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 / 십자가 설교모음 - YouTube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 고전1:30~31, 롬8:13 십자가 시리즈 26회
고전1:30~31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내 실상이 너무 비참하기 때문에.. 나는 죽어야 합니다. (죽은 것으로 여깁니다)
내 비참한 실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길은, 십자가에서 내가 죽는 길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나 자신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스스로 비참해집니다.
과거에, 저는 제 자신이 상당히 괜찮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저’는 여기서 설교자를 지칭하는데, 세상 모든 성도를 지칭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칭찬을 받으면서, 어렸을 적부터 자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제 자신을 열어서 그 실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제 자신 속에서부터 비명소리가 질러 질만큼, 더럽고 추악하고 음란하고
정욕적이고, 가증스럽고, 교만하고, 욕심 많고, 거짓말 하고..
그게 바로 나 자신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아주 이해 잘되는 예를 들었는데,
가끔 길을 가다보면 한 10~20년 동안 뚜껑을 닫아두었던 맨홀이나 복개천이 있는데,
하수구가 막혀서, 할 수 없이 그 도로를 파헤치고,
그 복개천 도로 밑에 있던 하수구 뚜껑을 열 때
그 안에서 십년 이상 묶은 시커먼 오물들이 나오죠.
그것이 바로 예레미아서가 말하는,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정말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 인간의 그 마음입니다.’ 렘17:9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체험을 할 때, 사람들이 그 직전에 회개를 하게 되는데,
회개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상을 보고서, 비명소리를 지른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그래도 뭐 좀 공부도 많이 하고,
도덕성도 남들보다 뛰어나던지
아니면 뭐 자기 가문이 좋던지
어떻게 하던지 자기를 조금 괜찮은 사람으로
남들과 나를 비교할 때
정말 좀 이렇게 스스로 굉장히 괜찮은 사람으로 점수를 줬는데..
성령님께서 우리마음을 조명하셔서, 내 실상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 20년 동안 닫아두었던 수십 년 동안 닫아두었던 맨홀 뚜껑을 확 열어 제치면
내 실상이 너무 비참하다는 것을 우리가 비로소 보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비참한 실상을 가지고서 사느니, 내 자아가 십자가에 죽는 그것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렇게 그 실상을 깨닫지만, 서로를 숨기면서 삽니다.
숨기고 감추고 누르고 덮고 위장하고.. 그렇게 살아야 적당히 인간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나 자신만 다 이렇게 드러내고 공개했다가는 큰일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충대충 다 가리면서 숨기면서 삽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런 상태에서..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수록, 들여다볼수록 정말 비참한 것이 많은데
그냥 이렇게 적당히 숨기고 위장해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덮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의 삶은, 심한 열등감/ 두려움/ 좌절감에 늘 사로잡히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도 자유하지 못하고, 열등감/ 두려움/ 좌절감
즉 자아 중심적, 옛사람 중심적으로 여전히 산다는 것입니다.
진짜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옛사람의 자아 그대로 여전히 사는데.. 그게 어떤 삶이라고요?
열등감/ 두려움/ 좌절감/ 계속되는 내적인 분노,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질투심/ 이런 것에 의해서.. 늘 괴롭게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자아를 죽이고 사는 삶이.. 괴로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기 옛 자아 그대로 발산하고 사는 그것이.. 훨씬 더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30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다’ 그랬는데
그런 복음의 혜택을, 우리가 받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내 지혜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로 살아야 되고요,
내 의로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의로울 게 뭐가 있습니까.
온갖 추잡한 것들이 다 유전되어 내려오고,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죄성과 원죄가 다 있는데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 의로움의 겉옷, 거룩함의 겉옷을
우리가 덧입기 위해서라도,
먼저 되어져야 할 일이 ‘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 있는데요,
첫 번째, 내 실상이 너무나 비참하기 때문에 나는 죽어야 합니다. 죽으면 깨끗한 것입니다.
두 번째,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2.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살면 창조의 원형이 회복됩니다.
내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내 삶 주변에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죽으면 귀여운 새끼호랑이가 커서, 나중에 맹수(내 옛 자아)가 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늘 교만하고, 늘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고..
