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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정과 욕심을 못 박는다 ✝15

LNCK 2014. 1. 22. 09:21

◈십자가에서 정과 욕심을 못 박는다.                 욥42:5          십자가 시리즈 15회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주님께 헌신했는데, 뜻밖에 찾아오는 고난

 

▶전체 주제를 먼저 말씀드리면,

‘예수를 열심히 믿으면, 뭔가 더 세상적으로 잘 될 것이다..’ 라는 그러한 견해를

우리 모두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에도 열심히 나가고,

뭔가 기대감을 갖고서 헌금도 드리고 하는데

(새신자를 제외하고는) 현실에 삶에 있어서,

그렇게 해서 크게 덕을 봤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는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그러면 그 말이 틀린 것인가요?

‘예수님께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면,

사업이 잘 되고, 세상적으로 복을 받는 그 개념이.. 틀린 것이냐?’

 

아니,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자면,

 

그 중간에 십자가를 통과하는 듯한 고난과 환난, 그것을 반드시 거친 다음에,

그것을 통과한 다음에.. 비로소 그 분이 세상적으로 복도 받고,

하나님의 사명자로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욥의 이야기를 살펴 볼 것인데요. 욥이 바로 그랬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평소에 자기가 뭐 이렇다할 특별한 어려움이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뭐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는다던지,

아니면 신학교를 간다던지

아니면 주의 종이 된 이후에

 

그러면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자기 육신이 크게 병들거나, 또는 사업이 막 내리막길로 가서

어려움을 당하는 그런 분들이, 제가 관찰한 바로는, 주위에 매우 많습니다.

 

차라리 저 분이 교회에서 중직을 맡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저 분이 신학교에서 주의 종의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세상에서는 편안하게 살았을 것 같아요.

 

▶그럼 왜, 주님께 헌신하고,

자기는 주님을 섬기기로 결단했는데, 많은 어려움이 생기느냐 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쓰셔야 되니까, 그를 더욱 정결케 만드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욥과 같은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어요.

(죄가 아주 많은 죄인을 주님께서 들어 쓰시지는 경우도 있지만)

 

‘동방의 의인’ 같은 아주 괜찮은 사람들을, 주님께서 불러 쓰시는데

현재 그 상태로는 부족하니까

이렇게 풀무불 가운데에 집어넣었다 빼서,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한 다음에,

주님께서 그를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종으로, 도구로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된다>는 말은

영 틀린 말이 아니라, 맞는 말이지만,

<그 중간에 십자가의 길과 같은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라는 것이

이 설교의 주요 통찰력이 되겠습니다.

 

갑절의 복을 받는 것.. 쉽게 받지 않습니다.

욥과 같은 고난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받는 것입니다.

(쉽게 갑절의 복을 받는 사람이 만약 있다면, 부름 받은 사명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과 같은 시련을, 주님으로부터 당할 적에

우리가 감사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거 뭐, 나는 그런 것 안 당하고, 나는 좀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다고 해서, 당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와 주권과 강권하신 가운데, 우리가 (반 강제로) 그 길을 가게 되는데요..

 

다만 욥과 같은 그런 고난이, 그 과정에는 힘들지만,

그것을 통과한 다음에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게 되고

우리 영혼에 영원히 보약이 되고, 정말 꼭 필요한 그런 과정이 되는 것을

마지막에 욥기 42장의 욥처럼, 우리가 고백을 하게될 것입니다.

 

 

◑욥이 통과한 고난의 십자가

 

▶욥은 의인이었지만, 아직 하나님을 멀리서 '귀로써 듣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욥기 42장 5절인데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위 구절은, 욥기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욥이 그 극심한 고난을 다 통과하고 난 이후에

그가 고백한 그 한마디가 뭔가 하면

‘내가 이전 까지는 주님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주님을 제 눈으로 직접 뵙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통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이전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 즉 하나님과의 거리가 꽤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가까이 자기 눈으로 뵙는 단계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욥기 1:1, 또 3절에서 욥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송하고 있습니다만

욥은 아직 하나님을 그렇게 가까이 눈으로 뵙는 단계를 갖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멀리서, 자기 귀로 듣는 수준의,

'하나님이 이렇다더라. 하나님이 저런 분이시다' .. 이런 수준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욥이, 41장까지 극심한 고난을 거치면서

'이제 정말 내 눈 앞에 계신 하나님을 욥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하나님을 뭐 이렇게 드문드문, 멀찍이 떨어져서

종교인으로서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할 적에는

(거기에도 삶의 고난이 있지만) 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은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헌신하려고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시려고 할 적에는

그에게 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의 길, 그 십자가의 길을 통과하게 하셔서

자기의 정과 욕심을 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  갈5:24

 

