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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가 빠진 말씀사역, 성령사역의 위험성

LNCK 2014. 1. 16. 11:37

 

 

◈십자가가 빠진 말씀사역, 성령사역의 위험성         갈3:1~6           

 

‘말씀의 역사’가 놀라운 것이고 ‘성령의 역사’가 굉장히 놀라운 것이지만

거기에 십자가 신앙이 빠져있으면,

‘말씀의 역사’라도 위험하고, ‘성령의 역사’라도 곁길로 빠지기 쉽다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갈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십자가’가 빠진 말씀 사역의 위험성

 

▶여기서 보면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유혹하더냐?’

 

원래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진 것이, 사도바울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세워졌는데

나중에 유대교 교사들이 와서, 다시 유대교 율법으로 되돌아가자 라고,

구약성경을 토대로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을 적에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할례를 받고, 유월절과 기타 절기를 지키는

그러한 유대교 신앙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을 적에

사도바울의 책망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뺀 그것’이, 즉 유대교 율법주의가 참 복음이냐,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 유대교에 그 말씀 해석, 율법 해석이

뭐 신명기 해석이라든지, 또 레위기 해석이라든지

이런 것이 아무리 심오하고 깊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엉뚱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미혹을 받은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래서 ‘말씀, 말씀’ 하더라도 (얼마나 말씀과 설교를 강조합니까)

십자가 신앙이 빠진 그런 말씀의 역사, 그런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 꼭 구약의 그 유대교식의 설교를 하지 않더라도

뭐 세상 지혜로든지, 아니면 어떻게 자기가 책을 많이 읽고, 말씀을 잘 깨달아서

설교를 아주 웅변적으로 하던지, 논리 있고 조리 있게 하던지,

또 재미있게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만약 거기 그 설교의 근본 바탕에, 십자가 신앙이 빠진 것이라면

‘아무리 말씀, 말씀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십자가 시리즈 9회 click’에서 살펴보았지만

구약도 십자가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기록되어져 있고, 그 예언과 성취의 기록이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가운데, 말씀을 잘 해석하고, 강해설교를 잘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해석, 강해설교가.. 십자가 신앙 중심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아무리 ‘말씀, 말씀’하며 ‘말씀중심 신앙’을 강조하더라도, 헛다리 짚는 것입니다.

 

▶꼭 모든 설교마다 ‘십자가’라는 말을 써야 된다는 뜻은 아니고요.

꼭 ‘십자가’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십자가 신앙’이 근본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은, ‘십자가 신앙’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거기에는 ‘십자가’라는 말이, 한 마디도 들어가 있지 않지만,

그것은 ‘십자가 신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근본적으로 말씀 사역도, 십자가 신앙 중심적인 말씀사역이 되어야지,

십자가 신앙에서 떠나서, 다른 주제 중심의 말씀 사역,

또는 사람들에게 의욕을 주고, 삶의 용기를 주고

낙심한 사람들의 기분을 북돋아주고, 사기를 업 up 하게 만드는 그러한 말씀은,

 

그것이 아무리 기가 막힌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원래 복음에서 빗나간 것이요,

갈라디아 교인들의 전철을 밟게 된다는 것입니다.

 

강이나 바다를 보면, 표면의 물결은, 바람이 부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밑에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또는 해류는, 정해진 방향으로 흐릅니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 신앙’이, 말씀 사역의 근본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수면 밑에 유유히 흐르는 해류처럼, 십자가 신앙이, 말씀 사역의 근본 바탕에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위 말씀에 의거, 우리는 교훈적 말씀, 책망의 말씀,

삶을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말씀을.. 부분적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 지향하는 방향, 그 목표가

‘십자가 중심 신앙’이 되는.. 그런 말씀사역이 되어야지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면서, 설교의 방향이 중구난방이거나,

과거의 설교자들은 ‘교회 성장 위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건 가담 정도에 따라 ‘배도’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교회 성장 위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 생활 적합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떤 말씀이 유익하고, 필요할까?’

