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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버려짐의 진리 ✝13

LNCK 2014. 1. 18. 10:05

버려짐의 진리 / 십자가 설교 모음 - YouTube

◈버려짐의 진리          사53:3              십자가 시리즈 13회            출처보기

 

십자가의 길은, '버려지는 길'인데, 2가지 방면의 버려짐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서, 타의에 의해, 혼자 고독한 시간을 갖는 그런 시간도 있고

-또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고독한 시간을 갖는, 자발적인 버려짐이 있습니다... 

 

▶이사야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저 사람 끔찍하다. 보기 싫다.’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길’이란 무슨 길이냐.. 사람들에게 이렇게 싫어 버려지는 그 길을

꿋꿋이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목회자, 영적 지도자의 길을 걷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칭송하고 따르고 그렇게 하면,

예수님은 그것은 옛적에 거짓 선지자들이 그러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 버려지는 기간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버려졌고요.

그 다음 다윗, 요셉, 예레미아, 엘리아, 모든 신앙의 영적 지도자들이

다 버려지는 시간을 기꺼이 감당했던 것을 봅니다.

 

▶이 버려짐을 통해서 얻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버리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바로 ‘버려짐을 당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언제든지 버려짐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 버려짐을 당하는 그 사실을 그냥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되겠어요.

 

노인이 되어서, 자녀들에게 버림 받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 있기 바랍니다.

그 버림 받는 시간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여담입니다. 1970년대에 비틀즈의 영향으로 한국에 ‘장발’이 유행했습니다.

남자들이 다 머리를 길렀습니다.

 

장발로 머리를 기르는 것을

처음에 기독교 교회 강단에서 막 장발을 비판했습니다.

‘요즘 교인들이 세속화 되었다’ 어떻게 남자들이 머리를 단정하게 단발로 하고 다녀야지

장발을 하고 다니느냐고.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마다, 그렇게 장발에 대해서 막 비판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한 2년 지나서, 그 목사님 자기도 이제는 장발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장발을 하는데, 자기 혼자 머리를 단발로 깎아서 짧게 해서 다니니까

완전히 자기가 버려짐을 당하는 것 같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자기가 장발을 하니까, 좀 미안 하더라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가 한 2년 전에 그렇게 막 ‘장발이 세속화 된, 타락한 신앙’이라고

강단에서 몇 번이나 강력하게 설교를 했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너무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고.. 이렇게 말 하는 것을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설교 시리즈’ 이런 것들을 듣다보면

나와 맞지 않는 신앙이고,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한 극단적인 내용이다..

라는 것을 접할 때가 있을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조금 기다려보면 됩니다.

지금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해서 그렇지,

조금 지나면 그 과정들을 경험할 때가 올 수 있을 것이에요.

 

저는 여기서 시중의 여러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합해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는데

특별히 암 환자 라든지, 사형선고를 한 번 받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설교는

일반인으로서 받아들이기는 굉장히 쉽지 않은 면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유는, ‘자기는 그 죽음 직전의 경지까지 가보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죽음의 경지.

그래서 뭐 자기 옷가지 다 정리하고, 자기 유서 쓰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가 죽는다고 자기 주변 물품 다 정리 한 그 사람이 대하는 기독교 신앙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하고.. (같은 기독교 신앙이지만) 이게 완전히 다릅니다.

 

많은 환란을 겪고,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사람과,

그냥 보통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과.. 신앙과, 생각과, 관점이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냐.. 를 선택해야 합니다.)

 

어쨌든 여담이지만, 여러분들이 들으시는 가운데에서

‘이것은 내가 듣기에 조금 거북하다’ 라는 내용이 나올 때에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사실을, 한번 여러분들이 생각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일생에 버려지심을 당하셨는가’

하는 것은, 원래 설교 출처의 텍스트 click 를 읽어보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싫어 버려짐을 당하는 것이 너희의 사역이다.’