그리하여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으로서

‘과거에 내가 귀로만 하나님을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라는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자 여러분, 욥이 그러면 아예 애당초 처음부터

가까이서 하나님을 가까이 뵈면 되는데.. 하나님을 뵙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 눈에 뭔가 더 씌워진 것이 많았다.. 라고 이렇게 "추측"해 봅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욥이 이전에는 하나님을 귀로 듣기만 하고,

아직 하나님을 가까이서 뵙지 못했다는 것은   42:5

산상수훈의 그 말씀에 의거하면

‘자기 마음이 하나님을 가까이서 뵐만큼, 청결하지는 못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마음에 끼인 기름기(지방),

눈앞에 끼인 이물질 등이 다 제거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올바로,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죠. 욥42:5

 

▶자 욥에게서 잃어버려진 것을 살펴볼까요?

자기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자녀도 다 잃었습니다. 건강도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사회적인 모든 존엄성, 존경심등을.. 그는 다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비록 추측이지만, 현실 가능한 추측이죠.

평소에 욥이 자기 마음의 눈에, 자기 마음의 시선에

뭔가 이렇게 덧씌워진 것들이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자녀, 재산, 건강, 아내, 사회적 명성, 평판, 이런 것들이

다 욥의 마음에, 또는 그의 눈꺼풀을 덮고 있었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가까이서 뵙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버코트의 예를 들어봅니다.

어떤 사람이 두꺼운 오버코트를 입고 있으면서, 자기 등이 가려워서

막 아내보고, “여보, 여보, 나 등 좀 긁어줘요. 아 거기 말고, 밑으로”

이렇게 해서 막 아내가 긁어 주었다고 했을 적에,

 

여러분들이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오버코트를 입은 가운데서

아내가 등을 긁어 줄 때, 전혀 시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가렵게 됩니다.

 

‘귀로만 듣는 신앙’이라는 것은 욥기42:5

예를 들면, 오버코트를 입은 채로 등을 긁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알기는 알고,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시는 것도 알긴 아는데

뭔가 시원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내게 시원하게 이렇게 좀 다가와주지 않느냐,

 

그것은 내가 오버코트를 입고 있는 것처럼

내 자녀, 내 재산, 내 건강, 내 외모, 내 사회적 체면, 내 자존심,

이런 것들이 욥의 영혼에 (또는 우리 각자 자신의 영혼에, 우리 마음에)

두껍게 이렇게 오버코트처럼 덮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서 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뭐 보통사람들 같으면, 하나님께서 때가 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시는데,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들어 써야되겠다.’

‘저 사람을 들어서 선교사로 쓰던지, 교회에 중책을 맡겨야 되겠다.’ 그러시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섭리의 의해서, 그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눈앞에 가려진 그러한 그 두꺼운 막들을 걷어내기 시작하시고,

우리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그러한 두꺼운 오버코트 같은

그러한 쓸데없는 겉껍질들을 한 겹씩, 한 겹씩 벗겨내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욥의 고난’이며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앞으로 후대 후손들이 그러한 길을 걸어갈 것을,

욥이 미리 당하고, 성경을 미리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후대들에게 뭔가 모델이라 그럴까요? ‘길을 갈 적에 좀 알고 가라’는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자기 겉껍질들이 한 겹씩, 한 겹씩, 벗겨져 나갈 적에

욥이 무척 괴로웠겠지요? 또 욥이 아파했겠지요? 당연합니다.

 

그런데 왜 괴롭고 왜 아플까요?

그것이 욥과 또 우리들에게, 그것들이 <사랑의 대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작 어떤 것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이 뭐 벗겨져 나갈 적에 아픈 것도 없어요. 아쉬운 것도 없어요.

내 마음이 괴롭지도 않습니다. 내가 뭐 관심이 없고, 내가 사랑이 없으니까.. 아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의 어떤 것을 가져가실 적에 ‘내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은연중에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쓰실 종들을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그 모든 우상들을 다 제하여 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면 - 많은 복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중간에>

우리의 모든 우상들을 하나씩 다 빼앗기고

그 껍질들을 하나씩 하나님께서 가져가시고 벗기시는 과정에서

욥과 같은 모진 고통이 있으며

 

나의 모든 정과, 욕심과, 우상과, 세상과, 사랑하는 것들과

정욕과, 물질욕과, 명예욕과,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하나씩 다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다 못 박게 하십니다.  갈5:24

 

그렇게 십자가를 통과한 욥과 같은 사람을.. 하나님의 종들로 들어 쓰신다..

라는 것을, 우리가 이 시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욥이 정말 비명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자기의 겉껍질들이 하나씩 벗겨짐을 당하는 과정들이

욥기 1장에서부터 이렇게 계속 나오는데요.