자기 나름대로 책도 읽고, 말씀도 연구해서.. 기발한 말씀을 전하기도 하는데,

 

만약 그것이 ‘십자가 중심’의 설교가 아니라면, 아닐 가능성이 90%

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오늘날 미국의 일부 가톨릭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예전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이 내려오는데, *개신교는 말씀 전통이죠.

일부 신부가 미사를 집례하면서, 전통적으로 라틴어로 집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도들이,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전 중심 신학’을 갖고 있는 신부는, 라틴어로 미사를 강행해 버립니다.

 

그리고 일부 보수적 신자들은,

자기가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라틴어 미사’가 더 좋다고 동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가톨릭 사제는,

‘여러분들이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나는 내 길을 간다’는 일종의 고집이죠.

 

저는 이런 ‘어떤 고집’이, 오늘날 설교자에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자들이 듣기에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여러분이 십자가 설교를 듣기 싫어해도, 나는 상관없습니다’ 하면서,

 

그냥 십자가 메시지를, 혼자서 일관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주신 나의 사명이다!’ 하면서, 일방통행 해 버리는 거죠.

물론 설교 이전에, 자기 삶이 ‘십자가 중심의 삶’으로, 먼저 체험되어져야 하겠지만요.

 

▶많지는 않지만, 어떤 분은 또 ‘감정적으로’ 설교를 잘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뭐 ‘옛날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던지요.’

 

과거 부흥회에는 ‘못된 며느리’ 얘기를 하면, 권사님들이 무조건 큰 은혜 받았습니다.

이렇게 감성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습니다.

 

마이크를 잡고 설교하는 시간에, 성도들의 눈물을 쏙 빠지게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일부 성도들이 막 눈물을 흘리면서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정도 은혜는, 극장에서도 받을 수 있고, TV 연속극 보면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슬픈 영화나, 어떤 감성적 스토리가 짠 하고 우리를 눈물 흘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십자가 복음’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불교 서적을 두 세 권 읽어본 사람은, 굉장히 매력에 빠져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불교 서적이 너무나 논리 정연하고, 질서 정연하기 때문에,

(사람이 쓴 것이니까 당연히 그렇죠. 책을 쓸 적에, 허황된 이야기를 쓰겠습니까?)

굉장히 깊은 논리를 다루고 있는데,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가 빠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매료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젊은 시절 ‘종교철학’ 책 이런 것 한 두 권 읽어 본 사람들은

거기에 확 빠져들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내용들이 (불교서적처럼) 너무나 논리 정연하고, 질서 정연하고,

사람들에게 동감과 동의를 자아내게 하는,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 책이 된 것이죠. 철학이 원래 논리 위주로 쓴 책이 아닙니까.

 

그러나 역시 그 책에도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논리적이라도 말입니다.

 

어쩌다가 한번 좀 이렇게 ‘교양적인 말씀’을 전할 수도 있고

어쩌다가 한번 ‘가정 사역, 아버지 학교’ 이런 주제로 말씀도 전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그런 영역도 일반 은총의 영역으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요.

 

‘늘 1년 365일 십자가 복음만 전한다’, 그렇게 하면 좋겠지만

일반 은총적인 영역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가정 사역’, ‘건강에 필요한 말씀’,

그런 것도 어쩌다가 한 번은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딤후3:16참조.

 

그러나 근본적으로 십자가 신앙이 뼈대가 되고, 주축을 이루는

그런 설교 사역이 아닌 것은

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따라갔던 것과 똑같은 현상입니다.

 

▶‘설교를 지루하게 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설교자들이 ‘십자가 복음’에서 이탈하는 이유 중 한 가지는,

설교를 ‘재미있게, 귀에 쏙쏙 들어오게, 현실 생활에 적합하게’ 하려는 유혹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진정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들에게나 재미있지,

명목상의 신자들 nominal Xn 에게는, 지루하고 공허한 얘기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재미있고, 현실 생활에 적합하게 하려는 분들이,

종종,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십자가 복음에서 떠나서, ‘자기 계발, 성공주의, 기복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라틴어로 집례한 가톨릭 사제’처럼,

‘여러분이 듣든지, 안 듣든지.. 나는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옹고집이 필요하겠습니다.