그러다가 자신 실상을, 한 번 자기 진면목을 보게 되면.. 완전히 또 좌절하게 되고..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수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정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아가 죽고,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으로 부활되었을 때,
그것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황홀해지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예수안에서 비로소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전1:30
▶그래서 진짜 예수로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사람은
2001년을 살아도, 연말에 돌이켜 보면 ‘아 금년 한 해를 참 잘 살았어.’
2002년을 살아도, 연말에 되돌아보면 ‘아 금년 한 해는, 내 인생의 최고의 해야’
그러면 이듬 해 2003년이 이제 슬슬 걱정 되는 것이죠.
‘아 내년에는, 피크를 지나서 하향곡선을 그리면 어떻게 할까?’
아닙니다. 2003년에는 더 놀라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실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니까요.
그럼 또 이제 걱정이 될 수도 있겠죠.
‘아이 금년에는 정말 꼭짓점을 찍었으니까, 내년에는 좀 내려가지 않겠나?’
아닙니다. 내년 2004년에는, 더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그러한 놀라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안의 풍성함을, 더욱 크게 누리는 것입니다.
뭐 부자가 된다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고전1:30
‘아 내가 한 해를 잘 살아왔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10년, 20년 축적이 되고 누적이 되면
자기가 살아온 10년을 되돌아보고, 자기가 걸어온 20년을 회고해 볼 때,
‘후회할 것이 없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소이다.
내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소이다’ 라고 감격에 찬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인생의 황금기가 길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금기는 ‘단 20년’ 이라고 말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로 비유해 볼 때,
봄 20년은.. 육신적으로 성장하는 기간이고
여름 20년은.. 40살까지는 자기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기간이고
가을.. 60살까지 추수기는 20년밖에 안돼요. 40살에서 60살까지 20년.
겨울.. 나머지 20년은, 자기 인생을 정리하는 기간입니다.
인생이 80살 산다고 그러지만
실제로 뭔가 자기 능력을 발휘하고, 열매를 맺는 기간은 20년이고, 길면 30년입니다.
그 전에 준비하는 기간이 40년이고, 그 후에 마무리하는 기간이 20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정말 하루라도 허비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짧으니까요.
추수기/황금기는 20년, 길면 30년.. 짧습니다.
그 20년을 후회 없이, 가장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버리고,
내 실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혀주시는 지혜의 겉옷/ 의로움의 겉옷/ 거룩함의 겉옷을 입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그 삶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 계속적인 성숙을 하는 가운데서..
되돌아보면 후회함이 없는, 가슴 뿌듯한..
그런 성공적인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어릴 때야 뭐 육신적으로 다 귀엽죠.
그러나 나중에 커서.. 자기가.. 맹수가 되고, 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다 그렇게 됩니다. 나이가 늙을수록 더 사나워집니다.
▶만약 십자가에서 내가 죽지 않으면,
그래서 내가 맹수가 되고, 괴물이 되면.. 가장 괴로운 사람은 누구겠어요?
바로 자기 자신인거죠.
그러고 나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자기 주변사람입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했잖아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라고요.
사람은, 본질적으로 자기 주변 사람들을 계속 괴롭히는 것이에요.
같이 집안에 살고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무서운 맹수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자녀들은, 부모를 싫어하고 가출을 하고 싶어 하고,
또 부모는, 사춘기 자녀에게 상처받아가지고 날마다 괴로워하고
형제는 형제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서, 서로 소송을 하는 사람이 있지를 않나..
어쨌든 우리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렇게 정말 주변사람들/ 교회 사람들/ 회사 사람들/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에 내 가족까지도 괴롭히고, 자기 자신마저도 스스로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목회자/ 장로/ 권사 /집사라 하더라도
가족들이 그 ‘외식하는 자’를 보고.. 가끔씩 치를 떠는 것입니다.
자기가 교회 직분자라 하더라도,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자기 자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은 (즉 십자가 신앙이 없는 사람은)
겉으로 보면 양복입고 뭐 양장하고 다니면.. 잘 안보이지만
가장 스트레스를 주고, 또 그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자기 가족이기 때문에
정말 ‘집안 식구가 그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내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서
배우자로부터 존경 받고, 아버지로부터 인정 받고,
형제, 자매들로부터 칭찬을 듣습니다.