 

그리고 그 길을 예수님이 몸소 먼저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그 길은

‘사람들에게 싫어 버려짐을 당하는’ 그 길을 반드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싫어 버려짐을 당한 것은

뭐 바리새인 서기관들로부터 싫어 버려짐을 당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고요.

또 나중에는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 까지도 자기를 버렸잖아요.

 

그래서 제자 양육을 많이 하신 분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참 제자를 키우려면, 반드시 저 제자가 한번 이렇게 베드로처럼

자기를 배신하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 온 그 사람이 참 제자가 된다.

탕자처럼 다시 돌아온 사람. (나가서 안 돌아오는 사람도 있지요.)

 

예수님께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 분이 다른 곳에 가서 잘 믿고 봉사하면 참 다행이고요.

 

그러나 자기를 싫어 버리고, 얼굴을 돌리고, 등을 돌리고 떠나갈 적에

자기 마음에 안타깝고, 큰 상처를 받고, 참 쉽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을 견디고, 인내하고, 그것을 끝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 할 적에..

 

그가 나중에는 돌이키고 돌아와서, 정말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훌륭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그러한 경우를 우리가 볼 수 있음으로

‘버려지는 것’을 일상적으로, 평소에 있는 일로 여기고,

밥 먹듯이 당하는 일로 여기고, 너무 상처받고 상심하고 낙심하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버릴 적에는, 우리도 십자가에 예수님처럼 기도하면 됩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도, 하나님께 버려짐을 당하는 것을, 기꺼이 감내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일부 사람들에게 버려짐을 당하는 것을

‘그냥 아버지의 뜻’으로, ‘아버지께서 허락하셔서, 그렇게 된 일로’

즉 ‘아버지께서 나를 잠시 버림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버려짐을 각오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버려짐이다.’

이것을 '십자가 카테고리'로 분류를 한다면 <자기 부인의 십자가>가 되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는데,

자기를 부인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 중에 한 가지는,

<버려짐을 당하는 것을 꿋꿋이 참는> 것입니다.

 

▶폴 워셔 목사 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온 것을 기억합니다.

폴 워셔 목사님이 젊은 청년 때, 소명을 받고서, 이제 신학교를 가기 전에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제 신학교에 가서 주의 종이 되려고 합니다.

제게 꼭 필요한 말을 한 마디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 선배 존경하는 목사님은, 폴 워셔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너는 기꺼이 골방에서 혼자 있을 수 있느냐?

네가 골방에서 혼자 있을 수 없으면, 너는 주의 종의 길을 가지 말라.

네가 기꺼이 골방에서 혼자 있을 수 있으면, 너는 주의 종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런 멘토링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네가 하나님과 독대하는 그런 신앙을 가졌으면, 너는 주의 종으로 준비된 것이다’

‘네가 주의 종의 길을 갈 때, 앞으로 난제를 만날 때마다, 너는 하나님과 독대의 자리로 들어가라’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폴 워셔 목사는 이렇게 말 하더라고요.

‘차라리 수련회 가지 말고, 자기 혼자서 골방에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수련회에 가야되죠. 진짜로 수련회에 가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그 말의 의미는,

 

‘수련회 가서 3박4일 동안 계속 너무 말을 많이 하고, 너무 많이 사람을 만나고, 먹고,

그렇게 하는 것 보다,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어떤 면에서 3박4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하나님하고만 독대하는 그런 시간이

영적 지도자들에겐 더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둘 다 필요한데요, 오늘날 수련회/세미나/컨퍼런스에 가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말을 하거나 듣고,

그래서 수련회의 원래 목적인 ‘영성 회복’이 오히려 더 안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도, 그게 문화니까

수련회/세미나/컨퍼런스에 가서 100명 중에 90명은, 그냥 동창들 만나서 교제만 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기간 동안, 차라리 자기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독대하는 그런 사람들은, 오늘날 대단히 찾아보기 힘들다.. 라는 것입니다.

