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자신을 비우는 능력 빌3:7~8 십자가 시리즈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1. 비우는 데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 비울 때, 거기서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성경 곳곳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 나타났느냐 하면
아무 것도 없을 때..입니다.
자기가 뭔가 가지고 있을 때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진 것들을 다 비우고, 비우고, 고갈시키고, 다 버릴 때
그래서 비워졌을 때
거기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발휘됩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젊어서부터 끊임없이 훈련/ 경험해야 되는 것은,
‘비우는 능력,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줄 아는 능력’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유에서 유의 창조가 아니라,
완전히 아무 것도 없이 비워진 그 상태에서,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통찰력을 가지고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나의 것을 빼앗아 가셔서, 나를 비우게 하실 때
또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신앙이 되어서
자기 스스로, 자기 속에/ 자기 안에, 자기가 가진 것들을 자꾸 내어버리고 비우는 사람이 될 때,
거기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빌2:7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오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그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웠다’ ..
우리가 자신을 비울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할 때
내 명예, 내 지위, 내 체면 .. 이런 것들을 다 비울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참고한 설교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의정부의 어느 교회입니다.)
5년 전에 우리 교회에 물질이 부족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 때 제/ 최목사가 그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제게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는 내적음성을 강하게 들려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를 건축할 때, 굉장히 큰 건물을 짓는데, 건축 헌금이 부족한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는 강한 내적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때 제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데, 지금 아무리 재정이 어려워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이런 마음의 확신이 들면서, 시간이 지나자,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게 되면, 물질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요,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는 믿음이 생기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라는 말씀대로, 염려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울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워야.. 무에서 유가 창조되니까.. 더욱 더 자신을 비우게 되지요.
개척 교회를 하는데 성도가 몇 사람 없고 헌금이 없으니까 위축되기 쉬운데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등 두려울 게 없습니다.
▲여러분 ‘이성적인 판단’은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유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다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고, 내가 좀 이렇게 내가 돈이 좀 10억이나 있었으면..
내가 자본금이 없어서 돈을 벌 수 없고.. 사역도 못 하고..
이렇게 핑계를 대는데요..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지, 성경적 사고방식은 아닙니다.
‘자본금이 있어야 뭘 시작할 수 있다’ 그건 틀린 생각은 아니죠.
지극히 이성적인 생각입니다.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성과 상식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은총의 영역 가운데
‘이성적 판단/ 상식적 판단’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무엇이냐, 믿음은 무엇이냐?
그 이성과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극복하는 것이다/ 초월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적 상식적 판단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러나 믿음은 아니라는 것이죠.
믿음이 있는 사람은, 이성적 판단/ 상식적 판단을 뛰어넘어서
정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명하신 사명에 대해서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기적은
깡그리 없는 데에서 잘 일어납니다.
무언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역사와 기적이 일어나되.. 아주 드물게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가요? 무식해야 됩니다.
무식하면 그 무식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비록 무식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에게서 신학박사가 깨닫지 못하는 유식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현대교인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하고 있는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너무 많이 알고 있고,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데, 무의 상태를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굉장히 어려운 적용이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먼저 기본적으로 무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유의 기적이 일어나기 원한다면
나의 가진 것/ 나의 부유한 것/ 내가 많은 것을.. 다 내어버려야 합니다.
무의 상태/ 빈 그물/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 ‘빈 그물의 상태’에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죠.
꼭 이건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그 자기 지식 자기가 많이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것이 진리다..
이러한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요.
어떤 목회자는 새로 이사를 갔는데, 점퍼를 입고 나가니까
그 아파트 경비가 ‘장로님’ 하더랍니다. 그래서 즉시 시험에 들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목사다, 장로다, 장군이다, 의원이다, 총장이다, 교수다, 사모님이다..
이런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자기가 가진 자기의 명예입니다.
말은 쉽지만, 대학 총장을 하던 분이, ‘선생님’ 이러면 대단히 속상할 수 있습니다.
‘총장님, 교수님, 박사님’ 이래야 속에서 빙긋한 웃음이 나오는데요.
그러나 이제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볼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웠다는 것이죠.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처럼 높은 그 총장에 비교 하겠습니까.
육군 투 스타, 쓰리스타 장성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총회장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과 동등 됨을 가지신 그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라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묵상할 적에..
