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철저히 절망해 버리세요 욥17:1-16 십자가 설교 시리즈 12회
*‘지도자용’입니다. 무거운 주제라는 뜻입니다.
이런 길을 가는 분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십자가 지기..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힘듭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뭐 이론적으로 배우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몸에 체득하고, 자기 몸으로 살아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라 ‘대단히 어렵다’ 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십자가가 어렵기 때문에,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을 못 하시는 분들이, 과반수가 넘고, 약 80%까지 될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십자가를 이론적으로는 알지만
실제로 살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십자가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되고,
자기의 자아가 완전히 깨뜨려지고, 자기의 자아가 완전히 망하는 것인데요...
▶우리는 살다보면, 여러 가지 삶의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절망하거나 망해버리기 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어떻게 하던지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안간힘을 쓰고, 온갖 모략과, 자기의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동원해서
그 어떤 위기 상황에서 빠져 나오고, 탈출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 거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실 때는
완전히 우리를 완전히 밟아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죽이시는 않더라도, 죽음과 방불한 그런 최악의 경험을 하게 하십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완전히 ‘똥물에 빠뜨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자아가 죽기 때문이죠.
안 그러면, 약한 것으로는.. 내 자아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웬만한 환란으로는.. 그게 질겨서, 절대 안 죽으니까요.
십자가란.. 자아가 죽는 것인데.. ‘십자가의 길’로 주님이 나를 인도하실 때는
그래서 주님이 진짜, 죽음을 경험하게 하신다니까요!
반쯤 죽이시든지, 거의 죽이시든지.. 주님이 그를 죽여 버리십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실은 끔찍한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또는 건강 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회생불가능 할 정도로
‘나는 이제 끝났구나. 내 인생은 죽었구나. 내 인생을 끝장났구나.’
우리 인생의 한 때, 어느 기간에는,
주님이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막다른 절벽에 서도록, 주님이 나를 몰아가시고,
‘이제 주님이 붙잡아주시겠지..’ 할 때,
붙잡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 등을 떠밀어 버리십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서 이제는 끝장났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깨닫는 것이,
그 떨어지는 순간에 ‘자기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오히려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절벽 끝에서 주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데, 이런 식으로 붙잡아 주십니다.>
확 밀어서 떨어뜨리시고, 그러나 죽지 않게 기적적으로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뭐,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킬 때, 그렇게 훈련시킨다면서요?
진짜 확 밀어뜨린다는 것입니다.
수영을 예로 들자면,
수영도 전혀 못하는 콜라병 같은 우리를,
배에 태우고, 깊은 바다 한 가운데 데리고 가서, 사정없이 퐁당 빠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수영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는 경험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말은 십자가.. 뭐 아름다운 것 같고, 대단히 고상한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십자가의 삶을, 내가 체득하고 살아내는데 있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 그 죽음의 바다 가운데서
한번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절하고 까무러칠만한,
그러한 처절한 절망과 나락으로 떨어진 그 가운데서
다시 부활생명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십자가를 체득한 사람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자기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는 ‘지도자용’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요셉, 다윗, 바울, 에스더.. 이렇게 지도자로 쓰실 사람은,
아마 이런 길을 자기 몸으로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 말은 고상하지요.
그런데 그걸 한번, 자기 몸으로 체득하기는..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혹독한 ‘고난의 훈련’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인생에, 한번, 두 번, 세 번 경험하고 나면,
이제는 어떠한 위험한 일을 만나도, 그 일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돌파해 가는, 그러한 백전불굴의 십자가의 군병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가 죽음을 몇 번 체험하고나니까,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자아의 죽음)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욥의 절규
지금부터 그러한 인물 중에 한명인 욥, 욥의 고난을 통해서
어떻게 욥이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나갔는지,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헛된 희망’ 또는 ‘값싼 희망’이라고 말하는 데요.
깊이 절망하고 있는 사람은, 자꾸 희망의 말을 듣기를 원하고,
또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격려의 말을, 덕담을 해주는데..
그게 사실은 ‘헛된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다 잘 될 거야!’, ‘내년에는 뭔가 달라질 거야!’
이런 말을 누가 해준다고 해서, 자기 상황이 희망적으로 호전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가 호전되기도 하지만, 그건 우연이고요.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히 자기가 죽기 일보직전인데,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였는데
그 사람을 완전히 죽여 버리십니다.
일단 그를 먼저 죽여 버리시고 그 다음에
다시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그를 부활시키는 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욥기> 1장부터 약 30장 까지 내내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욥의 절망과 욥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욥기 17장의 몇 구절만, 본문으로 택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7장 11절입니다.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
욥은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금 전혀 희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계획, 내 마음의 소원이 다 끊어졌구나.
