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경륜4 계3:8 유도순 목사님 설교 녹취, 출처보기 (95~끝)
▲개요.
지금까지 우리는, ‘어린양의 피와, 그들의 증거하는 말/복음으로 이긴다’는
내용을 살펴보았고요,
역사의 종말을 미리 보여주는 계21:1~7절에도,
그렇게 성도와 교회가, 최후에 승리하고, 구속사가 완성되어질 것이
다 작정되어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 맥락과 연장선상에서, 이 시간에는, 계시록의 7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거기에 타락한 교회/ 승리한 교회/ 반씩 섞인 교회가 나오는데요..
보통 사람들은, 그 7교회의 타락과 승리를..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합니다만,
그것보다는 <복음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욱 옳다고 봅니다.
승리한 교회는.. <참된 복음>을 사수하고, 그 복음을 몸으로 살아낸 교회요, (윤리 이전에요)
타락한 교회는.. <참된 복음>을 타협하고, 그 참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지 못한 교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바로 이 싸움입니다.
참된 복음에서 탈선하고, 타협한 교회들이 .. 많습니다.
도덕적 타락은, 그 뒤에 따라 오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문제의 근본은, <참된 복음에서 벗어난'것이.. 모든 현실적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을,
우리가 그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는, 참 복음의 싸움
칭찬만 있고, 책망이 없는 교회가 있고, -서머나, 빌라델비아.
칭찬과 책망이 겸해 있는 교회가 있고, -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또 책망만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그런데 이 7교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윤리적인 입장이 그 일차적 교훈이 아니에요.
물론 참 복음은, 윤리적인 삶의 결과를, 그 열매로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적 삶이.. 참 복음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시록의 7교회를, 윤리적(부차적)관점보다는,
복음적(일차적)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또 계시록에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면
일곱 교회를 향해 전부 “이기는 자는..” 이란 말씀이 맨 끝에 나오는데요..
무슨 뜻입니까?
-참 십자가의 복음, 어린양의 피의 복음의 사수에.. 이겨야 한다는 뜻이고요,
-그 복음을 증거하는 삶에 있어서.. (남은 자는) 이겨야 한다는 뜻이고요,
-그런 일을 훼방하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남은 자는) 이기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참 복음과/거짓 복음과의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책망 받은 교회들은, 진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 근본적 원인은.. 참 복음을 가지지 못하고,
이세벨이나, 다른 거짓선지자를 용납하며, 십자가 복음 사수에 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는 말은,
우리는 이것을 윤리적으로만 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들은 진리는 있었는데, 복음의 감격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그 기쁨, 감사, 열정,
그 사랑, 그건 잃어버리고 의문(율법)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속해있는 장로교회 중에 혹시 그런 측면이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장로교가 진리를 고수한다고 하면서도, ‘사랑 빠진 복음’을 붙들고 있으면,
역시 주님의 책망을 받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쫓는다고 그랬어요.
이건 뭐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진리가 침투한 교회입니다.
어린양의 피의 복음을 보수protect하지 못했단 말입니다. 이렇듯 7교회는 <복음 사수>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두아디아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이세벨을 용납했단 말입니다.
이것도 영적으로 하면 결국은 진 것이 되는 거예요.
악한영이 거기에 침투를 했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살았다는 형식은 다 가지고 있는 거지요.
결국 이 교회도 변명의 여지가 없이, 진 교회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치명적인 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네 가련하고 가난하고 곤고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는도다.’
저는 다른 분들의 '계시록 강해' 같은걸 보면,
이걸 전부 윤리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습니다.
‘윤리적으로 어느 정도 돼야 벌거벗고 있지 않은 것이 된 거냐?’
물론 우리는, 윤리를 여기 배제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뒤에 이어서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서 내게 받아 입으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분명히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그럽니다.
그러니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로부터 쫓겨나신 거예요. 주님을 추방했단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이 교회에서 추방을 당하게 되는가요?
강단에서 복음이 사라지게 되면.. 주님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눈이 멀고,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잃어버렸을 때, 이렇게 되요. 벌거벗은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강단에선 목사님이라도, 눈(영안)이 열려졌으면
성도들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면 기절초풍 했을 텐데
목사님도 눈이 멀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까,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이런 일이 벌써 2천년 전에, 벌써 라오디게아 교회에 있었고요,
또 사데교회처럼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는데.. 그래서 주여!’는 하는데
그런데 다 죽은 교회란 말입니다.
이런 교회가 2천년 전에 이미 있었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 면에서, 어린양의 피.. 그 영적 전쟁에 졌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계2~3장의 7교회가 보여주는 것은,
말세에는, 복음의 타협, 복음의 변질.. 이라는 영적 전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지겠지만..
그러나 이걸 100%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 구속사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봐야 합니다.
계21:6~7절에도, 교회의 승리가 예언되어 있고,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이미 이기셨으며,
일부는 타협하고, 타락하지만,
그 중에 ‘남은 자’들은, 반드시 참 복음으로 승리할 것이므로,
우리는 ‘구속사, 영적 전쟁의 승리’를 .. 전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을 내가 아노니’
아주 환난에다, 궁핍까지 있었어요. 설상가상이죠.
그런데 주님은 ‘실상은 네가 부유한 자다’
그런데 현실적으론 표면적으론 환난과 궁핍가운데 있어요.
그런데 ‘영적으론 부유한 자다’ 어떻게 이런 교회가 될 수 있는가요?
금보다 귀한 믿음을 지켰기 때문이죠. 참 복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현실적으로 이렇게 부자가 됐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들은 ‘복음’을, ‘금보다 귀한 믿음’을 지킨 것입니다.
복음을 보수(지킴)했단 말입니다.
빌라델비아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교회에 와 보니까 ‘적은 능력을 가진’ 교회네요.
그런데 여러분의 담임목사님이 활동하는 곳은 열방입니다.
목사님의 교구는 열방입니다.
아마 거기 중국에 있는 분들은,
여러분의 교회가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인줄 알고 계실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담임 목사님이, 중국에서 큰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적은 능력으로도 여기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 내 말씀을 지켰다’ 계3:8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내가 열린 문을 주노니’ 하십니다.
우리는 일곱 교회를, 윤리적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고
복음의 차원으로 봐야 합니다.
▲마치는 말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우리들은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경륜.. 이것을 내가 시행하리라 하시고
창3장에서 시작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심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고,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에겐 하나 남은 약속.. 재림이 있습니다.
시대적인 징조로 볼 때, 바로 주님은 대문밖에 와 계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이것을 파노라마로
마치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의 전체 광경을 내려다보듯이
하나님의 속에 감추었던 경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마 이 말씀만 들어도, 여러분이 성경을 보는 안목이
근시안적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넓어졌을 것으로 믿습니다.
자 이 말씀을 듣고, 이제는 나 같은 것을
성부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자 그리스도가 구속하시고,
성령님이 이렇게 인쳐 주셔서,
성부 성자 성령이 나 하나를 관계하시고, 나 하나를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 만드신 바라. 나 하나가 오늘에 있기까지 이렇게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을 이제 알게 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가 될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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