중세 기독교를 구했다,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월남에서 한 군목 목사님의 간증에 의하면
자기가 이제 사단 연병장에서, 단상 뒷쪽에 의자가 놓여있고
그 의자에는 군 간부들이 앉아있죠.
그런데 자기가 답답했던 것이 무슨 시상식을 할 적에
군목 목사인 자기는, 한 번도 나가서 메달을 받아보거나, 훈장을 받아 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뭐 그도 그럴 것이 맞는 말이지요. 자기는 한 번도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거나
실전에 배치되어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태로운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방에 실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자기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러한 위험한 그 길을 갔지만,
거기엔 (훈장의) 영광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환 했을 적에는, 그들에게 훈장이 주어지고
그들에게 상이 주어지고, 그들에게 박수갈채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설교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그들이 후방에 돌아와서, ‘상’을 받아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전방에서 고생하는 ‘그 고생자체’가 영광이었다, 그러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 성도님들도 마찬가지고, 사역자들마저도
‘아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를 하고,
또 선교 단체에서 간사로 5년 ~ 10년을 봉사했으니까
하나님이 이제는 뭔가 나에게 무슨 돈벼락을 쳐 주시겠지, 대박 나게 해주시겠지
아니면 우리 자녀라도 이렇게 인생 역전을 하게 해 주시겠지.’
그러한 것은 (뭐 그렇게 되는 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거기에 세상 영광이 있을지는 몰라도, 세상 적으로 부러운 것이 있을지는 몰라도,
‘십자가의 영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유하게 되면서
점점 십자가의 영광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주의 종 들은, 세상 영광을 자랑해서는 안 되고
세상 영광을 자기가 누린다 하더라도, 그걸 지혜롭게 숨겨야 돼요.
그것을 못 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정말 십자가의 영광을, 그 고난의 길 가운데, 그 고통의 길을
참고 꿋꿋하게 계속 인내하면서 가는 그 것 자체가
그 이면이 바로 영광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못 알아보지만
그 중에서도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사도바울이, 살아계실 때도 다 마찬가지였죠.
그게 영광이라고 알아본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후대에 가서 ‘아 그것이 영광이었다’ 라고
다 이렇게 인정을 하고 있는 거죠.
이러한 길을 오늘날 우리가 가서,
우리가 영원한 인생의 관점에서
오늘 하루를 가치 있고 보람되고 영광스럽게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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