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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죽어야 열매가 나타난다. 갈2:20, 엡6:18 십자가 시리즈 16회
◐십자가 신앙은, 성령 사역의 기초입니다.
성도의 삶과 기독교사역의 기초 foundation 는, 내 '자아의 죽음'입니다.
저 진목사 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제가 성령의 기름부음보다 더 사모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자아의 죽음입니다. ←주제
나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간절히 사모하지만
그 성령의 기름부음보다 더 간절히 날마다 사모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자아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이것을 원하며, 앞으로도 더 간절히 이것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아의 죽음 없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기초가 없는 집을, 위로 지어 올리는 것입니다.
성령과 그 기름부으심.. 이런 것이 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기초가 부실한 성령역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나의 자아를 죽여주소서.’
이것이 오늘날 저 진목사의 가장 대표적인 기도제목입니다.
저는 이것의 중요성을 깊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내 자아의, 자아의 죽음이 없으면 은사. 능력, 축복, 국제적인 사역 등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집은 높이 짓기만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며,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데
‘내 자아의 죽음’이 바로 모든 기독교 사역의 기초입니다.
▶내 자아가 죽을 적에, 하나님의 나라가 내 심령에 온전히 임합니다.
성경에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는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리심’인데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있고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의 느끼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받을 수 있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것은 바로 ‘내 자아의 죽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 신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왕’ 이러한 찬양을 부르지만
정말 실제 삶에 순간순간 매 시간마다
주님의 통치와, 주님이 나의 주되심 속에 (즉, 하나님나라의 은혜와 영광과 능력 안에서)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바로 내 자아의 죽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죽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통치, 그 나라가 내게 강력히 임합니다.
우리가 뭐 하루에 열 번 이상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주기도문을 외운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나라가 내게 임하는 가장 큰 방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자아'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내 삶에 왕이 되어서, 스스로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주관하니까
그 결과는 썩 좋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아가 십자가에 죽은 사람에게, 주님의 임재가 임합니다.
내게 주님의 임재가 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임하지 않고, 주님의 통치가 내게 임하지 않고,
주님의 임재가 내게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 주변사람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면 됩니다.
주님의 임재가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사람,
또 다르게 말하면.. 자기 자아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의 주변사람들이 안다는 것이죠.
회사 사람들이, 직장 사람들이 압니다.
‘저 사람은 뭔가 달라. 저 사람은 우리랑 달라.’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죠.
자기 가족들도 다 압니다. 자아가 죽은 사람,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집에서도 외식하는 면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안 식구들이 다 압니다.
‘우리 딸은/ 아들은/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는/ 참 크리스천이야. 참 하나님의 종이야!’
반드시 알게 되어 있습니다.
교우들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저 형제님/ 자매님에게는
뭔가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찾아볼 수 없는, 생명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설교를 하더라도, 찬양인도를 하더라도, 또는 봉사를 하더라도
그에게 막 어떠한 생명이 느껴지고, 생수가 나오고,
생명의 힘이, 성령의 은혜가 흐르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고요?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갈2:20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고,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 그 기초 위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받으실만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지요.
그러나 자기 자아가 죽지 않고, 성령의 은사가 혹시 나타나는 그러한 경우가 있어요.
왜냐하면 하다보면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에, 그것은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마귀가 성령의 역사를 (광명한 천사처럼) 가장해서
습관적으로 어떤 마귀의 열매를 생산하게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쉽게 '성령의 역사' 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넘어짐과 병고침과 방언 등 거의 비슷해서,
쉽게 구분을 못 합니다.
지금 제가 성령의 역사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요,
처음에는 참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났다가,
1년~ 2년 시간이 지나면서, 좀 이렇게 변질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나타나는 표면적 역사는 똑같을 수 있어요.
사람이 쓰러진다던지, 뭐 또 병이 낫는다던지,
여러 가지 신기한 기적들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임해서 나타나는, 그런 일이 초기에는 있었으나
시일이 흐른 이후에는, 그게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지만,
마귀의 역사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주제는,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성령의 기름부음보다 자기 자아의 죽음을 더 사모해야 한다>입니다.
즉 십자가 신앙이 기초가 되어 있어야
성령 사역, 성령의 역사도.. 참되고 계속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중요한 지적입니다.
▶내 자아가 강하게 살아 있으니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자 그래서 모세, 다윗, 다니엘, 초대교회 성도님들, 빌립 집사,
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달랐던 것은, 주님의 임재였습니다.
그들이 사역할 때 그 현장에 주님의 임재가 늘 함께 하시니까
그들의 사역의 현장에 풍성한 생명이 나타나고,
사람들의 마음에 심령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도시가 소동하고 정말 들썩거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렇게 주님이 임재와 함께
성령이 나타남으로 사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오늘날 우리 현실에는 마치 ‘은사 중지설’처럼
왜 그런 성령의 나타남들이
오늘날 드물게 나타나는가요?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왜 강력히 나타나지 않는가요?