정말 자기 살점이 뜯어져 나가는듯한 그러한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정과 욕심을 못 박는 것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

 

▶여러분 영화 <마스크> 이야기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짐 캐리가 주연으로 나오는데, 마야 문명에 갔다가, 마스크를 하나 발견 했는데

그 마스크를 짐캐리가 딱 썼는데, 자기 얼굴과 본드처럼 완전히 붙어버린 것입니다.

 

그 마스크를 써서 한 가지 좋은 점은, 어떤 괴력이 생기고, 어떤 요술을 부릴 수 있고,

그 마스크를 쓰고서 신기한 일들을 막 행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그 마스크를 벗어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자기 얼굴 살하고 완전히 접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화인데요.

그러한 영화를 볼 적에, 제 마음 속에 뭔가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세상/ 세속’이라는 것이

<마스크> 영화의 가면처럼, 도저히 떼기가 힘든, 떼어지지 않는,

그것을 떼려고 하면.. 내 살점을 도려내야 하는 것처럼 힘든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자기 살점과 본드처럼 접착되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라는 마스크.

그것을 자기가 얼굴에 뒤집어써서, 완전히 그것이 떨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아빠’라고 하는 마스크가

자기 얼굴 피부와 완전히 본드처럼 접착이 되어서..

 

그 ‘재산’이라는 마스크가

자기 살하고 완전히 접착이 되어서

한번 쓰니까, 절대 벗겨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우상이 되고, 그것이 정과 욕심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지 못하게 되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뵐 수 없게 만들고,

그렇게 하나님을 멀찍이 떨어져서 '귀로만 듣는 신앙'을 가지고서 욥42:5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경에 욥기를 기록한 것은

욥만 특출해서 그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게, 우리 신앙인들도 다 욥과 같은, 그러한 고난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럼 고난의 길을 가게 하느냐,

그 얼굴에 밀착된 마스크(가면)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떼 내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보통 좀처럼 어떻게 해서 안 떨어지니까

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가는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서야

비로소 그것을 이렇게 떼어내게 되어있습니다. 대수술을 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욥과 같은 그러한 고난의 길로 내 모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이 너무 아프시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수술을 받도록 지켜보고 계실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우리 영혼에, 이 '세상/세속'이라는 것은

조상 적부터 내려온 그 아담의 원죄에다가

그 다음에 자기 조상 세대의 죄, 그 다음에 자기의 자범 죄,

이런 것이 모두 범벅이 되어서, 마치 강력한 본드처럼 우리 영혼에 딱 이렇게

세상과 세속이, 정과 욕심이 접착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도저히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으시려는 사람은 그냥 두시지만,

 

하나님께서 쓰시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욥과 같은 고난의 대 수술을 감당하게 하셔서, 통과하게 하셔서,

세속을,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주의 종으로 부름 받고, 헌신한 사람들

-교회의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그때부터 (복이 아니라) 화를 당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을, 그 살점을 떼내는 것 같은 수술을 통과한 다음에는.. 비로소 복을 받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적에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게 뭐 언뜻 들어보면, 말은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해보아서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어떠한 세상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는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끊지 못하는 습관이 있을 수 있고

그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어떻게 하십니까?

욥과 같은 그러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듯한 고통과 고난을 겪게 하시고

통과하게 하심으로서라도

 

‘네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다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변화된 심령으로서 철저히 주님만 사랑하고 모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하며 그렇게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말은 쉬워요. 말은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그 예를 들면 욥과 같은 고난을 통과하게 된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자 그렇게 욥이 41장까지 완전히 빼앗겼습니다. 깡그리 빼앗겼습니다.

정말 자기의 몸에 가려움과 그 어떤 진물로 인해서

기왓장으로 자기의 몸을 긁게 되는 그런 처절한 처지에 이르러서

그가 정말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주님의 얼굴을 가까이 뵙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임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빼앗겨서, 세상 사람들 관점으로는

‘저 사람 실패한 인생이다. 저 사람 끝장났다.

저 사람 뭐 완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이렇게 조롱하는데

 

그에게 하나님 임재가 임하시고, 하나님 영광이 임하시고

주님의, 성령의 권세가, 능력이 함께 하시며,

정말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 하나만 갖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어떤 자기가 가진 물질의 힘으로, 자기가 가진 군대의 힘으로 하지 않은 것이에요.

자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뭐 지팡이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고

겉옷과 속옷밖에 입은 것이 없는데

그에게 하나님이 임재로 같이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니까

그가 정말 놀라운 일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이러한 욥의 고난을 당할 적에

‘하나님께서 나를 더 십자가로 가까이 이끄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아! 나는 싫어. 나는 주님을 안 섬기고 말지, 대강 대강 살지 뭐.”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진짜 좋은 생각이라는 뜻은 아니고요.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됩니까?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보니까, 젊었을 때에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요.

