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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십자가에 참 쉼이 있습니다 ✝14

LNCK 2014. 1. 21. 10:03

(5) 십자가에 참 쉼이 있습니다 / 십자가 설교 모음 - YouTube

 

◈십자가에 참 쉼이 있습니다          마11:28~30                십자가 시리즈 14회

 

◑십자가를 질 때, 쉼이 있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참 쉼을 주십니다.

 

:29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의 멍에’라는 것은 십자가를 뜻하죠.

 

그래서 내가, 자기 십자가를 메고, 십자가 지신 주님을 '배우면서' 따라갈 때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의 십자가 그늘에, 십자가 멍에에 쉼이 있어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삶을 배우는 삶을 살 때,

그러면 우리 마음에 쉼을 얻는다.

 

여러분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쉼’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쉼’입니다.

육체노동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육체의 쉼이 필요하겠지만

현대인들은 대부분 정신노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냥 주말에 집에서 쉬면서 TV를 보던지 신문을 보면, 머리가 더 아프다고 그럽니다.

 

육체는 쉬는데.. 마음의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아픈 사람들이, 차를 타고 두 세 시간 먼 곳에 가보지만

거기서도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해요.

 

진정한 우리 ‘마음의 쉼, 영혼의 쉼’은 어디서 오느냐?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 배울 적에.. 거기서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믿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진리를 ‘패러독스(paradox). 역설적 진리’라고 말을 합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그냥 쉰다고 쉼을 얻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이, 어렵고 외롭고 힘들고 고달픈 길이지만

오히려 참 쉼은 십자가를 지는 그 길에 있다는 것입니다. 역설이죠.

 

그래서 토마스 아켐피스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에도 유명한 말이 나오죠.

“내가 십자가를 지고가면,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태우고 갈 때.. 거기에 쉼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혹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쉼이 없다.. 이렇게 생각 되는 분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바로 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 쉼이라는 단어가 한자로 휴(休)자죠. 휴식할 때 휴.

그 休자를 보면 사람인(人) 변이 왼쪽에 있고. 그 오른쪽에 나무목(木)

그래서 한자로 휴(休)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나무그늘에 기대어 쉬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나무를 우리는 ‘십자가 나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성도는 십자가 나무에 기대어서/ 매달려서..

그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쉬는 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발견은 “쉬는” 데서 나옵니다.

17세기에 페스트가 한번 유럽을 휩쓸었던 적이 있었는데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도 페스트 때문에 1년 반이나 휴교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학교수들도 모두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긴 방학을 보내고 있을 때

아이작 뉴턴이란 과학자가, 자기 집에 고향에 돌아와서 놀라운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그 1년 동안에, 만유인력의 법칙, 빛의 스펙트럼 현상, 수학의 미분 적분 등을 발견하게 됩니다.

쉬는 가운데서 그가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이작 뉴턴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아이작 뉴턴보다 더 대단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입니다.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즉 20세기 중반까지

아이작 뉴턴의 과학이론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위대한 과학자가.. ‘쉬다가 놀라운 과학적 이론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에서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에게는 놀라운 창조적인 역사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내 십자가는, 내 몸에 딱 맞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마11:30절에 보면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내 멍에는 쉽고’

내가 주는 너의 십자가는 쉽다..

네가 지고 따라야할 십자가는, 네가 지기에 쉽다.. 라는 그런 표현이 나옵니다.

 

영어로는 easy라고 번역이 되어있는데요.

이 ‘쉽다 easy’라는 말을 헬라어로 찾아보니까 ‘크레스토스’라는 말인데,

거기에 fit 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즉 ‘쉽다 easy’라는 말은, 십자가가 자기 몸에 딱 맞다 fit 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쉬운 것입니다.

자기 몸에 딱 맞고, 자기 사이즈에 딱 맞으니까.. 쉬운 것입니다.

이 설교자(태 목사)께서 대단한 발견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소도 멍에를 맬 적에 멍에가 소의 몸의 체형과 딱 맞아야

그 멍에를 메고, 소가 밭을 잘 갈기도 하고, 또 수레를 잘 끌기도 한답니다.

 

우리도 신발 헐거운 것을 신고, 산책을 한다고 해 보세요. 멀리 못 갑니다.

신발이 자기 발에 딱 맞아야 fit, 걷기 운동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과거에 사병으로 군복무를 할 적에, 8Km 군장 메고 뛰는 훈련이 있었습니다.

