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쓴 잔

LNCK 2014. 2. 3. 13:26

www.youtube.com/watch?v=Qsf-QrFGYoQ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쓴 잔            요18:11                *관련글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위 본문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예수님)게 마시라고 주신 잔이 나옵니다.

그 잔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더러 십자가에 죽으시라는 것입니다.

 

마치 조선시대에 임금이, 자기 아들에게 사약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참, 아버지 가운데 누가 자기 친 자녀에게 사약을 내리실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그 사약을, 그 잔을,

그 십자가의 잔을 ‘네’ 하고 덥석 받아 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런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접근하면, 반드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신을 추구하고, 신을 믿는 이유는,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자기 유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에게, 어떤 자기 소원을 요구합니다.

‘물질을 주시옵소서. 권세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무엇을 달라고 복을 비는 가운데,

인간은 신에게, 어떤 세상적인 힘을 요구하는데..

 

정작 아버지께서 그 자녀에게 주시는 것은, ‘십자가의 잔’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동상이몽인 것이지요.

우리가 어떤 세속적인 것들을 하나님께 요구할 적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기보다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이, 우리 신자들이

완전히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추구를 하고 있고

서로 다른 색깔의 동상이몽의 꿈을 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보고 우리 쪽으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쪽으로 맞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과 생각을 re-orientation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아마 다수 majority 일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10년, 20년, 30년 다녔지만

너무나 십자가 신앙하고 전혀 관계없는, 샤머니즘적인 신앙으로 교회를 출입합니다.

 

그냥 그 속본질이, 힌두교나 불교, 도교, 토속 종교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집집마다 신사를 모셔놓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도 자기 집 마당에, 또 동네 어귀에 다 사당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 우상/사당 앞에서 기도하는 이유가 뭐에요?

한 마디로 ‘가내안전 사업번창’입니다.

 

집안일이 다 이렇게 무사하고, 사업이 번창하라는 것인데

십자가의 도는 그런 일종의 하등 종교와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여행채널을 보니까, 동남아의 어느 사원에

사람들이 날마다 수 천~수 만의 인파가 찾아와서, 간절히 기도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리포터가, 사원 뒷문에서, 기도하고 나오는 신도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뭘 기도했느냐?’고 물어보니까..

전부 ‘돈 잘 벌고, 건강하고, 결혼 잘 하게 해 주시고..’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뒷문 앞에서, 책상을 펴 놓고 점을 봐 주는 겁니다.

기도한 결과, 어느 정도 행운이 찾아올지.. 즉시로 운세를 점쳐 보는 것이지요.

당연히 그 점보는 사람의 책상 앞에는.. 고객들이 쉬지 않고 줄을 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동남아의 이방종교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이 똑같은 것일까요? (당연히 아니죠)

 

▶가내안전 사업번창,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데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내려주시는 것은, 오히려 ‘십자가의 잔’이라는 것이지요.

 

그럼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잔을 주시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잔은, 우리 신자들은 받기를 원치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사약을 내리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 (정낙원 목사님의) 설교가 조금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는데요.

여러분께서 한번 기도 중에 잘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물론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분께 소개 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유대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도록 그냥 내버려두셨다는 것이에요.

예수님도, 그런 하나님의 섭리에 협조해서, 순순히 십자가의 잔을 마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도록, 막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그래서 진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백성들이 고함치고 못 박으라고 해도

하나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안 박히도록 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도, 또 신기하게도 ‘내가 못 박히겠습니다.’ 하시면서

그 십자가의 잔을 스스로 들이키셨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뭐냐는 것이에요?

 

그 이유는, 그 예루살렘 백성들과 유대인들을, 사도행전에서

하루에 3천 명씩, 5천 명씩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셨고,

예수님도,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이제 베드로가,

‘너희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들이다.’ 라고 설교를 하니까

 

유대인들이 그냥 가슴에 찔려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까요.’ 하면서

막 회개하면서, 하루에 3천 명씩 돌아오는 그런 역사가 일어난 것을.. 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의 역사로, 어떠한 기사와 표적으로 인해서

3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온 그러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뭔가 하면, 그들의 마음에 찔렸다는 것이에요.

그들의 마음에 어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자기들이 예수님을 무고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 않았더라면

하루에 3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이지 않았다면

(실제로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지만

뒤에서 사주한 그 장본인은 유대인들이잖아요.)