아이고 나의 뭐 조금 있는 지위와 명예에서 내려오는 그거야.. 아무 것도 아닌 거죠.
누가 자기를 의원님/ 총장님/ 목사님.. 이렇게 불러주지 않아서 시험에 드는 것은
아직 우리가 십자가 신앙에 깊이 잠겨있지 못하다.. 그런 뜻이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뭐 이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아휴 우린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든데요. 그런데 뭘 내려놔요?
먹고 살기도 힘들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것도 내려놓을 것이 없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성경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크게 한 번 쓰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가난한 것을 꺼내가지고
예수님께 드리는 그런 것을 좋아하세요.
부자가 헌금 많이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적이 없는데
어린 아이가 오병이어 드린 것은, 잘했다고 칭찬하시고
두 렙돈 한 고드란트, 그 가난한 과부가 드린 그 작은 헌금을 보시고
‘저가 많이 드렸다. 자기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막12:42
그러니까 예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없다고 해도
‘없다고 걱정하는 그 마음자체’,
‘없어서 자기가 아무 것도 드릴 게 없다는 그 마음 자체’가
뭔가 아직 비워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
아주 작은 정성을 드리는 걸 귀하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하겠고
또 나 자신이 아주 가난한 상태에서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지만
그러나 나의 소중한 것을, 오병이어와 같이
또 두 렙돈 처럼, 작은 동전이라도 드리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
지금 이 주제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비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난 아무것도 먹고 살 것이 없는데, 비울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오병이어’는 있고, 한 고드란트 두 렙돈 정도의 돈은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거든지 저거든지 비울 때, 주님의 창조의 능력이 나타난다.
그런 주제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쓰시는 삶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시는데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이렇게 빼앗으실 때가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강제적으로 비우게 하실 때도 있고
또 조금 신앙이 고차원적으로 올라가면 자기 스스로 자꾸 자꾸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빼앗아 가시기 전에 자기 스스로 비울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십자가신앙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비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섭리적 (강제적) 비움
자 먼저 <고난을 통해서 억지로 강제적으로 무의 상태가 되는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자기 스스로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억지로 무의 상태로 만드십니다.
강제로 빼앗아 버리시는 것이죠.
고난당하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 자연재해의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강탈을 당한 것입니다.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싶지 않아요. 나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계속해서 요셉처럼 종으로 팔려나가고,
고난에 고난이 겹쳐서 계속되니까 어쩔 수 없고
자기 속에 화와 분노가 끓어오르지만
어쩔 수 없이 자존심도 버리게 되고, 자기 혈기도 버리게 되고..
이렇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모두 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고난이 너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겹겹이 계속되니까
그 비참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는 것이죠.
옛날에는 이렇게 뭐 일주일에 두세 번 골프 치러 다니던 사람이
이제는 시급을 받고, 슈퍼에서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먹고살기 위해서는, 그 일이라도 해야 되는..
그러니까 강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비우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순순히,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비우게 하시는구나.
내가 너무 안 깨어지고 내 자신을 버리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구나.
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고난을 나에게 주셨구나.’
이렇게 해서 달게 받는 것이 좋고, 내 마음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뭐 부유하게 골프 치다가.. 교만해서 천국에 못 갈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빈한하게 시급을 받고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가 되어서
마음에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이 회개하고 천국에 갈 수 있으면
여러분, 딱 깨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복이겠습니까.
그러나 뭐 부유하게 골프 치다가 천국가면 제일 좋겠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백 명 중에 한명 나오기가 쉽지 않겠지요.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서
<십자가 신앙>을 거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관심도 없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게 하셔서
강제적으로 나를 비우게 하실 때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이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신 것을 다 내어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을 생각하면..
‘새발의 피’라고 그럽니까. 게임도 안 되니까..
내가 시급 받고 일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3. 자발적인 비움
이제 좀 고차원적인 신앙은
이러한 십자가 신앙 자기를 비우는 신앙으로 무장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늘 이렇게 비우는 것입니다.
내 환경과, 내 주머니의 상태, 내 명예상태를
언제든지 무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입니다. 왜요?
무의 상태로 되돌리는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나오는데요.
