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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사명입니다 ✝28

LNCK 2014. 2. 3. 13:28

고난이 사명입니다 / 십자가 설교모음 - YouTube

 

◈고난이 사명입니다      고후4:17, 11:27, 마10:18            십자가 시리즈 28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고난입니다.

물론 그 십자가의 고난을.. 고통스럽게만 여기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이 끓어넘쳐서.. 기꺼이 그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사명자에게 있어서,

십자가, 그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몸’에 대한 사랑이 끓어 넘쳐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면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속에서 고난이라는 현실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고난이 없다’ 라고

이렇게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성경을 일면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에게도.. 반드시 고난을 주시고,

심지어는,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일반 신자에게도.. 고난을 주시는데요..

이래 저래 성도는.. 고난을, 그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원치도 않는 그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고난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1. 구원을 이루는 고난

 

고린도후서 4장 17절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한 것이,    *가벼울 경輕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무거울 중重

 

우리가 지금 받는 환난은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 환난의 가벼운 것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한 것, 우리가 받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원치도 않는 ‘고난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성도에게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의 완성, 성숙,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2. 또 복음 전파자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예수님을 잘 믿어서 고난이 없다.’

그런 말도 30% 맞지만 70% 틀린 말입니다. 왜 그에게 고난이 없는가요?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남들처럼 큰 고난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이 아니거나, 그를 구원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그냥 자기 멋대로 살게 내버려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고난이 없지요.

 

로마서 1장에도 사람들이 욕심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말씀이 무려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데,

그런 사람은 고난이 없을 수 있습니다. (없지는 않고, 고난이 적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그들에게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밝은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고

그 가운데서 하늘로서 이런 음성을 들었는데

‘그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여주었노라’ 행9:16

 

이것은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만약 바울에게만 적용된다면, 꼭 성경에, 이 구절을 명시할 필요가 없었겠죠.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은, 바울처럼, 많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복음 전파는.. 반드시 고난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군’이 아니라요.

 

그게 성경적 방식이고, 예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무력과 힘을 앞세운 복음전파는.. 사실은 복음전파가 아니지요.

예수님이 먼저 그러하셨듯이

그들에게 배척과 핍박을 당하지만,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경적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지 않는 삶’은, 현재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아서,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잘 된다고 말하지만

그런 면이 30%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잘 믿고 복음 전파 사업에, 해외 선교 사업에 투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얼마나 많은 고난의 길을, 피하지 못하고, 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고난이고, 고난은 사명’입니다.

지금 이 메시지의 제목이 ‘고난도 사명이다’ 인데요,

 

‘사명 Commission’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답게 들립니까?

장밋빛 같아 보이고, 새파랗고 청명한 하늘처럼 아주 멋있고 고상하게 들리는 말이 ‘사명’입니다.

 

그러나 그 사명, 그 아름답고 고상하게 보이는 그 단어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속 본질은.. ‘사명은 곧 고난’인 것입니다.

 

딤후1:8절에도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야, 네가 가게 될 복음 전파의 그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다.’ ..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마10:16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떼 속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불과 15년 전에 한국의 어떤 선교사가, 터키에서 선교사임이 발각되어서

일정 기간 감옥에 갇혀서, 또 폭행을 당한 일도 있습니다.

이것이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그 선교사가 풀려나서, 한국에 돌아와서 간증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감옥에서 구타를 당한 그러한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혹시 그분께 정신적 충격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지요.

 

여기는 해외 선교지가 아니라서,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뭐 그래도 복음을 전하는 중에, 생활비가 떨어져서

바울처럼 굶고 춥고 헐벗는 일을 당하는 이런 ‘생활고의 고난’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저는 어느 날, 위 구절을 눈을 씻고, 몇 번이나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제가 성경을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 같이 복음전파에 충성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여태껏 들었던 기복주의적 설교에 의하면,

복을 받아도, 정말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히 받아야 할 터인데..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바울이 ‘굶고, 춥고, 헐벗었다니요?’

(그래서는 안 되지만) 정말 따지고 싶습니다. ‘저기, 실례지만.. 좋으신 하나님 맞나요?’

 

그래서 ‘고난’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없으면,

우리 일반 신자나, 사역자의 삶에.. 많은 딜레마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너무나 기복주의적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뻔한 현실(고난)을 보고서도.. 납득이 되지 않고, 시험에 들고, 신앙성장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성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3. 신자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집니다.

(위 ▶1번의 연장선상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엄마나 아빠들은 자녀를 키울 적에, 그 자녀들이 부모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면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래서 흔히 ‘딸 바보’도 있고, 뭐 ‘아들 바보’도 있지요.

 

어린 자녀들이, 다가와서 엄마 아빠 품에 편히 안기는 것은,

부모들로서는 정말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하나님 품에 안기면,

정말 매우 기뻐하시겠구나.’

 

그런데 이제 자녀들이 조금만 크면, 부모에게도 잘 다가오지 않듯이

성도들도 조금 지나면,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잘 다가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때때로 우리가 너무 멀리 벗어나 있을 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까이 다가오게 하십니다.

 

병에 걸리기도 하시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게도 하시고,

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게 하셔서

정말 이 성도가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도, 57세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천국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에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오래 살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빨리 소천하신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 그 분은, 평소에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편안한 때, 젊었을 때, 받았던 모든 은혜는 거의 헛되거나 아주 작았다.

그러나 내가 고통 받고 괴로웠을 때 받았던 그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웠다.’

 

‘스펄전 목사님 같은 신실한 분께, 무슨 고통이 있었을까?’ ..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목사님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데

편안하고 즐거웠을 때 받았던 은혜는, 작거나 헛된 것이었고

고통당하고 괴로운 시간에 받았던 은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라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길을,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수년간 고생한 코리텐 붐 여사는, 후에

그 수용소 시절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말 했습니다.