그래서 진정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그 자녀들에게 ‘네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보통 ‘예, 우리 어머니입니다. 예, 우리 아버지입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자기 속에 옛 자아/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는 곳은,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서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늘 기쁘고 즐겁게 해줍니다.
물론 우리가 아직 완벽하게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은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약간의 불만과, 때로는 약간의 스트레스가.. 인간관계 속에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보면”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옛 사람이 죽어 버린 그 사람은
가족에도/ 가까운 사람, 친구에게도/ 직장에서도 어떤 웃음꽃을 주고
‘그 사람만 오면, 모두가 마음이 푸근해 지는’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명절 증후군’이 있다고 그러죠.
그래서 설날, 추석이 되면, 벌써 한 달 전부터 사람들이 예민해지고
거기서 제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동서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래서 명절이 지나면, 이혼 신청하는 비율이 평소보다 급증한다고 그러죠.
미국 사람들은 비슷하게 ‘크리스마스 증후군’이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비행기 표가 평소보다 2배 3배로 비쌉니다.
그렇게 비싼 돈을 드려서, 자기 집에 돌아와 보는데,
그냥 한 30분만 좋고, 30분 지나고 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죠.
아버지는 아들이.. 사회에서 초고속 성공하는 아들이 되기를 바라고,
아들은 아버지가.. 큰 부자라서, 자기 뒤를 팍팍 밀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를 찌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도 자아가 살아있고, 자녀도 자기 자아가 살아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한 번 오고, 그 다음부터는 안 옵니다.
보통 미국사람들은, 자기 고향에 10년에 한 번 찾아간다고 그러잖아요.
멀어서 가기가 힘든 이유도 있지만,
매 년 가봐야, 도리어 스트레스만 받고, 가족이 서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좀 떨어져있으면..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겠죠.
그런데 진정으로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True Christian 진정한 크리스천들이
군데군데 이렇게 존재해 있으면,
추석이 되거나 구정이 되거나 온 가족이 모여도,
그 모임이 절대 스트레스 받는 모임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 서로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그 진실한 크리스천들이, 모임 이전부터 계속 가족구성원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또 희생하고, 자기가 욕을 먹어도 참고, 그냥 계속 상대방을 세워주고, 이렇게 하면,
오히려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는 찬송처럼, 가정이 낙원이 되는 거죠.
자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라도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지 못한 사람은
겉모습은 번듯한, 사회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평생 열등감 좌절감 비교의식 그런 가운데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그 사람은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 아직 죽지 못 한 사람이고,
그래서 스스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예수 안에서 참 자유를 못 누리는 것입니다.
▶‘뭐 내가 죽고 싶어도.. 안 죽는 걸 어떻게 하나요?’
‘내가 내 자아를 죽이려고 몇 번이나 노력해봤다. 그런데도 내가 죽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일까요?
자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고, 하루아침에 확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과거의 죄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관성의 법칙’이라 그러죠. 몸은 움직이던 방향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내 자아의 평소 습관이, 육신에 뿌리 깊게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 고전 1:30절을 암송하는 겁니다.
‘나는 죽었고.. 예수님이 나의 지혜가 되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지혜로 삽니다.
예수님이 나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의로움이 되셨습니다’라고
우리는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점점 성화의 길을 가는데요..
예를 들어보지요. 만약에 어릴 때 아이를 잃어버렸다가, 한 10년이 지나서,
자기 집에 기적적으로 되돌아 온 그런 아이가 있다고 가정을 해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부모 집에 돌아왔을 적에
하루속히 그 집에 적응되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가 지난 10년동안 길거리에서, 거리의 아이들과 휩쓸려서
여태껏 살아온 과거 10년 동안의 옛사람의 습관이 있단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집에 돌아 온 아이는, 계속 자기 입술로/ 자기 마음속으로
어떤 사실을 되뇌어야 되는 겁니다.
‘나는 이 집의 아들이야. 저 분은 내 아버지야.’