 

‘가톨릭 사제’의 예가 좀 거부감이 생긴다면,

이태리어로 오페라를 부르는, 가수의 예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청중들이 알아듣든지, 못 알아듣든지.. 내 좋아라고 이태리어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처음에 한 두 번 들으면 어색한데..

자꾸 열 번 이상 들으면, 이태리 말인데도.. 친근하고, 듣기에 아름답습니다.

의미는 모르지만, 자기가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헌금을 많이 해서 부자가 된 록펠러, 카네기

이러한 ‘백만장자 예화’가 위주가 되어서

‘십자가 신앙’이 아닌, 세상 축복에 대한 메시지가 계속 1년 365일

그 설교의 기저에 / 밑바탕에 흐른 설교가 많았습니다. 2000년 경이 그 피크였죠.

 

미국의 카터 콜론 목사님은,

“그런 교회에서 도망쳐라, 달려서 도망쳐라. Run! Run! Run!”

그런 식으로 설교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

‘너희 눈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말씀은, 사도바울의 강력한 책망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사도바울이 만약 되살아난다면,

만약 그가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중에서 사도바울로부터 강력하게 책망을 받을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 말씀’ 하더라도

십자가 복음에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말씀이 아니라면

‘말씀, 말씀’ 하는 그 ‘말씀 중심 신앙’도

실제로는 말씀이 아니고, 진리와 복음에서 떠난 변질된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사들이, 찬양한 것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 천사들이 찬양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또한 천국의 성도들이 찬양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찬송한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예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계5:12. ‘그들이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계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

보좌 앞과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5:13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계시록에는 ‘어린 양’이란 표현이, 30회 가까이나 많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모든 성도들과 천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갈3:1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그 은혜, 십자가의 그 사랑, 십자가의 그 감격.

이것을 우리가 바라보지 않고 찬양하고 있지 않다면

내 신앙과, 내 공동체의 신앙은

참된 복음의 경로에서, 지금 점점 이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누가 설교를 잘 풀어내고

말씀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서 증거 하는 사람이 (그것도 쉽지 않지만)

그 주제와 그 기저에 흐르는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 맞춰져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빗나가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그 복음의 영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간의 지혜로 어떻게 말씀을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성령 사역의 위험성

 

우리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를 추구해야 되고, 성령의 역사가 실제로 나타나야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선되고,

십자가 신앙을 추구하다보니 동반되어지는 부수효과로 나타나는

 

그러한 2차적인/ 파생적인/ 자연발생적인 성령의 역사,

그것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있고, 또 아무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잘못하다 보면,

처음에는 이렇게 올바른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자꾸 그 ‘기사와 표적, 성령의 나타남’.

(영어로는 Signs and wonders, Manifestation of the Holy Spirit이라 말하는데요)

 

그 ‘기사와 표적/ 성령의 나타남’만 자꾸 추구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앙에서 이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십자가를 날마다 바라보고,

자기 삶에 십자가를 지는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삶에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이 자연스럽게 동반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교수님과 함께

사도바울이 행13장부터 20장 끝까지 이르는 모든 도시마다

사도바울이 방문했던 도시마다의 행적을, 볼펜으로 노트에 써가면서 조사를 해보니

(바보 - 비시디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버가 ... 이렇게)

 

사도바울이 방문했던 모든 도시에서 100% 한 것은 말씀사역이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한 것은, 그가 방문한 모든 도시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다 했어요.

 

그러나 그가 방문한 도시에서 병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방언을 말하는 등

심지어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악귀가 떠나가는 등의 기사와 표적이 일어난 것은,

바울이 방문한 모든 도시 가운데, 절반 50%이었습니다.

 

(기사와 표적이 모든 도시마다 100% 다 일어났는데, 절반만 기록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는 않겠죠.)