12절입니다.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 앞에서 어둠이 가깝다 하는구나.’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동 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밤은 낮으로 바뀌고 빛이 어두움을 밀어낸다지만.’
그러니까 욥의 세 친구들이 하는 말입니다.
‘캄캄한 밤이 다 지나가면, 광명의 새벽이 올 것이다. 밝은 해가 뜰 것이다.’
즉 욥의 세 친구들은 ‘헛된 희망’을 준 것입니다.
‘조금만 참고 지내면, 쨍 하고 해뜰날 온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차이를 구분하시겠지요?
신자가 고난의 길을 갈 때,
-주님은.. 그를 더 죽이셔서, ‘십자가의 죽음, 자아의 죽음’을 체험하는 길로 인도하시고,
-세상은.. 그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런 ‘헛된 희망, 덕담’이, 우리에게 잠깐 힘과 용기가 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번 기회에, 너 자아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라’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 한번 죽었다가 살아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욥을 죽이실 때는,
또는 주님이 우리 각자 자신을 죽이실 때는,
내가 깨끗하게 항복하고, 빨리 빨리 죽는 것이.. 시간을 단축하는 길이요,
자기 자신에게 어쩌면 좋은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처절한 절망, 그 처절한 죽음, 그 절벽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
인간의 본능은 가급적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본능이라서, 우리가 그런 길을 선택하는 사람을 무턱대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서 자기의 연단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이지요.
주님이 죽이실 때는, 빨리 빨리 죽지 못 할 때는
우리가 더 큰 괴로움을 당하고, 문제도 전혀 해결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설교를 실제로 하면 교인들이 다 도망가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잘 못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아픈 사람에게 자꾸 ‘낫는다’고 하고,
사업이 망한 사람에게 자꾸 ‘쨍 하고 해 뜰 날 온다’고 말하고
대학 입시에 떨어진 학생에게 다시금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 목회자가 할 도리이지
병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 ‘완전히 더 죽으라’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하는 것이 목회 현장의 현실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 적용의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종들. 사명자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유아적으로 하나님께서 오냐오냐 하면서 키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명자, 주의 종들은
욥처럼, 또는 다윗처럼, 또는 요셉처럼, 또는 광야의 모세처럼, 사도바울처럼
(인생의 어느 기간에는) 완전히 죽여 버린다는 것이지요.
자기 자아가 완전히 죽도록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생명을 데려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죽고 난 뒤에 뭐냐, 그들은 죽었지만
그 죽음을 열매로 해서 태어나는, 다른 부활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라든지, 아니면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고 사도바울이 태어났다든지,
다른 사람에게 부활의 열매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 욥은 계속 철저히 절망합니다. 지금 우리 욥기 17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13절. ‘내가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희망하여, 침상을 흑암에 펴 놓으매.’
14절. ‘무덤에게 너는 내 아버지라. 구더기에게 너는 내 어머니, 내 자매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 올 것이다.’
그러니까 희망을 버리지 말고 희망을 붙잡아라.. 라고 말을 하지만
욥은 13절과 14절에서, 절망 그 자체를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무덤보고 너는 내 아버지다. 구더기는 너는 내 어머니요 내 자매다.’ :14
어떤 그 절망적인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올이 내 집이 되기를 원하고, 흑암에 침대를 펴 놓기를 원한다.’ :13
한마디로 말하면 ‘그래, 내가 기꺼이 죽겠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서 욥의 친구들은, 12절에서 값싼 희망을 말 하고 있지만
욥은 13절과 14절에서, 절망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자기가 죽겠다.. 라고 말합니다.
(이게 뭐 말이 쉽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데..)
‘진짜 자기가 죽음을 각오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죽기를 각오했는데, 두려움이 뭐가 있겠으며,
자기가 통과하지 못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뭐가 있겠습니까.
내가 죽겠다는데요.
욥이, 지금 하나님께서 엄청난 절망으로 그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실 적에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이러한 신앙이
바로 욥이 가진 훌륭한 신앙이요,
신약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자기 자아를 못 박는’ 그런 삶이며
우리가 이런 삶을 본 받아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적용
▶‘십자가의 길’이.. 말은 쉽지만, 자기 몸으로 살아내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뭐 암이나, 중대한 질병에 걸리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습니까.