 

자기들이, 무죄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모든 것을 다 짜고서, 가룟 유다를 사주하고,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거든요.

 

그렇게 죄를 지었으니까..

성령이 임하시자, 회개의 역사가 막 일어나서

3천명씩 5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서두에 던진 화두가

‘왜 하나님은 아들에게 십자가라는 사약을 내리셨으며,

아들 예수님은, 왜 그것을 순순히 받아 마시셨는가?’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아들에게 그렇게 무모하게 부탁하실 수 있으며,

아들은.. 또 왜 그런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셨는가요?

 

     일반 종교하고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지요.

     일반 종교는 ‘돈 주세요. 권세 주세요. 세상 행복을 주세요.’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옛다, 사약이나 먹어라’ 표현이 조금 죄송하지만,

     그 자녀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주신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느냐.

그 예루살렘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게, 서두에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잡아 못 박혀 죽이는 일에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 두시고 방치하셨습니다. 막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잔을 마시라’고 건네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동의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요18:11

 

▶우리가 지금 십자가 설교 시리즈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열심과 능력보다 죽는 것이 우선이다 (25회)’ 라는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도록 막지 않으셨는가요?

베드로가 크게 회개하고 돌이켜서, 형제들을 되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러셨습니다.

 

또 구약의 인물로 다윗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다윗이 범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중간에서 조금 막아버리시면

뭐 모양새도 좋고, 성경도 깨끗할 것이고, 다 좋았을 것인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다윗을 왜 막지 않으셨는가. 방치하셨는가요?

 

다윗의 그 의로움을 깨뜨리기 위함이었고,

다윗이 그렇지 않았으면,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교만해서

구속사의 주인공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한 맥락과 비슷하게, 이 설교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이 3천명씩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었는가요?

 

그것은 자기들이 잘못한 것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다는 사실을

그 전에는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를 할 적에

‘너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고함을 칠적에

그 사람들이 막 회개를 하고 돌아왔는데

 

그러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져야 할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셔야하는’

그러한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났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너는 그 길을 갈 수 있겠느냐, 너는 그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때 아들 예수님은 ‘예, 제가 마시겠습니다.’ 하신 것이지요. 요18:11

 

결론적으로,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요구하시는가 하면,

 

또 성도들은, 그 주님의 요청에 부응하여

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가 하면,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좀처럼 사람들이 완악해서 회개를 안 하니까

‘차라리 나를 잡아먹어, 나를 때려 죽여!’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 자신을 내어 주시고

자기를 십자가에 내 드리시고,

 

결국에는 그 예루살렘에 부흥이, 그래서 초대 교회가 세워지는 등의 역사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로 통해서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회개하게 된 원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한 도살을 당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슴에 확 찔려서 회개를 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그런 것입니다.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달콤한 주스가 아니라, 사약死藥의 잔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큼 그러한 무시무시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예를 통해서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다른 일반 종교와 180도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일반 종교는 계속 자기 신(우상)에게 무엇을 요구합니다.

 

신이 좋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무언가 해줄 것 같으니까,

그 신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상이라고 하는데

그 우상에게 힘을 달라고, 돈을 달라고, 축복을 달라고 하고

그렇게 해서 뭐 그렇게들 다들 열심히 기도를, 이방 종교인들이 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핵심인 ‘십자가 신앙’은 무엇인가 하면

백성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설교의 키워드

자기가 그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는 시간에는,

(늘 지는 게 아니고, 그 지는 기간이 있지요)

 

그때는, 하나님이 절대로 그 신자를 안 도와주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등을 돌리시고, 외면하시는 듯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 시간만큼은, 하나님이 그 신자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니까요.

 

결국에는 부활 승리하게 하시는 최후 승리를 주시지만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 까지는, 하나님이 절대 안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최근에 제가 영어 성경을 한 편 들었는데요.

존 파이프 목사님이 ‘세계 선교의 현실realism은 뭐냐?

 

뭐 우리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모든 게 다 평탄한 그런 것은,

소설 속의 이야기일 수 있거나,

어쩌다 한번 우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 비참하다는 것이에요.

병들어 죽거나, 교통사고가 나서 다치거나, 불구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기 아이가 3명 있는데 몇 년 간격으로 하나씩 다 세 명을 잃어버리거나

 

현지 사람들에게 칼에 찔리거나, 배신을 당하는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선교지에서 오늘날에도, 21세기에도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부상당하고, 영적으로 혼란에 빠지고, 육신적으로 쫓겨나고, 실패하고..