소대장이 ‘군장이 헐거우면 힘들어서 못 뛴다.’ 라는 주의를 주었는데

그 사병은, 그 주의를 무시해서, 자기 군장(각종 도구를 넣고서, 등에 매는 가방)의

어깨끈을 단단히 조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메고 벗기 편하게, 약간 헐겁게 해두었던 거지요.

 

그가 지휘관의 말을 무시한 것은, ‘자신은 뜀박질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고

등에 진 군장 보따리는.. 아무렴 상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전 중대원이 8km 구보훈련을 했었는데,

반환점을 돈 후에, 뜀박질이 자신 있다던 그 사병은

너무 힘들어서 자꾸 대열에서 뒤로 쳐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병사 두 사람이, 이렇게 그 사병을 부축해가지고 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8km를 다 뛰고 난 뒤에, 그 사병은 자기 잘못과 오만을 실토했습니다.

 

자기 등에 메는 군장 그 배낭이, 자기 몸에 딱 밀착해서 붙어 있어야 했는데

어깨 끈을 느슨하고 헐겁게 조여 가지고,

자기가 뛰는데, 자꾸 자기 등 뒤에서 그 군장이 덜거덕거리고 헐렁헐렁하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만 낙오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그는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합니다.

‘아 배낭은 몸에 꽉 조여야 된다. 자기 몸하고 딱 밀착을 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내 멍에는 쉽고’ 라는 그 말은

그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 몸에 딱 맞게 fit 해주신다. 내게 딱 맞는 십자가를 주신다.

내 몸에 딱 밀착된다 ..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설교를 예전에 많이 들었습니다.

‘자기 십자가’가 무겁다고, 벗어 던졌더니

나중에 ‘더 힘든’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고요! "아멘"입니다.

 

 

◑이 짐 아니면, 저 짐 집니다.

   십자가 짐이 아니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멍에를 주셨던지

그게 ‘내 몸에 꼭 맞는 십자가다’ 이렇게 우리는 믿어야 되고,

내 몸에 딱 맞는 십자가를 지고 갈 적에, 뭐가 있다고요?

피곤한 인생에, 비로소 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할 적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오히려 그 멍에가 쉽고 가벼운데

그 십자가를 내동댕이치고 벗어버리려고 할 적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할 적에, 그 카테고리에 "내가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사는 이상, 아무 짐도 안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 짐도 안 지려면.. 저 무덤에 가는 수밖에 없죠.

 

이 세상 모든 인류가 지는 짐은 두 가지 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자기 인생의 짐’이거나,

아니면 ‘주님이 지어주시는 그 십자가’의 짐이거나..

우리는 둘 중에 한 개를, 반드시 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왕에 ‘십자가’ 짐을 지는 게, 낫겠죠?

 

 

◑그런데 왜 우리가 이렇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되는가요?

 

  그 답은.. 그래야 모든 일이 평안하게 잘 되어집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즉 내 생각, 내 판단, 심지어는 내 양심.. 이런 것이 다 부패해 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죽지 않고서는,

자기가 손대는 모든 일들은, 다 실패라는 것입니다.

손대는 족족 다 망치는 일 뿐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인재와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예술/군사 등

이런 모든 분야의 일을 수행할 적에

결국 죄인인 인간이, 손대서 하는 모든 일의 결과는.. 죄악 된 결과요,

다 좋지 않은 결과들입니다.

 

또 우리 가운데, 자기 혼자는 어떻게 성공했다 칩시다.

그런데 그 자기의 성공이, 남들을 다 해롭게 하고,

본의 아니게 남들에게 다 해악을 끼치는, 그런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시장에서 한 기업이 돈을 많이 벌면,

또 다른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죽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이, 기독교 정신으로 자발적 사회환원을 하지 않는 이상,

그 ‘기업/개인 사업’의 성공이라는 것이.. 모두의 성공과 복지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 모든 인류들이, 어떤 일을 수행할 적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자아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 합니다. 주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하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어떻게 하시느냐,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를 통해서” 역사 하시는 거죠.

 

-주님 혼자 단독으로 일하신다. 또는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아무 것도 안한다.. 그런 뜻이 아니고요.

 

-그 자아가 죽은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그의 속에 들어가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결과가.. 정치/경제/사회/문화/언론/예술/군사 모든 방면에서..

