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이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요 표지이다.
십자가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복음을 의미한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나? 이떻게 이해하나? 이것이 문제이다.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내가 십자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기독교인이냐가 판가름 된다.
신앙의 성장 또한 십자가의 바른 의미를 깨닫는 데 있다.
십자가와 내가 얼마만큼 개인적인 관계를 맺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이다.
어제 저녁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제정하신 주님은
지난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고 마침내 붙들리셨다.
밤 새도룍 재판을 받으셨고, 아침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다.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오늘 이 특별한 날,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 십자가를 함께 묵상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여러 가지 면을 생각할 수 있지만, 다 생각할 수 없고
오늘은 주님 십자가에서 당하신 대표적인 고난을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자.
주님은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가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한다.
▲십자가 형
우리는 십자가를 바로 알기 위해
먼저 주님 당시 십자가 형을 어떻게 시행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사람들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갖는 그 의미와
당시의 십자가의 의미는 전혀 달랐다.
지금 십자가 표시을 두고 사람들이 갖는 인상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지금 십자가는 평화와 생명의 상징으로 되어있다.
생명을 살리는 병원의 마크가 십자가요 평화의 상징이 십자가이다.
그래서 적십자사가 있고 또 스위스와 같이 특별히 평화를 주장하는 나라들은
국기에도 십자가를 그려넣고 있다. 십자가를 목걸이로 혹은 배지로 달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십자가는 이러한 의미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고 흉악한 사형틀이었다.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운 사형틀로서
로마 사람들은 대화의 화제에도 올리기를 싫어했던 것이 십자가 였다.
사람들은 나라와 문화마다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사형방법을 가져왔다.
십자가는 주님 당시의 로마의 사형방법으로 가장 극악무도한 죄수들을
처형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원래 페르샤 지방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페르샤 사람들은 땅을 신성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쁜 죄인은 땅에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진다고 해서
죄수의 몸이 땅에 닿지 않고 죽이기 위해 고안해낸 사형 방법이
십자가라고 전해진다.
땅에 몸이 닿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도 시신을 내리지 않고 그냥 매달아 두어서 새들의 밥이 되게했다고 한다.
이 사형방법이 로마에 건너와서 그냥 죽여서는 안 되는 죄수들,
어떠하던지 고통을 주어서 죽여야 하는 최악의 죄수들을 처형하는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로마인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십자가에 죽이지는 않았다.
같은 크리스천이면서도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식민지 사람들 중 가장 죄질이 나쁜 자들을 처형했던 것이 십자가형이었다.
이러한 십자가가 오늘날 평화와 생명의 상징으로 바뀐 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일이 너무 귀하고
또 그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참 평화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이제는 십자가하면 평화와 생명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무엇보다 먼저 육체적인 고통이었다.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육체적 고통
그 처형하는 과정을 잠간 살펴보면,
이제 십자가 형이 선고되면 죄수는 먼저 채찍에 맞았다.
채찍질이 얼마나 심했던지 채찍에 맞는 과정에서 생명을 잃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이 선고되기 전에 이미 많은 채찍에 맞으셨다.
그런 후 자기가 매어 달릴 십자가를 직접 매고 처형장까지 가는데,
어떤 학자들은 십자가 자체를 매고 갔다고 하고
어떤 학자들은 십자가의 한 기둥을 매고 갔다고 주장한다.
이 때 네 명의 군인들이 앞뒤 좌우에 각각 서고
앞에 있는 군인은 죄수의 죄목을 기록한 패를 높이 들고 가므로
사람들에게 이런 죄를 지으면 십자가 형을 받는다는 경고가 되게 했다.
그리고 좌우와 뒤에 있는 군인들은 행렬이 더디질 때
사정없이 채찍을 내려치므로 죄수를 재촉했었다.
요한복음에는 생략되었지만 예수님은 이 때 너무 힘이 없어
자꾸만 넘어지고 더디어지므로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하여금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었다.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거의 억지로 대신 졌지만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되었고
그의 두 아들 알렉산드와 루포는 초대 교회 훌륭한 신앙인들이 되었음을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며,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자들을 주님은 절대로 그냥 외면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주님의 은혜와 복이 있다.
주님이 십자가를 대신 진 시몬에게 은혜를 더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형장에 오면 십자가를 눕히고 그 위에 죄수를 눕혀서 먼저 손과 발에 못을 박는다.
