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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사명입니다 1 ✝37

LNCK 2014. 2. 3. 13:28

◈고난이 사명입니다                   시편 118:5                 십자가 시리즈 37회

                                                                                        *부제: 하루가 귀한 분들

 

‘사명’이라고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개념은, ‘장밋빛, 뭔가 아름다운 것’으로 얼핏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만,

<고난을 겪는 것, 십자가를 계속 지고 가는 것, 그 자체가 자기에게 사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예레미야는 요시아 왕 때부터~남유다 멸망 때까지 약 40년간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시아 왕 때, 즉 그의 사역 전반기 20년 동안에는, 그냥 하나님말씀만 전했어요.

 

그러나 후반기 동안은 BC 605년 바벨론 1차 침공 때부터 예루살렘이 멸망하기까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그를 미워해서

감옥을 세 곳이나 전전했습니다.  시드기야 재위 시 ?년 ~ 최대 11년간

 

처음에, 체포되어 얻어맞고 ‘서기관 요나단의 집’ 감옥에 잡혀 있었어요. 렘37:15

그러다가 ‘경호대 뜰(감옥)’로 옮겨집니다. 37:21

거기서 밉보여 ‘진흙 구덩이’에 빠뜨려집니다. 38:6

엣벳멜렉이 상소하여 진흙구덩이에서 꺼내져서 다시 ‘경호대 뜰’로 옮겨집니다. 38:13

예루살렘이 함락할 때까지, 예레미야는 거기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서는 고난의 세월을 계속 사는 그것이 자기 사명이었다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나는 예레미야가 아니니까 큰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우리 가운데서도 고통을 계속 당하고,

그렇게 계속 고통을 당하는 그것이, 자기사명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는, 불치병 또는 장애우를 키우는 그런 가정에서는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어요. 무엇인가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를 고쳐주시던지,

-아니면 그를 빨리 천국에 데려가주시던지..

 

왜냐하면 그 불치병/심한 장애 상태로 매일을 연명하듯이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큰 의미가 없고, 너무나 고통이 많고,

또 그의 가족들도 환자를 돌보느라 힘들고, 경제적 고통도 상당히 큽니다.

 

그런 중병을 뭐 3, 4년 앓으시는 분은, 집이 한 채 날아간다.. 이런 말도 들립니다.

병원비, 간병비 쓰다보면.. 한 달에 몇 백 만원씩 훌쩍 날아갑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가족들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일도 없는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도.. 왜 하나님께서 그 애절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가요?

 

가족들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교회 식구들도, 그 가정을 위해서, 간절히 중보기도 해 줍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간절히 드리는 그 기도를.. 왜 하나님은 들어주지 않으실까요?

 

정답은.. 고난당하는 것이, 바로 그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신자가 받는 사명 가운데는

그런 <고난의 사명이 있다>는 내용의 설교입니다.

계속 한 번 귀담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118:5절 말씀입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인생의 마지막을 고통 중에 보내고 계신 분들께,

하루가 소중하고, 하루를 고통가운데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설교를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인생의 마지막 시기가 되면,

정말 중환자실에 들어갈 그런 시기가 되면,

‘아예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복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렇게 천국이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는데,

뭐하려고 이 세상에서

저렇게 보기에 정말 애처로울 정도로 가련하게

온갖 의료기기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나.. 빨리 죽어서 천국가야지.. 그러면 좋을 텐데..’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천국은 어차피 영원히 사는 곳입니다. 영원히, 영원히요.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날은

주님께 간절히 주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는 날은.. 한정되어 있잖아요.

‘하루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의 부제

 

하루를 더!

이 세상에서 그 고통가운데서라도, 부르짖어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천국에 가는 그 사람이

그냥 일찍 편안하게 죽는 사람보다, 어쩌면 더 훨씬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천국에 가는 것, 그것도 일찍 가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보면,

고통가운데 투병생활하며, 하루를 더 사는 것도..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고난을 감당하는 사명, 기도하는 사명입니다.)

 

천국 가는 것이 무서워서 두려워서 질기게, 질기게 사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하루를 더 살고” 천국에 가는 것도

굉장히 더 소중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 어차피 영원히 살 것이니까요.

 

▶지옥에 간 사람들의 제일 간절한 소원은,

‘만약에 자기에게 현세의 하루만 주어진다면,

하루를 내가 세상에 가서 다시 살 수만 있다면,

그 때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헌신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터인데..

 

이렇게 지옥에 간 영혼들은, ‘하루를 더 살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간 영혼들도, ‘하루를 더 살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천국에서는, 이제 더 이상 지상에서 했던 것처럼,

주님을 섬기거나, 주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주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이미 천국에 와 있으니까요.