거기서 가장 성경이 말하는 해답은 ‘죽으면 죽으리다’ 하고
그 암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암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자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발버둥치고, 뿌리치고, 행패 부려봐야.. 자기만 손해입니다.
저는 아직 암에 안 걸려봐서, 이런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대단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실제로 말기암으로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
“하나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죽으세요. 기꺼이 죽으시기 바랍니다. 죽을 준비를 하세요.”
이런 말을 정직하게 했다가는, 사실 뺨을 얻어맞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case by case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환자에게.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값싼 희망을 자꾸 남발하는 것 보다,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세요.”
이렇게 권면하는 것이,
그에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과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그 남은 몇 달의 시간에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잘 준비해야지
그때까지도 ‘나는 살 수 있다’ 라고 발버둥치다가,
어쩌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너무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떠나셨으니까요.
▶뭐 사람들은 언젠가 죽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기적적으로 더 산다면, 20년을 더 산다는 것이죠.
젊어서 그렇게 된 사람은 50년을 더 산다는 것인데요..
오십보 백보(그게 그거, 비슷한 경우)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 20년, 50년도 잠깐입니다.
저는 임종을 앞둔 분에게 꼭 그 이야기를 해드립니다.
“선생님, 먼저 천국에 가 계세요.
‘천년이 하루같다’라고 말씀했는데
남은 우리가 20년 / 50년 후에, 금방 천국에 들어가서 선생님을 만날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라고 그랬는데, 20년이면 사실 따지고 보면, 몇 초에요. 몇 초.
하루 중에 몇 초 밖에 안 될 것입니다.
선생님이 천국에 가셔서, 몇 초 잠시만 기다리시면, 저희도 가서 뵐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
천국은 지금 3차원의 시간개념이 적용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상의 50년은, 천국에서 정말 몇 초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20~50년 더 살려고 아등바등 하는 것보다,
(물론 기적적으로, 암을 이기고 더 살게 되면 감사하지요.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냥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섭리/주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런 말 함부로 해서 참 죄송한 말이지만) 막 이렇게 어떤 추태를 부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전능하신 뜻으로 받아들이고
겸허하게 자기의 죽음의 길로 나아갈 적에,
꼭 그렇게 해서 또 다 죽는다는 것은 아니고요.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분은 살고,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분은 데려가시고..
▶아니 천국을, 뭐 파라다이스라고 그러잖아요.
우리가 세상에 좋은 휴양지나 관광지로 유명한 곳들이 있죠. 피지, 사모아, 하와이 등
그런 훌륭한 휴양지를.. 감히 천국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 좋은 천국에, 주님이 우리를 빨리 데려 가시겠다는데,
부르시면 “아멘 할렐루야. 어서 저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고 우리가 어서 가야지요.
과거에 미국/유럽에 가는 것도, 사람들이 빨리 가기를.. 얼마다 학수고대했습니까.
미국보다 억만배 좋은 천국에 가는데..
왜 자꾸 안 가려고, 발버둥 친다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것이고,
죄송한 말이지만, 그런 분들은, 어쩌면 힘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아무도 안 가본 미지의 세계라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두려움을 떨쳐 버릴수는 없겠습니다만..
▶어쨌든 질병뿐만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있고,
또 완전히 경제적으로 자기 죽음을 맞이해서 사업이 쫄딱 망하고,
자기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그런 빚을 지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의 대부분의 역사는 <네 자아가 죽으라>는 것입니다.
너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죽음을 선언하고, 자기 죽음의 길로 순순히 자기가 나아갈 적에
기적적인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런데 혹시 뭐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그냥 주님이 천국에 데려가실 때도 있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뭐 어쩌겠습니까.
주님의 섭리는 선하시고, 주님은 항상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주님은 가장 아름다운 섭리와 그 역사로 나를 천국에 데려가시면
그것을 “아멘 할렐루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서 고생스럽게 사느니,
천국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을 더 바라고 좋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에는, ‘육체적인 죽음’을 주로 다루는 것이 아니고요.
십자가의 죽음/자아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데요.
(그것은 육신의 죽음도 포함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여러 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면초가로 내 모시고
궁지로 내 모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모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 절벽 아래로 (말은 쉽습니다만) 자기가 순순히 떨어지는 그 길이
주님이 내 모시는 길이고,
‘내가 십자가를 진다’는 길이 그만큼 어려운 길이지만,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정말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과하고, 부활을 경험한
그러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의 종들이, 교육도 많이 받았고, 다들 해외 유학도 다녀오고,
굉장히 아는 것도 많고 다 좋은데.. 한 가지가 딱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직 ‘자아의 죽음’을 통과해보지 못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많은 인재들이 있는데,
교육도 많이 받았고, 언어도 잘 하고 그런데,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통과해보지 못하여
뭔가 나약하고, 뭔가 안일한 지도자들이 많아서.. 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러분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은요.