발밑에는 비스듬한 발판이 있어서,
살갖이 찢어져 죄수가 형틀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세워 놓으면 못자국으로 피와 물이 흐르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죄수는 서서히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체내의 물과 피를 너무 많이 쏟음으로
죽든지 아니면 질식해서 죽는다고 한다.
어떤 죄수들은 몇 일씩 달려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죽음인가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님의 이 고통이 우리의 고통을 대신 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지 불과 6시간 만에 운명하셨다.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흘려 기도하셨고
밤새 한잠도 못 주무시고 이리 저리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으셨다.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실 때 이미 많은 물과 피를 쏟으셨다.
그래서 불과 6시간 만에 운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야 말로 형언할 수없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아마 사람이 고안해낸 처형 법 중 가장 잔인한 것이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부르짖은 것도
그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 주님이 얼마나 잘 참으시는 분인가?
조롱을 받을 때도 참으셨고 침을 뱉고 뺨을 때릴 때로 한 마디 말도 없이 참으셨다.
가시면류관 쓰실 때 채찍으로 살점 뚝뚝 떨어지도록 때릴 때도 말 한마디 없이,
말 그대로, 도살장이 끌려가는 양처럼 참으셨다.
그런데 이제 십자가 위에서 양 손과 양 발의 못 자국에서 물과 피가 다 쏟아져
내릴 때 그 갈증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6.25 직후에 어느 목사님 한 분이 맹장염에 걸렸다.
그 당시는 약도 별로 없고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 수술을 하셨다.
사모님이 간호를 하시는데, 목사님께서 목마르다고 호소를 했다.
물을 주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지시가 있어 안 된다고 하자,
목사님이 벌컥 화를 내며 목이 말라 죽겠는데 무슨 소리냐고 야단을 쳤다.
평소에도 부인에게 상당히 무서운 남편이었다고 한다.
사모님은 겁이 나서 물을 주었고 그 물을 마신 목사님을 돌아가셨다고 한다.
기가 막히는 이야기다. 피가 빠져 나가고 상처 받은 사람에게
목마름은 대단한 고통으로 따라 온다.
예수님을 생각해보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피같이 흘리면서 기도하셨다.
채찍에 맞으므로 가시면류관을 쓰시므로 벌써 많은 피를 흘리셨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 양 손과 양 발의 못 자국으로 온몸의 물과 피가 다 흘려내릴 때
그 목마름은 상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내가 목마르다고 부르짖은 것이다.
주님은 돌이켜 보면 목마르실 분이 아니다. 하늘나라 생명수 강수의 주인이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내게 오라고 초청하시 분이시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영원히 갈하지 아니하는 생수를 주신 분이다.
생수의 주인이요 아니 친히 생수의 원천이신 분이다.
그런데 그가 왜 이토록 목 말라 하셨는가?
우리를 대신하신 것이다. 바울은 고후8:6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한번 생각해보라. 우리가 지옥에 갔다면 그 뜨거운 불길 가운데서
얼마나 목이 말라 했겠는가? 주님 그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영원히 갈하지 아니하는 생수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도 영혼이 목마르지 않는다.
천국에는 영원히 목마름이 없다.
시편 23 편의 절정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있다.
차고 넘치는 감격과 은혜의 표현이다. 잔이 넘치나이다.
이 은혜가 십자가 위에 주님이 목마르심으로 예비하신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간다.
말씀으로 생수를 마실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해야 한다..
▲부끄러움의 고통
그 다음에 부끄러움의 고통이 있었다.
십자가는 생명을 빼앗는데 앞서
의와 명예를 빼앗는다는 사실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십자가를 굴욕이다. 부끄러움을 준다. 옷을 벗긴다.
화가들은 십지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너무나 민망스러워
옷자락으로 치부를 가립니다만 실제로는 발가벗겨서 길거리에 매달아 놓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케 하는 것이다.
명예를 빼앗고 욕을 보이는 것이다. 주님은 이 부끄러움을 참았다.
십자가 위에서만 모욕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대제사장 집에서 심문을 받을 때 무리들은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을 매질할 때도 절대로 뺨은 때리지 말라고 한다.
그것은 모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최대의 모욕을 의미한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사람들은 주님을 조롱하고 희롱했다.
지나가는 자들이 조롱을 한다.