포도주를 나눠 주다보니,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포도주가 넉넉할 때, 좀 미리미리 예수님이 ‘이제 저 포도주가 곧 떨어지겠지’
이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베풀어주셨으면.. 당황할 일이 없었을 텐데
‘벼랑 끝 섭리’라고 하는데.. 벼랑 끝까지 몰고 가셔가지고
완전히 바닥을 칠 때, 그 때에
(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 우리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겠죠.)
가나의 혼인잔치를 보더라도 포도주가 다 떨어졌을 (위기 상황인) 그 때에
무에서 유로 창조되는 역사가 나타남을 보면서,
이렇게 신앙이 성숙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자꾸 이제 무의 상태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스스로 버리지 않으면.. 안에서 썩어버리죠.
쉽게 말하면 ‘영적인 변비상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꼭 지키고 있고, 가지고 즐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나를 통해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이 흘러나가게 하기 위함인데
내가 그것을 꼭 가지고 있으면, 영적인 변비가 되어서,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변비 되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래서 ‘설교말씀도 절대로 저축해선 안 된다.’ 이런 말이 있어요.
자기가 은혜 받은 말씀이 있으면, 그걸 빨리 빨리 전해야지요..
‘아 이거는 한 달 뒤에 전해야지.. 아 이거는 언제 써먹어야지’
이렇게 자꾸 자꾸 차곡 차곡 쌓아놓다 보면, 그게 변비가 되어가지고,
나중엔 받은 은혜가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자기가 받은 은혜를 빨리 쏟아내고, 빨리 나누어주면
하나님께서 ‘빈 그릇이네? 또 은혜를 부어주어야겠다.’ 그래가지고
그에게 자꾸자꾸 새로운 말씀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이죠.
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건물이 크면, 그 큰 건물로 인해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비우는 신앙은, 그러한 큰 건물에 대해,
자기 스스로 가질 수 있는 자부심, 좀 교만한 마음.. 이러한 것을 다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굉장히 위험한 발상인데요.
뭐 이렇게 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매월 교회 재정에 잔고가 백만 원 이상 남으면 안 된다.’는 내규를 정하고
헌금이 들어오면 그걸 즉시 다 지출을 해버린다는 겁니다.
자기 교회 안에 다 쓴다는 것이 아니고, 어디 보내고, 어디 보내고 해서
자기 교회 재정을 항상 비워놓는다는 것입니다.
백만 원 아래로만 딱 남겨놓습니다.
그러면 이제 걱정이 되죠. 전기세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나오고
아 이거 다음 달에 뭐 나갈게 많은데도.. 그렇지만 비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채우시는 기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십자가의 역사라는 것이 자기를 비울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식과 이성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해야 되요. 그냥 시험삼아 하면 반드시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강한 마음의 감동을 주셨을 적에
자기가 자기의 물질이라도 다 비우면..
거기서 하나님의 채우시는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자 말씀도 이렇게 콸콸 쏟아지려면, 먼저 비워져야 되는데요.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에스겔은 환상 중에 성전 문지방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환상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지성소에서 물이 가득차가지고
그 문지방 밑으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새어나오는 것이죠.
그 물이 나중에 헤엄할 물처럼 흘러넘쳐서
동서남북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진다는 것이, 에스겔 47:17~27에 나옵니다.
우리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이 은혜의 생명수가
이 교회의 문지방을 차고 넘쳐서
이 도시로 저 도시로 지나서 인근 도시로
이렇게 우리의 예배당에서 생수가 쏟아져서
생명수가 차고 넘쳐서 계속 흘러가고 (의정부의 어떤 교회입니다.)
이 생수가 흘러 들어가는 동네마다 살아나고 축복을 받는
그러한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제로상태가 될 때까지 계속 흘려보내서, 우리가 무의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실제로 마을의 생수도 그렇잖아요. 우물물을 안 퍼내면 썩는다고 그럽니다.
그 우물물을 계속적으로 퍼내야.. 거기서 새로 우물/ 생수가 솟아 나오는 것이죠.
그 우물/생수 아낀다고 안 퍼내고 있으면,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어버립니다.
왜요? 물이 고여서, 썩어가지고.. 수질이 나빠지든지,
아니면 다른 데로 터져 나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물질>을 퍼내는 것은 가장 쉬운 것이고
<생명수의 말씀>을 자꾸 퍼내서 사방으로 흘러 보내는
그러한 마음의 비전을 가져야된다는 것입니다.