이렇게 자기가 여기고, 생각하고, 되뇌고 하는 가운데
점점 그 집 아들로 변화되는 것이지.. 그런 자기의 노력이 만약 없으면
그 새로 되찾은 가정에 적응 못하고.. 다시 가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탈북 했다가,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내려주셔서, 강권적으로 내게 역사해주시는 그러한 면이 있어야 하지만
-또한 우리 자신도, 내가 스스로 계속 내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지혜가 되시고, 예수님은 나의 의로움이 되시고,
예수님은 나의 거룩함이 되신다..’ 라는 고전1:30절을 외우시던지
아니면 갈라디아서 2:20절을 외우시던지
자기 스스로의 어떠한 그 의지적인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니셔티브를 쥐시고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인도해 가시지만 (이 말도 맞고)
우리 매일의 삶에 있어서, 자기가 그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그 손길에 붙잡혀 가고자 하는
그러한 어떤 노력, 자율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도 맞습니다. 둘 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새들을 보면요, 새들이 참 머리가 나쁘다고 그러죠.
또 물고기들도 정말 머리가 나쁘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금방 미끼를 먹고 낚시에 잡혔다가, 다시 풀어주면, 또 그 미끼를 문다고 그러죠.
그렇게 머리가 나쁘다고 합니다.
그런데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정말 새들도 저렇게 열등감 없이 잘 살고,
물고기들도 아무 불평 없이 저렇게 잘 살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들은,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누가 내게 말 한마디만 조금 잘못해도, 예민한 내 마음이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마구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자기 자아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열등감으로/ 두려움으로/ 분노로/ 비교의식으로
남을 미워하며.. 비교하며.. 살아가는 것은
원래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의 회복이 아직 그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입술로는 자기가 신앙을 고백해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진짜 구원의 혜택, 구원의 역사,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자기 마음에서/ 자기 가정에서/ 자기 삶의 환경에서..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자신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갈2:20
이렇게 ‘십자가 중심적 신앙생활’을 할 때,
또한 고전1:30절을 암송하시면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는 예수님의 지혜로/의로움으로/거룩함으로 오늘을 산다.. 라고 할 때
그 사람이 구원의 삶/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 회복된 에덴동산의 삶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그러한 뜻이 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신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비’, ‘비밀’, ‘초자연적 기적’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가지면 좋지만, 안 가져도 그만이다.. 가 아닙니다.
'나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는데.. 십자가는 내가 몰라도 된다' .. 가 아닙니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은, 즉 신비/비밀/초자연적 기적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십자가 신앙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증거가, 그의 삶에 ‘십자가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사는 삶을 살게 되는데,
뭐 어린아이가 모태에서 태어났다고, 즉시로 뛰어 다니는 건 아니잖아요.
처음에는 엉금엉금 기어 다니고, 그 다음엔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그렇게 하지만 그에게서 ‘끊임없이 영적인 성장의 과정’이 시작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도.. 하루아침에 우리가 완벽해 지는 것은 아니고요,
그 성장의 프로세스가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구원 받은 사람)
그 성장의 프로세스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적 동의)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내가 믿어야 하지만, 동시에 내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믿는다고.. 무조건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들 가르치는데요.. 그건 자기가 하나님/주권자란 소리고요..
반드시 믿어야지요. 그러나 내 믿음이 하나님께, 합격 도장을 받아야 합니다.
그 도장이 뭐냐? - 자기 삶의 변화인 것이지요. 도덕적 변화가 아닌 초자연적인 변화!
‘십자가 신앙’도, 그 도장 accredited 의 일부인 것입니다.
반드시 참 신자의 삶에, '십자가 신앙'이 미숙하나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이런 내용이
전혀 자기 삶에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나는 예수를 믿고 있지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라고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그 믿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받아들여져서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기 자아의 모습 그대로.. 옛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건 구원이 아니죠.
시기, 질투, 분노, 경쟁의식, 비교의식, 남을 해코지.. 이런 식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살고
그렇게 하루만 사는 것이 아니라, 10년 20년을 계속 자기 육신을 따라서 삽니다.
그래서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롬8:13, 창3:3
그렇게 이 세상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진정 변화되어, 십자가 신앙으로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 ‘강 같은 평화’가 넘쳐흐르며
샘물 같은 생수의 강이 흘러서.. 자기만 흡족하게 마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그 생수의 강물을 나눠주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 오늘 고린도전서 1:30~31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만
나는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신다.
그래서 나는 주안에서 이러한 삶을 자랑한다.’ :31
이러한 삶을 자랑하며 사는 축복이, 우리에게 이미 있는 가운데
이러한 신앙을, 널리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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