머리를 흔들면서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한 자여!’ 하면서
갖은 조롱과 욕을 보인다.
대제사장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한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욕을 한다.
능력이 있으면 한번 내려와 보아라.
한 번 생각해보라. 못 내려오실 주님이 아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요,
친히 열두 영도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어 진멸해버릴 수 있는 예수님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진멸하신 하나님의 그 권능을 가지셨지만
그들을 내려다보시면서 그욕 을 고스란히 당하신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내려오면 믿겠노라고 한다.
그 말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가셨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믿기는 고사하고 살아남기나 했겠는가?
예수님은 아무 능력도 없으신 분이 되어 갖은 조소를 다 들어주신다.
변명 한마디 없이 죄인의 누명을 쓰고 약한 자가 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신다.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셨고 변명 없이 깨끗하게 참으셨다.
우리를 위해 참으신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서 무엇을 얼마나 참았는가? 무슨 모독을 받았는가?
이 모든 모욕과 부끄러움을 참으신 주님의 침묵 속에 엄청난 사랑이 있다.
아버지의 저희를 사하여주시옵소서. 저희의 하늘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했다.
이 엄청난 사랑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모든 치욕과 부끄러움을 참으신 것이다.
▲영적 고통
마지막 또 하나의 고통이 있었다. 영적 고통이 있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막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 고통을 말한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에게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
성경에서도 제일 큰 약속 혹은 복은 하나님 이 함께 하시겠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랄 때
그 얼굴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실재 버림을 받았다.
주님은 영원부터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오셨던 분이다.
영원 전 부터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닌가?
33년 동안도 한 번도 하나님과의 교재가 끊어진 적이 없었다.
특별히 그것이 죽음의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가장 필요한 시간이 언제이겠는가?
죽을 때. 이 시간이야말로 주님 오셔서 손 붇잡아 주셔야 하는 시간.
실재 하나님은 성도들의 죽음에 특별한 임재로 함께 하신다.
순교자가 순교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
그러나 주님은 바로 이 시간에 버림을 받았다.
주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생애의 유일한 순간이다.
이것이 어떤 고통이겠는가? 진정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더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의 승리의 비결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는 데 있다고 믿었다.
요16: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화 함께 계시느니라.
주님은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결정적 순간에 주님으로부터 고개를 돌리셨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사망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는 사망을 십장이 멎고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요즈음 뇌파가 멈추는 것은 사망으로 보자는 주장도 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사람의 코에서 호흡이 끊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망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망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얼마나 좋은 교제를 가졌는가?
그러나 범죄한 이후에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재가 끊어지게 한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보면 아들이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어 노라고 했다.
아버지를 떠난 것이 곧 죽음이었다. 하나님과 나누어지는 것이 곧 사망이요,
인생의 모든 비극은 여기서 출발한다.
주님 십자가 위에서 이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의 삯을 받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교재가 끊어지는 자리에 들어가신다.
범죄하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육신만이 죽으셨던 것이 아니라 영혼마저 죽음을 경험하셨다.
영적 죽음의 자리에서의 고통, 그것이 곧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는 부르짖음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를 본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천사도 하나님 앞에서는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워야 했고,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라고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참아 보지 못하신다.
노아 홍수 때 세상을 물로 뒤덮은 것도, 소돔과 고모라고 유황불에 멸망당한 것도,
에굽의 바로의 군대가 홍해 속에 수장된 것도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 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 어떤 곳에서 보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비록 독생자이시지만 죄인의 자리에 섰을 때
하나님은 그 죄를 향하여 진노하고 계셨다.
이 귀절에 관해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부르짖으실 때
죄와 싸우기 위해 죄를 향해 무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았다고 말했다.
의미 깊은 말이라 생각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공의의 계시이다.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였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고 계셨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보여주시는
사랑의 계시의 절정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죽는데 까지 내어 주셨다.
십자가 안에 내 생의 가치가 있다.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고서라도
구원해 낼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 그 엄청난 값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다.
유명한 스펄젼 목사님은 생전에 많은 저서를 남기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신학을 네 단어로 설명한다.
Jesus died for me" 예수님게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는 이것이 나의 신학의 전부라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다.
이제 생각해야 한다. 이 큰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여야 하겠는가?
깊이 생각하자. 이 은혜에 보답하는 생을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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