자꾸 이렇게 흘러 보내야.. 자꾸 새 물이 고이고
새로운 생명수가 쏟아지듯이, 솟아나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47장의 환상을.. 자기 교회에 일어날 비전으로 정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그러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먹고사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이 말씀이 사방으로 흘러나가는 그러한 복된 생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퍼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 여러분 벳세다 광야에서, 한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드렸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의 이름이 성경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많은 헌금을 드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헌금과는 헌금을 통해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함은 이미 시험에 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헌금을 드리지만
자기 이름을 내고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 무명의 헌금에 주님께서 축복기도를 하시자,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자신의 것을 드리면서,
자기 이름마저도 무로 만들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면서 자기 이름까지 내려고 하면, 그건 무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자기 이름까지 무의 상태로 비울 적에
거기서 예수님이 축복기도를 하실 적에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공부를 너무 많이 한 사람이지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이 뭐에요? 버린다는 거 아닙니까.
배설물을 자기가 차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배설물은 빨리 빨리 버려야지요. 냄새가 얼마나 나는데
그 배설물같이 자기가 가진 지식을 다 버렸을 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 그 놀라운 진리들을 자기가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 이렇게 다 비운 사람의 예로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는 다 버렸던 것입니다.
참 모세가 가졌던 그 지팡이 하나 뭐 물질이 있었습니까.
군대가 있었습니까. 아무 것도 없었지요.
그러나 그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모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 있었던 능력은
바로 그에게 뭐가 있었다고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팡이 하나들고 민족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겠다는 목사가 만약 있다면
둘 중에 하나이겠죠. 정신병자이던지/ 아니면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던지..
그러나 오늘 날 사람들이, 정신병자 되는 것을 두려워해가지고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 나타나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실제로 말은 쉽지만, 물질도 내려놓기 어렵고, 자기 지위와 명예도 내려놓기 어렵고,
자기 지식도 내려놓기 어렵고.. 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내려놓게 하시기도 하시고
또 자기 스스로 자기를 비울 적에..
우리가 비울 수 있는 힘과 근거가 있다는 것이죠. 뭐죠?
하나님의 근본 본체이시나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적에
내가 뭐 내가 가진 것 버리고 내려놓고, 무의 상태로 만든 이거야..
뭐 이렇게 죄스러운 표현이지만 껌 값이라고 하죠. 껌 값.
◑4. 생명과 안전에 대한 욕구도.. 비웁시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생명과 안전도 내려놓아야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 자기 안전.. 그 안전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큽니까.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Maslow)는
‘안전에 대한 욕구 safety needs’가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있다고 했죠.
그러나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는 신앙은,
자기 생명과 안전에 대한 그러한 본능마저도 비웠다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야 돼.’ 이러한 것 다 내려놓고, 그냥 물 위로 저벅 저벅 걸어갔다는 것이죠.
자 그래서 어떤 때에는, 정말 ‘생명과 안전에 대한 욕구’,
그러한 마음 본능도 다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가장 우리가 쉽게 잘 드는 예로 독일의 보롬스 국회에
마르틴 루터가 소환명령을 받고 나아가면서
‘마귀가 저 보름스 국회 지붕의 기왓장 숫자만큼이라도 많다 하더라도 나는 가리라.’
하면서, 그 소환 명령에 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심문을 받을 때에도,
‘Here I stand. Help me lord. 주여 제가 여기있사오니 저를 도우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루터가 승리했습니다.
그 보다 앞서 백년 전에 존 후스는, 같은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던 터였습니다.
루터는 정말 자기 ‘생명과 안전에 대한 욕구’를 버린 것입니다.
그 비운데서 ‘죽고자 하면 사는’ 진리가 응한 것입니다.
▲자기 업적도 내려놓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는 말이 자기 업적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뭐 세계선교를 얼마나 많이 하고,
또 우리가 뭐 몇 명이 앉을 수 있는 큰 교회당을 건축했고..’
이러한 여러 가지 업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러한 업적마저도 다 내려놓을 적에
그 업적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고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십자가의 삶을, 내가 살아내기란 대단히 어려운데
오늘 십자가 신앙 중에 한 가지 십자가는 무엇이냐?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그 비우는데서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능력이 나타난다.”
는 주제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나를 비우게 하실 때
그 매를 순순히 맞아야 되겠고
또 더 신앙이 성숙하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비우는 그 사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모세와 같은 종이다> ..
라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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