하나님이 나를 강력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것은 내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마치 단단한 호두껍질처럼, 내 자아가 내 영혼을 딱딱하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내 영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명,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 이런 것들이,
온전히 겉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내 속에서 밖으로 발산되어야 하는데
내 마음속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계시는데 (진정 회개하고 거듭한 사람인 경우)
자기 육신의 겉껍질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통해서 밖으로 발산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 권사님 간증
▶그래서 여기서 인천 안강자 권사님의 예를 살펴보십시다.
주안교회의 전도 왕 안권사의 간증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안 권사는 1994년에 그 교회의 전도 왕으로 뽑혔는데
그 한 해 동안, 무려 만 명을 전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다 결신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매일 하루에 30명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루에 30명씩 전도를 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년 동안 꾸준히 실천했습니다.
1994년도에 그렇게 해서 전도를 했는데
그 한 해 동안 10,844명에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 권사는, 처음부터 전도에 탁월한 열매를 거둔 것은 아니었답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전도해도.. 아무런 열매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1년 4개월 동안이나, 매일 동서남북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전도를 했는데도
단 한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래도 안권사는 계속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시간에, 안권사는 이런 기도제목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님, 저는 왜 열심히 전도해도, 아무 열매가 없는 것입니까?’
아무리 자기가 전도해도, 사람들이 뭐 결신하거나/ 영접하거나/
영접기도를 따라하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이러한 내적인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딸아, 먼저 너의 죄를 회개하라.
사랑하는 딸아, 먼저 네가 깨어져야한다.’
그와 동시에, 자기에게 회개의 영이 임했다고 합니다.
본인은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처하며 살고 있었는데,
숨겨져 있었던 자신의 깊은 교만과, 다른 여러 가지 죄악을 깨닫게 되면서
빛 가운데 자신의 추함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얼마나 열심히 간절히 회개했던지, 그 아침에 3시간동안이나
낱낱이 뜨겁게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날 아침에 간절한 회개기도를 드린 이후에
안권사의 표현으로는
‘그 이후로는 자기가 만나는 사람의 손만 잡아도.. 전도가 되고, 결신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와 눈만 마주쳐도, 입만 열어도.. 전도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떤 15층짜리 아파트의 전체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입주자중 80%가 결신하고, 교회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한 해 동안에만, 만 명이 넘는 성도가 교회로 한 번 이상 나왔는데
한 번 이상 나온 사람만 총 10,844명이랍니다.
그 중에 계속 다닌 사람이 있고,
다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상당한 열매가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안 권사의 체험으로 볼 때,
자기 자아가 죽었을 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인간적 혈기, 육신의 힘으로 전도를 했을 적에는
자기 자신도 힘들고, 아무 열매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자기가 깊이 회개하고, 자기 죄가 이렇게 다 토설된 이후에
자기 자아가 깨어진 이후에, 그가 하는 전도는,
그 이전의 전도와 질적으로 달랐다는 것입니다. 열매도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 분 표현으로는) 쳐다보기만 해도, 입만 열기만 해도,
그 사람의 손을 잡기만 해도.. 전도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안권사로부터, 이전에 없었던 생명이 뿜어져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은혜와/ 성령의 감싸는 그 기운이 함께 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 설교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보다 더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아의 죽음이다’는 것이죠.
‘자기 자아의 죽음’이나 ‘성령의 역사’는 그게 그겁니다. 하나입니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면
그 속에 있는 알맹이 본질은, '자기 자아의 죽음'이며
바꾸어 말한다면, 자기 자아의 죽음이 없는, 겉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는 것이지,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지 아니하면.. 즉 자기 자아의 죽음이 없으면
자기 한 알 그대로 있지, 아무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자기 자아가 죽을 때 많은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안강자 권사의 예를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정말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즉 기독교사역은
사람의 힘으로 절대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열매를 맺어주셔야, 열매가 반드시 맺히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맺기 원하시고, 열매를 거두시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한 가지 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한 알이, 그대로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알이 밀이 땅에 떨어지긴 떨어졌는데, 즉 사역현장에 투입이 되었는데,
죽지 않고서 한 알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한 알의 밀은,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자아가 죽었느냐/ 안 죽었느냐..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죠.
나를 통해서 내 주변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생명’ - 어떤 분들은 이런 표현을 씁니다.
‘온화한 눈빛과 따뜻한 말씨’ 참 의미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뭐냐, 성령의 역사가 뭐냐?
‘온화한 눈빛과 따뜻한 말씨’ 라는 것입니다.