(이게 안 좋은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편한’ 거요)

 

젊었을 적에, 욥 같은 고난을 크게 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늙어서 고난을 당하더라고요. 언제 당하는가 하면 늙어서, 죽기 전에요.

그러니까 연세가 60살, 70살, 80살 넘어가서 고난당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냥 제 관찰입니다.

 

그렇게라도 고난을 당하면, 쳐다보는 저는, 그분들이 고난당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러나 제 마음에 안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 분을 천국에 데려가시려고, 고난을 통해, 회개를 시키시는구나.’

‘욥의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구나.’ 하는 마음이 드니까, 제가 기뻐요.

 

그런데 젊어서도 아무 일 없이, 뭐 돈도 괜찮게 벌어서 살고, 큰 문제 없이 살고,

70살, 80살 될 때까지도 특별하게 고난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보통사람들이 보면 ‘유복한 분이다. 예수 잘 믿어서 그렇다.’ 그러는데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큰일 났다. 저 분은. 하나님이 버리신 분이 아닌가?’

 

왜요? 하나님이 택한 종은,

그들을 두들겨 패서라도, 반드시 회개를 하게 하시고

욥과 같은 고난을 통과하게 하셔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신다는 것이.. 제 신학이고, 제 개인적 관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말했다가, 대부분의 경우 욕을 먹습니다.

악담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아 나는 뭐 특별하게 뭐 고난이 없어요.

욥의 고난.. 그런 것은 제하고는 상관이 없어요.’ ..  그러다가 늙어서 당한다니까요.

 

‘먼저 맞는 매가 낫다’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 뭐 늙어서 죽기 전에 반드시 몇 년 고생하다가 죽게 되어있어요. (악담이네요. 하하) 

그래서 처절하게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악담을 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영원히 천국에서 영생, 영광, 안위를 누린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젊어서도 욥의 고난이 없고, 죽을때 까지도 욥같은 고난 없이 죽었다...

그러면 모르겠어요.  

그렇게 일생을, 욥의 고난 없이, 즉 철저한 회개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만 아시겠지만, 제 관점으로는 그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 있어서, 먼저 매를 맞는 사람이 있고,

중간에 한 50살 되어서 얻어맞는 사람이 있고

70살, 80살 되어서 막차로 막판에 얻어맞는 사람이 있고,

왜 이렇게 우리가 얻어맞는가 하면.. 아까 말씀 드렸죠.

 

짐 캐리가 나오는 <마스크> 영화처럼

세상과 세속이 우리 살하고 완전히 밀착이 되어서

웬만큼 그것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국에 데려가시려고.. 욥의 고난을 줘서.. 회개로 인도하십니다.

 

조금 더 일찍 패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조금 더 일찍 쓰셔야 하니까,

어떤 사명을 주셔서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그가 가진 물질을 다 청산하게 하시고

자기가 가진 모든 세상 것들을 다,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 믿고, 생명 걸고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주님께서 욥에게만 그러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사명자들은 그러한 고난을 받게 되어있으며

 

   믿음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은, 작은 고난을 당하고

   그러한 자기 '마스크'를 떼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이제 끈질긴 사람들은, 완전히 뭐 엄청난 고난을 겪은 이후에, 회개하고, 

   자기 얼굴에 본드처럼 밀착된, 그 세상과 세속의 마스크를 벗어던져버릴 것입니다.

 

▶마치는 말

자 여러분, 지금 십자가 설교 시리즈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욥이 정말 귀로만 듣던 (멀찍이 떨어진) 하나님을

이제 자기 눈으로 하나님을, 바로 자기 코앞에서 뵙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기까지

 

그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고

아내를 잃어버리고, 친구를 잃어버리고, 건강을 잃어버리고,

자기 명성과 사회적 체면도 다 잃어버리는 그런 가운데서

그러한 수준(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저와 여러분이 명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고난가운데로 내모실 적에

하나님 섭리와 그 뜻을, 우리가 속히 이해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 쓰시는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함이며

장차 우리를, 천국에 안전히 데려가기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떠한 욥과 같은 상실과 고난을 당하는 일이 생길 적에

이상한 일로 여기지 말자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지만, 편안하게 잘 살던 사람이, 주님께 헌신하고 나서,

주의 일에 자기가 투신하고 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 분들에게 한 가지 좋은 것은, 먼저 맞는 매가 낫다는 것입니다.

 

그거 먼저 매를 맞고서, 회개하고, 그 이후에 30년을 더 살던지, 20년을 더 살던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헌신하고 세속을 버리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지요.

 

막차로 뭐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나서, 회개하고 천국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자기 일생을 허비한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러한 길을, 우리 육신적으로 원하지 않지만

강권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길로

욥과 같은 고난의 길로 내 모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조속히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다 못 박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합당한 그릇들이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