 

사도바울의 선교 사역인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그가 말씀을 전할 때마다 모든 케이스에 기사와 표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고,

기사와 표적이 일어난 적도 있었고, 50%

기사와 표적이 일어나지 않고, 그냥 말씀만 전한 적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50%

 

그러나 말씀사역은, 그가 방문한 모든 도시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 전했다.. 라는 것입니다. 100%

 

▶우리 가운데, ‘기사와 표적이 아예 조금도 안 나타나는 사람은.. 그걸 추구하지 않아요.’

아무리 해도 안 나타나니까요. (일면 이들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기사와 표적이 조금 나타나는 사람들

그 기사와 표적들을 막 이렇게 추구하고 쫓아가기가 쉽습니다.

 

심지어는 더 깊은 기도에 빠지기도 하고요.

왜냐면 그런 행동을 해야 기사와 표적이 잘 나타난다고 보고,

뭐 금식도 하고, 기도원에도 가고, 철야 기도도 하고,

이런 가운데서 기사와 표적을, 십자가 복음/말씀 사역보다, 더 우선순위에 둘 때가 있습니다.

 

이들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결국 잘못된 은사주의에 빠지게 되죠.

더욱 더 표적을 인위적으로 추구하다 보니까, 마귀가 그 틈으로 금방 들어와 버리는 것입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십자가 복음에서 떠나게 될 때,

성령사역은, 대단히 위험하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설교에, 꼭 ‘십자가’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지 않더라도

그 기저와 바탕에는 십자가 신앙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 메시지의 맥락은

오년이 지나든지, 십년이 지나든지

십자가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기사와 표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환영하고,

또 반드시 일어나야 될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의 일화입니다.

어떤 공직자 출신의 장로님이, 자기가 아는 지인 중에

평생 불교를 믿고 살았던 분을 계속 전도했습니다.

 

문자 메시지로 성경말씀을 보내기도 하면서 계속 전도를 했는데

드디어 어느 날, 그 불교 신자였던 부부가 교회당에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분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서,

건물 안에 계시던 장로님이, 급히 건물 밖으로 달려 나왔는데,

보니까 그 분들이 차를 타고 왔다가, 차를 돌려서 교회를 빠져나가시더라는 것입니다.

 

교회당 문 앞에까지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뒤에 이유가 나옵니다.

 

그 장로님은, 그 전도자는 안타까워서

순간적으로 눈물이 나와서, 자기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섰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에 대한 사랑, 그 영혼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자기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 받고, 영생을 얻어야 된다’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지요.

 

‘저 사람들이 자기 죄에서 용서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라는

그러한 안타까움 가운데서, 장로님이 뒤돌아서면서

떠나가시는 분들의 차를 보면서, 자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왔다가 떠나던, 그 불교 신자 내외분이

마침 자기 자동차 백미러로, 그 눈물 훔치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그 차를 돌렸다고 합니다. 유턴해서 교회로 다시 들어온 것이지요.

그 장로님이 너무 상심해서 눈물까지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 불자 내외분이, ‘아이고 저렇게까지 하는데, 우리가 믿어주자’는 심정으로

되돌아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부부가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들어오지 않고 되돌아간 것은,

아주 심하게 부부싸움을 해서,

부부가 그 날 이혼하려고, 가정법원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장로님이 흘리시는 눈물을 보고서

다시 차를 돌린 결과,

자칫 잘못 했으면 정말 이혼으로까지 갔을 터인데,

 

그 직전에서 그 ‘이혼’으로부터 구원(구출)을 받았고,

그보다 더 놀라운 선물은

그들이 영원한 멸망과, 영원한 형벌로부터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회심의 역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그러한 말씀의 역사. 또는 성령의 역사,

그런 것이 계속 지속 되면, 자체적으로 이상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일평생 추구해야 할 것은 신통방통한 말씀을 풀어내는 역사.

뭐 그것도 있으면 좋지만

또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역사, 그것도 있으면 좋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한 영혼 구원의 역사, 구령의 역사,

 

이런 것 들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고

또 우리 삶에 있어서 그 추구를 하다 보면.. 성령의 은사들은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때도 자꾸 자랑하거나, 홍보하면 안 됩니다.

가급적 겸손히 숨기는 것이 낫습니다. 목표는 은사가 아니라, 영혼구원이니까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