아까 그 권사님처럼, 손만 잡아줘도 전도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사람 손잡으면 다 싫어서 귀찮아하죠.
그러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이
그 손을 잡을 적에.. 그 생명이.. 마치 전류가 전선을 타고 흐르듯이
그 사람에게 확 흘러들어가는 것이죠.
◑무시 기도
▶그러므로 이 땅에서 정말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해야 되는데
그 성령의 사역을 할 적에
먼저 자기 자아가 깨어져야 한다는데
자아가 깨어진 것을, 우리가 실제로 우리 삶에 적용하기는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습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뭐 3년, 5년, 길게는 10년 이상
이렇게 자기 신앙의 성숙, 자기 자아가 깨어지는 그 단계적 성숙을 거쳐 가야 되는데
이게 하루아침에, 설교 한 번 듣는다고 해서 다 되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순간순간 우리는, 내 자아가 살아나고
순간순간 내 자아에 의해서 말을 하고,
자기 자아적 판단을 하고, 자기 자아에 의한 결정을 내리고,
자기 자아에 의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쳐다보고 행동합니다...
성경에 보면 ‘무시로 기도한다’는 사도바울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은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뜻이죠. 살전5:17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개역개정은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And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모든 경우에 기도하라)
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항상 기도하라)
▶‘무시로 기도하기’ 라는 것을, 저는 쉽게 이렇게 이해합니다.
기도할 적에.. 교회나 기도의 골방에 가서, 딱 기도의 자세를 갖추고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던지/ 묵상으로 기도하던지
정식으로 기도의 폼을 갖추어서 하는 것은.. 무시 기도가 아니고, 이것은 그냥 기도에요.
그러면 ‘무시 기도’는 무엇이냐?
밥 먹으면서 기도하고, 운전하면서도 기도하고,
길을 걸어가면서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도 기도하고,
그 사람을 만나기전에 기도하고,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기도하고..
이게 ‘무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뭐 어떻게 기도의 자세를 갖추고, 소리 내어서 기도를 할 수는 없지요.
운전을 하는 사람은, 운전을 해야지.. 기도한다고 눈을 감고 있으면, 자동차 사고가 나겠지요.
그렇지만 그는 운전 중에라도, ‘무시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아의 죽음’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 3년, 5년간의 깊은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야 되는데
순간순간 우리는 자기 자아의 판단과, 자기 자아가 속에서 깨어지지 않은 옛 사람으로
금방 되돌아가버리기 때문에.. <무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무시로 기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판단이 임하기를 원하고
자기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 모든 일을 주도권을 가지고 행하시고
자기는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무시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는 그 사람만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지..
무시로 기도하지 않을 적에는
그냥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밀이 죽지 못하고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시로 기도하는 습관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잠비크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서 대단히 큰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
하이디 베이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도 처음에는 모잠비크의 사역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98년도에 토론토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그 목사님은 실제로 막 몸이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타 죽을 것만 같아요.’
이렇게 자기가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이러한 음성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 나는 네가 먼저 (타) 죽기를 원한다.
네가 모잠비크의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는데, 나는 네가 먼저 죽기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그 분은 정말 그 성령의 불을 받고
뜨거운 감화가운데, 자기 자아가 죽는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슨 성령의 큰 불을,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한 번 받는 체험도 필요하겠죠.
필요하겠지만, 그것 한 번 받았다고, 또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 이후로, 바로 그 다음날부터 또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로 쉽게, 쉽게 즉시 되돌아가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말 한 ‘무시로 기도함’과 같은
계속적으로 자기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모든 말과 눈빛과 악수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그런 사람이 될 적에
그래서 자기가 진정 죽고, 예수의 생명이 나타날 적에,
하이디 베이커 목사님이 모잠비크에서 놀라운 열매를 거두고
그 열매가 모잠비크 주변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처럼, 그런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마치는 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각자 기도제목을 가지고, 소원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하고 있는데..
이 설교를 하신 진목사는,
‘자기 기도의 가장 큰 제목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가정이 변화되지 않는가요? 내 자아가 죽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왜 내가 이끄는 공동체가 열매가 없는가요? 내가 죽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죽는 그 자아의 죽음을 체험해야 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가하면.. 모세가 그 자기 자아를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죠.
대충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할 정도로 죽이는데.. 무려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그는 계속 자기 자아를 죽이는
처절한 그러한 신앙성숙의 과정을 거쳐야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우리가 목표만큼은 바로 정하고
방향설정만큼은 바로 정하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아의 죽음이 선행되지 않고.. 무슨 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하고..
가정이 잘 되기를 원하고.. 사업이 잘 되기를 원하고..
성령의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하고..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고/ 우리의 목표가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통찰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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