웬만한 위태로운 일을 당해도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벌써 ‘자아의 죽음’을 두 세 번 경험하면요,
세상에 두려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혹시 불도저가 자기를 향해 다가와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래 한번 너 죽고 나 죽자.’ 뭐 이런 식으로, 표현이 좀 과격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도망가지 아니하고, 뒤로 물러서지 아니하고,
그 어떤 마귀의 시험과 역사, 공룡 앞에서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맞설 수 있는
그러한 담대한 십자가의 군병이 된다는 것입니다.
▶욥기 17장 3절입니다.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자가 누구리이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나를 증명해 줄자가 이제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담보물. 다른 말로 하면 보증인입니다.
자기를 보증해 줄 사람, 내 손을 잡아 줄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의 보증이 되시고, 나의 담보물이 되시고,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 분이시다..
욥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세상 사람’에게는
그 누구나, 그 어떤 것에도 자기의 보증이나 담보물을 삼지 않겠다.. 라는 고백이 되겠습니다.
이게 상당히 담대한 고백입니다. 우리가 사실 어떤 문제가 터지면요.
유명 인사에게 전화를 걸고, 뭐 관계 기관에 전화를 걸고,
인맥에 줄을 대고, 하다못해 신문기자라도 찾고 싶은 것이,
즉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자기 자아가 죽은 사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런 인간적인 방식은 전혀 취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뜻대로 될 줄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기 담보물이 되시고, 자기 손을 잡아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담대해지는 것이죠. 하나님 한 분만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추하게 사람들에게 막 연락하고, 자기의 편을 삼고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해서 또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망의 궁지로 내모시는데
오히려 그렇게 해서 일을 그르치고, 잘못 꼬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직 우리가 절망 가운데 처 했을 때,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만 나의 보증이 되시고, 하나님만 나의 손을 잡아주신다는 것.
다른 어떤 인간도 의지하지 아니하고, 자기 부모도 도움을 바라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 기도로써 해결해 나가야하는.. 그러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혼자서” 얍복강에서 처절하게 기도한 이후에
그는 담대한 부활의 사람, 부활의 영광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는 정말 어떠한 문제에 사업적인 문제, 무슨 위기,
자기 죄로 인해서 당하는 위기, 이러한 위기를 당했을 때에
그냥 욥처럼 ‘죽으면 죽으리다. 무덤에 내 자리를 펴리다.’ 하며 당차게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보증, 나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그런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주님만이 자기의 도움이 되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을 체득한 사람은,
이제는 자기 전 존재와 자기 전 가진 자본을 다 드려서 주님을 섬겨도 아깝지 않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십자가를 통과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에스더 다니엘 에스겔 예레미야, 이런 모든 사람들은
본문의 욥처럼 그 절망의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자기 자아의 처절한 죽음을 경험하고, 부활의 놀라운 영광을 맛 본 사람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심지어 교회에서도
값싼 희망, 헛된 희망을 남발합니다.
그렇게 희망의 말을 뭐 덕담, 또는 용기를 주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들을 때에 약간 1~2분간은 뭔가 될 것 같지만,
그러나 교회 문을 나서고 나면, 현실적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그 시간부터 또 ‘절망 모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실 때에, 원하시는 것은 우리 자아의 죽음인 것입니다.
차라리 욥처럼 ‘무덤이 내 자리다. 내가 기꺼이 죽겠다.
하나님 저를 데려가시옵소서.’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나오는 사람에게 있어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다 그런 죽음을 통과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아라는 것이 너무도 질기고 질긴 것이라서, 웬만큼 해서 안 죽습니다.
웬만큼 해서 안 죽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짜 우리를 죽이는 방식으로
강하게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숨겨진(알고 있지 못하던, 죄로 인정하지 않았던) 죄까지
다 토설하게 하시고, 철저하게 회개하게 하시고
완전히 자기는 과거에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까지 다 꺼내서,
왜요? 자기가 너무 죽게 되었으니까요.
뭐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주 작은 것 까지, 사소한 것 까지,
감춰진 것 까지 다 회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회개하면 다행이고, 그렇게 해서도 회개가 안 되면
그가 회개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더 몰아가시는 것이죠.
그래서 완전히 회개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마치게 되면,
그는 부활의 새 생명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고,
이제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철저히 헌신하게 되는,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