뭐 이렇게 엄청나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이에요. 안 막아주세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 사역이라는 것은

뭐 조금 헌신 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길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서 유대 민족들을, 예로부터 하나님이 택하신 남은 자들,

그 백성들을 항상 약하게 하시고, 항상 잡아먹히게 하시고,

예수님이 제자들 보고 ‘내가 너희를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라고 하셨어요. 눅10:3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해서,

양이 가서 이리를 이긴다는 것이 아니에요.

 

양이 슈퍼 파워를 받아서 그 이리를 제압하고, 사자를 제압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가서, 잡아먹혀 죽으라.’ 이것입니다.

 

‘너의 사명은 잡아먹혀 죽는 것이다!’

잡아먹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루살렘 그 주민들처럼, 양을 잡아먹은 그 이리들이

자기 마음에 큰 찔림이 일어나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십자가의 길로 강권적으로 인도하시는데

누가 그 길을 가고 싶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냥 강권적으로 등 떠밀려서 가는 것이지요.

 

1956년 경, 에콰도르 아우카 부족을 선교한 짐 엘리엇 외 4명의 순교자들,

그 순교가 일어나고 나서 그의 부인, 엘리자벳 엘리엇이 쓴 책,

<영광의 문>이라고 우리나라 말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제가 그 책을 한 번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은 ‘하나님이 그들을 순교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등을 떠미셨다. 강권적으로 밀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20대 후반의 청년들이 다

‘우리가 이 길로 가면 순교’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가는 것이에요.

 

왜요? 하나님께서 강권해서 등 떠미시니까,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꼭 그 짐 엘리엇과 네 분의 순교자만 그랬겠습니까.

 

우리 한국에 오셔서 순교하신 토머스 선교사님부터 해서 많은 순교자들이

그 길로 가면 순교요,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냥 그 길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왜요? 이것(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길이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인도 하시고,

또 그 길을 갈 수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힘을 주시겠지요.

 

▶어쨌든 우리는 꼭 순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십자가 신앙’이라는 것인데

우리는 적어도 샤머니즘적인 그러한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영혼 구원을 한 사람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회개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사람들이 좀처럼 회개를 안 하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제일 잘 믿고, 제일 믿음 좋은 사람,

순한 양 같은 성도들을 골라서

이리와 늑대와 사자들의 밥이 되도록 내어줌으로써

 

그들이 희생당하고 고통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 당하고

투옥당하고 매 맞고 쫓겨나고 이리 저리 쫓겨 다니고, 하는 가운데서

그들을 핍박했던 그러한 무수한 사람들이, 나중에 그 마음속에 회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회개가 일어나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

‘그 길을 네가 갈 수 있겠느냐. 내가 주는 잔을 네가 마실 수 있겠느냐?’

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참 이것이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러나 이 길 뒤에는 반드시 ‘영광의 문’이 있고

영혼 구원의 역사가 있고, 부활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매 시대마다 있었고, 오늘 날에도 그런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가 '십자가의 길'을 잘 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아 나는 실패했구나, 나는 완전 인생의 실패자구나. 사회의 낙오자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회 전체가 기복주의에 영향을 받아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나를 봐라. 예수님 잘 믿으니까 내가 부자 되었지?

너는 집도 못 샀지? 너는 실패한 것이야. 너는 예수를 잘못 믿었기 때문이야!’

 

죄송하지만, 그런 식의 신앙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샤머니즘이지, 십자가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고

‘저 사람은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래.’ 이렇게 판단하면 안 됩니다.

(물론 예수님을 잘 못 믿어서 그런 사람도 일부 있겠지요.)

 

그러나 참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

병들고, 사고가 나고, 칼에 찔리고, 실패 하고, 두드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쫓겨 다니고,

하나님께서 막 이런 길로 인도하시는데,

우리 신자들마저 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십자가 신앙이 뭔지를 모르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돌을 던질 때에.. 장차 이렇게 될 수도 있어요.

과거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하루에 3000명씩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러한 역사에

우리가 포함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하

 

 

 

 

 

'분류 없음 > 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가는 제로 상태의 출발 ✝31  (0) 2014.02.03
네 팔을 벌리라 ✝24  (0) 2014.02.03
바로 왕의 꿈의 역리 ✝23  (0) 2014.02.03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기  (0) 2014.02.03
남은 고난 채우기  (0) 201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