가장 아름답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이니까요.

 

예를 들면, 장갑 안에 손(가락)이 들어가서, 장갑을 움직이잖아요?

내가 죽은 그 상태에서

주님이 내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십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자아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나를 통해서, 친히 이루시는 그 일이, 선한 일이고요..

거기에 쉼이 있는 것이고..

그 장갑이 내 몸에 딱 맞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아무리 일류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내가 아무리 경험이 많고

내가 아무리 그 일을 뛰어나게 잘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도

 

내가 죽지 아니하고 처리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에는, 역사에도 해로운 일이요.

자기 자신에게도 결국에는 해로운 일이요.

모두 다 죄악 된 결과만 낳는다란 것입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 처리할 때.. 모든 결과가 그렇게 됩니다.

 

▶‘양심 양심’ 말하지만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전적부패’이론입니다. total depravity 라고 말하죠.

 

(그 선하다는) ‘양심’마저도 근본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양심적으로 하는데, 그 양심이 '타락된 양심'이니까,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아무리 양심적으로 해도, 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 양심마저도

나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나의 행동과,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가 죽은 상태에서

 

온전히 주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내가 주님의 도구가 되어서, 어떤 일을 추진해 나갈 때만

그 때에만 남에게도 선한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고

나에게도 선한 결과를 가지고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뜻(내 뜻)과, 주님의 뜻은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요.

‘세상 뜻’은.. 나에게 이로우면, 남한테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서.. 어쩔 수 없지요. 내가 1등 되면 좋은데, 남은 꼴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주님의 뜻’은

나에게 이로운데도, 세상 사람들한테 이로운거에요. 윈윈이죠.

세상 사람들한테 다 이로운데, 그것이 결국 또 나에게도 이로움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한 역사입니다.

 

▶십자가가 가볍습니다. 세상 짐을 다 내려놓으세요.

자기 자아(체면, 얼굴, 명예심)가 죽으면 됩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그랬죠.

십자가를 지는 일은,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사업가라는 명예심'의 세상 멍에를 벗어버려야 됩니다.

-내가 일을 유능하게 처리해야한다는.. '전문가'라는 그 세상 멍에도 다 벗어버려야 됩니다.

   '(목회) 전문가'라는 내 자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업가, 전문가’라는 "무거운" 세상 멍에를

우리는 메고 날마다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자아를 못 박고,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의지와 생각으로 손대는 모든 것은,

오히려 내 주위를 오염시키고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해야 합니다. 

 

자녀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양육도,

부모가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그냥 ‘부모의 사랑’이라고 해가지고, 부모자신의 생각으로 자녀를 키우다가는

그 자녀가 빗나가기 십상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일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의 사랑이 숭고하고 고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에요.

그것도 다 타락한 인간에서 나오는.. 부패한 양심에서 나오는.. 

딱 깨서 이야기하면, 부모 자기 얼굴, 부모 자기체면, 부모 자기만족을 위해서

아이를 잡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 깃털처럼 가벼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그것은 역설적 진리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을 날마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한 번 정리를 해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던지, 아니면 <십자가의 짐>을 지던지

사람은 둘 중에 한 가지를 반드시 지게 되어있는데

 

1. 실제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때

그 쉼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서 나온다는 것이 첫 번째 대지였고요.

역설적 진리지요.

십자가는 무거운데.. 역설적으로 거기에만, 참 쉼이 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참 쉼을 쉬는 가운데서

   아이작 뉴턴같이 여러 가지 창조적 일을 이룰 수도 있다는 것을

   부가적으로 살펴보았고요. (참고로, 뉴턴은 훌륭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2. 두 번째 대지는 ‘내 멍에는 쉽다’에서 마11:30

그 ‘쉽다’는 뜻이 ‘내 몸에 꼭 적합하다 fit’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지어주시는 십자가가, 내 몸에 꼭 적합한 것이므로

우리는 그냥 말없이 지고가면 되는 것이고

이 십자가를 내 팽겨 쳐버리고,

 

우리가 직접 내 손으로 손대서

내 지식, 내 경험, 내 생각으로 내 힘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일이므로

결국 자기 자신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남을 모조리 다 해롭게 하는 그런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고요..

 

   실제로 목회를 하더라도,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내 자신을 못 박(히)고

   성령의 도우심을 얻어서하는 모든 일들은

 

   남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