 

이건 사람들에게 ‘버려짐’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일정 기간, 떠나는 것이죠. 하나님과만 만나기 위해서요.

 

▶우리는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공동체에 무슨 일이 있고 흔들릴 때마다,

지도자가 가장 찾아야 되는 길은,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 밖에 안 되고,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자꾸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인간적으로 그 막힌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했을 적에

도리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질질 끄는 그런 것을 봅니다.

 

▶사실 제가 굉장히 조심하는 것입니다만, 친구랑 만나서 대화를 두 세 시간 길게 하고 나면,

영성이 확 떨어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야 되고, 또 대화도 해야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외롭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화도 너무 오래 하면요. 영성이 떨어집니다.

뭐 성경 말씀을 읽어도.. 말씀이 눈에 안 들어오고,

기도 하려고 해도.. 기도가 잘 안 됩니다. (너무 세상적인 말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카카오톡도 잠시, 잠시 하는 것이지,

한 시간 이상 카카오톡 한다고 문자를 보내고, 문자를 받고

그렇게 하다가는 자기 영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성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설교 말씀을 들어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성경 말씀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갈 길은

사람들에게 버려짐을 당하는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게 십자가의 길이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어서, 자기 혼자 고독한 시간을 갖는 그런 시간도 있고

-또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고독한 시간을 갖는

그러한 자의와/타의의 ‘두 가지 방면의 길’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핍박하고 반대해서 미움을 받아서, 억지로, 타의로

  할 수 없이 가게 되는 그러한 고독한 '버려짐의 길'이 있고

-또한 자기 믿음 생활과 자기 경건 생활을 위해서

  자기 스스로 독방으로 골방으로 들어가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독대해야 하는

  그러한 자의적 '버려짐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듣는 말이지만

사실 주일날 설교 한번 잘 하려면, 하루에 4~5시간 정도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서 한번 하는 설교가,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설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못하고, 늘 주중에 사람을 많이 만나고,

늘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그렇게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메시지를 전할 적에는,

그 설교하는 시간의 그 메시지가,

평소에 식당에서 사람들하고 하는 이야기(메시지)와.. 별반 차이가 없더라는 겁니다.

 

설교자가 주일날 설교를 권위 있게 하려면

식당에서 말 하는 시간을 좀 줄여야 하는 것입니다.

강단의 설교가,

커피숍에서, 사무실에서 대화하는 말과, 별로 차이가 없다면.. 큰 일이지요.

 

그것도 넓게 보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이죠.

외로운 길, 고독한 길, 버려지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수녀의 신앙수필을 읽어보면, ‘분심’ 이라는 말을 씁니다.

‘분주한 마음’이란 뜻이죠.

 

그들은 ‘분심’을 굉장히 조심합니다.

너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사람들과 너무 많이 대화하다보면,

자기에게 ‘분심’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이렇게 분주해지고, 산만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산만해서, 그 성경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십자가의 길’은 뭐냐,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는 그 고독한 길을 가는’ 것인데,

 

조금 더 확장하면, 사람들이 나를 싫어 버리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고독한 길을 가는 그 시간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영적 지도자가 말씀의 권위로,

영적인 파워로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자기 혼자 골방에서 하나님과만 독대하는 시간이

적어도 네 시간, 다섯 시간은 하루에 있어야.. 그 메시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싫어 버림받을 적에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 때는 ‘내가 십자가의 길, 버려짐을 길을 가는구나’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과만 독대하고,

자기 혼자 골방에서 그 기간이 지나갈 때까지 기도하며 지내야지,

 

자기편을 모아서, 자기를 싫어하고 자기를 등 돌리고,

자기에게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배제해 버리고 어떤 일을 수행할 적에

 

성숙하지 못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지도자가 되기 때문에

 

거기서는 아무런 선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것을 명심하면서

저와 여러분이 <버려짐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인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