 

그래서 천국에 간 성도들도, (지옥에 간 영혼들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서의 하루를,

새롭게 더 살게 되는 찬스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적에, 지금 아무리 자기가 주사바늘을 몸에 꽂고 있고,

여러 가지 약으로 힘들게 연명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질기게, 질기게 하루 더 사는 것이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 뜻대로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주 소중하고 귀한 날이며

그렇게 하루 더 살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소원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두 분 다 약 6년 가까이, 옥고와 고난의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이왕 결론이 순교요, 이왕 마지막 그 종착역이 감옥에서 죽는 것이었다면,

뭐하려고 5~6년간을 그렇게 고생스럽게 옥살이를 하도록

주님께서 섭리하시고, 허락 하셨을까요?

 

아니 뭐 해방으로 나와 가지고, 그후 편안한 삶을 10년 20년 30년 더

이렇게 더 살 것 같았으면, 그 6년의 옥고가 의미가 있었겠죠.

해방해서 자유스럽게 목회도 새로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오래 오래 사시면 되니까요.

 

근데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에 체포되셔서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까지

무려 6년간이나 감옥에서 모진 고난의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감옥에서 편안하게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고,

여러 가지 학대와 여러 가지 고통, 추위, 굶주림, 정신적 고통.. 이런 것들이 있었을 것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너무하시지 않는가요?

이왕 천국에 데려가실 거라면, 빨리 6일 만에 데려가시던지,

길면 6주간.. 6주도 길죠. 6달도 엄청 길고..

우리 세상에서 보내는 여섯 달이 아니에요. (군대, 감옥은 시간의 길이가 길게 느껴집니다.)

 

거기 물론 감옥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하고.. 이런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면, 6년이나 옥고를 치르시다가

결국 그렇게 감옥에서 죽을 것이면

‘참 하나님도 너무 매정하게 대우하신 것이 아닌가?’

그런 인간적인 생각을, 제가 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께서는 6년 동안이나 주기철 목사님께

하나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존귀한 시간을 주신 것이에요.

그건 6개월보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이고, 6주간보다 훨씬 더 귀한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6년 동안이나, 길고 오래도록, 주 목사님의 생애를 통해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고

주 목사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천국에 놀랍고 영원한 상급을 쌓을 수 있는

그러한 존귀한 시간을 주셨던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1940년부터

신사참배 반대로 옥살이를 시작하셔서, 1945년 해방이 되자 풀려나셨습니다.

 

그렇게 감옥에서 5년을 보내시고, 드디어 해방이 되어 좀 행복한 날이 오는가했더니

1948년에 여순 반란 때 두 아들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시고

1950년에 6.25때 목사님은 한사코 피난가기를 거부하시다가

정말 애석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이왕 순교가 답이었다면, 무엇 하러 감옥에서 5년이나 고생을 하셨는지요?

그렇게 5~6년간이나 모질게, 모질게 고생을 시키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래도 순교, 저래도 순교, 결론이 순교였다면

차라리 감옥에서 6개월 정도 짧게 고초를 당하신 후에 (6개월도 긴 기간입니다)

하루라도 더 일찍 순교하셨더라면.. 차라리 육신은 편하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의문은, 그렇게 죽도록 고난을 겪게 하신 후에

비로소 순교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과연 무엇입니까?

(답은, 고난의 십자가 감당이, 자기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귀한 것이고, 그 자체가 큰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일이 오늘 우리 주변에도 일어납니다.

순교는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말기 암에 걸리거나, 다른 불치병이나 병고에 시달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병 고쳐보겠다고, 병원에 다니고, 수술도 받고,

여러 차례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도 하고

그러는 와중에 적게는 몇 달에서 많게는 몇 년까지 오래도록 통증에 시달리면서

경제적으로 뭐 가진 재산 다 팔아서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도 다 희생하고 ..

 

그래도 혹시나 믿음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는 한 가닥의 희망의 줄을 붙잡고서

3년, 5년, 8년.. 이렇게 세월을 보내고

고침 받지도 못하고.. 결국 그냥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에요.

 

아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안락사’가 좋아 보입니다.

편안하게.. 의료기관이 죽여주는 것이 정말 ‘존엄’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3년 5년 8년 돈쓰고 고생하고 죽을 바에야

빨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이 좀 3개월 만에, 5개월 만에 데려가셨으면 좋았을 것을

왜 그렇게 질질 끌고, 고생시키시고, 고통당하게 하시고, 돈 다 쓰게 만들고,

가족까지 모진 고생시키고.. 왜 그러시느냐?

하루가 귀하다는 것이에요!

 

병상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더 섬길 수 있는 날,

자기 자신을 더 성화, 준비할 수 있는 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날!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니까,

오늘 하루는

천국에 간 사람들이 애타게 하루 더 살기 원하는 그 소중한 하루라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하면서

 

너무 빨리 죽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가족들도 환자에게 (빨리 가시라고) 스트레스를 주면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주기철, 손양원 두 분 목사님이

감옥에서 모든 고초를 겪으신 것처럼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고통 중에 부르짖으며, 시118:5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또 본인에게 무한한 영광이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런 고난의 사명을 주신 사람들도, 있습니다.

장애아들도.. 그런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장애아를 태어나게 하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