 

‘내가 붙잡고 의지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을 때

그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었음을!’

 

코리 여사는, 평소에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까지 가깝지는 않았는데

정말 그 수용소에 들어가서, 그 어려운 가운데서

 

예수님이 정말 자기와 함께 하시고, 내주하시고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그러한 가운데서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풍성한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성도가 고난을 당할 적에 불신자에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마24:14절에 ‘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된 후에 그제야 주님이 오신다’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증거(마르투리온) 라는 말은,

행1:8절에 ‘너희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와 같은 말입니다. *마르투스

 

이 말의 뜻은, 그냥 뉴스 전하듯이, 어떤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자기 삶의 증거로.. 그 사실이 확실한 것임을.. 몸으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즉, 성도가 ‘증거’(마24;14)를 하거나 ‘증인’(행1:8)의 삶을 사는 것은

(위 두 구절 말고도, 신약성경에 몇 구절이 더 나옵니다.)

-말로만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증거로서, 자기 생활로서 증인의 삶을 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세상에서, 자기 신앙 지킴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만,

꿋꿋이 참고 이겨나가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는 것이에요. 전도가 되는 것이에요.

 

일례로,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는 고난을 당했지만

밤중에 그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했을 적에 죄수들이 듣더라’고 했어요. 행16:25

 

일반 수인들은 감옥에 갇혀서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을 때,

성도인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증인’이 되고, 그 삶이 ‘증거’가 되어서

실제로 빌립보 감옥에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불신자들은 그것을 못 본 척, 안본 척 하면서도

자기들의 마음이 요동 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뭔가 달라. 저것이 기독교 신앙이구나!’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미리 하셨습니다.

마10:18절 ‘또 너희가 나로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전도의 기회, 증거의 기회’가 될 것임을,

예수님이 미리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너희가 그런 일을 당할 적에.. 당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불의한 일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할 적에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여 주셨는가?’ 하고 시험에 들면 안 됩니다.

 

정말 하나님이, 100 배 복은 고사하고, 30배만 주셔도 좋겠는데

30배의 복은 커녕, 오히려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게 하실 적에는

그 일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행1:8절이 이루어지고, 마24:14절이 이루어지는 기회인 것이에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된 후에, 예수님이 오시고

너희는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그러한 증인, 증거가 언제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잡히고, 고생하고, 괴로움과 핍박을 당하고..

 

이러할 적에

세상 사람들에게, 임금들과 왕에게.. 복음이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희한한 복음전파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마10:18절에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잡혀서, 가이사랴 로마 군대안 감옥에서 2년,

후에 로마로 이송되어, 로마 가택연금 2년,

그런 식으로 <증거, 증인>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그래서 고난이 곧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곧 신자의 ‘사명’이고,

‘사명’이 뭐냐?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 = ‘사명’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복주의 신앙에 지난 50년간 물들어서

직분자가 되는 것은, 50년 전에는, ‘고난의 길을 가는 길이다’ 라고 말을 했는데

요즘에는 다 ‘축복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 안수, 장로 장립, 권사 임직을 할 적에,

‘이제는 장로님 되시고 권사님 되시면, 많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덕담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그렇게 직분을 맡음으로써

‘더욱 더 증인의 삶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 증인의 삶은 무엇인가 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는 삶을 사는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이요, 직분자/사역자의 삶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바울의 고난을 통해서, 많은 주변 동역자들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빌1:14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결박을 당했는데

그의 결박을 통해서 다른 많은 형제들이,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었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기가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해서 갇혀있는 그것이

다른 많은 형제들에게,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흔히 전쟁터를 다룬 영화를 보면

다들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면, 겁을 잔뜩 먹고 있는데

동료 한 병사가 부상을 당하거나 죽으면

다른 병사들이 열 받아서, 갑자기 총탄이 쏟아지는 적진을 향해 돌진하게 되지요.

 

      성도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많은 다른 성도에게 자극이 되고,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교 초기에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는 한국에 왔다가

선교도 제대로 못 해보고, 얼마 못가서 질병에 걸려서 순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에 감동을 받아서

호주에서 선교사들이 순차적으로 한국으로 건너 왔는데

다 합하면 80명에서 120명이나 되는 그러한 수 십 명의 다른 호주 선교사들이

데이비스 선교사의 질병으로 인한 순교에 열을 받아서

한국에 와서, 부산 경남 지역에, 놀라운 선교의 열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도 1997년에, 아프간에서 배형규, 심성민 선교사의 순교로 인하여

한국 교회가 크게 한 번 각성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5. 천국에서 보상을 주시기 위해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가라지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떨어져 나가지만

알곡 성도는.. 고난을 당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8:18

 

여기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단어는 ‘비교’입니다.

현재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비교를 해 보면,

우리가 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장차 영광’.. 둘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물건을 사기 전에, 늘 비교를 해봅니다.

내가 가진 돈 만원의 그 가치하고

저 물건의 가치하고 비교를 해서

만원을 줘도 괜찮겠다 싶으면.. 사는 것이지요.

 

나는 만원을 냈는데, 저 물건의 가치가,

눈짐작으로 보았을 때 오천 원 밖에 안 된다.. 그러면 그 물건을 사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지금 고난당하는 이 고난의 총량, 가치가 얼마인가?’,

그리고 ‘장차 내가 천국에 가서 받을 그러한 영광이 얼마인가?’

이것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 로마서 8:18절입니다.

 

그렇게 비교할 적에는 우리는 능히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훨씬 이익 보는 거래이니까요.

 

이런 말씀을 유념하셔서, 베드로서에 나온 것처럼

‘너희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할 적에 이상한 일을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러한 진정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