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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4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폴 워셔

LNCK 2014. 2. 11. 13:25

www.youtube.com/watch?v=r10xaUOXSRg&feature=youtu.be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롬1:16      Paul Washer   설교녹취  영어 녹취록 

Is Gospel something scandalous?                                                        *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사도, 즉 복음을 전달할 임무를 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적어도 사도라면, 당연히,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았어야지요.

그런데 바울이, 위와 같이 말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할 많은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그가 살던 시대문화의 정황 속에서는

‘부끄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 특별히 종교.. 이런 분야에서, 가치가 완전히 달랐고,

세상적 가치로 보면, 당시 기독교란.. 충분히 부끄러워할 만한, 그런 종교였습니다.

 

제 메시지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현실 상황속에서,

즉 ‘복음적 가치’와 ‘세속적 가치’가.. 서로 정반대로 충돌하는 상황속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당시 문화와 가치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당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파한 것입니다.

복음을.. 당시 실정에 맞게, 당시 문화에 적절한 것으로.. 변형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현 시대상황에 적절한 relevant 메시지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이, 현대인들의 귀에 들려야 한다나요?

 

이 대목을, 설교자의 영어를 직접 들어보십시다.

He(Apostle Paul) makes no attempt to make treaty with his culture, adapt his message to the culture, repackage his message or any of the other nonsense, it's become so prominent in the evangelical community today.

Now, just really quick, I want to say this. Paul makes no attempt to become relevant to his culture.

 

복음을, 현 시대의 문화와 타협하여

문화에 맞게 각색하고, 재조합 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오늘날 복음주의 권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려는 시도를.. 사도바울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니..”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죽은 한 나사렛인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신21:23 ‘나무에 달린 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헬라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불합리,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어디 학문적/종교적 계보도 없는 자가 나타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자기가 입을 열어서 복음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자기가 배척당하고, 조롱당할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배척과 조롱을 기꺼이 당하겠다'는 각오가, 바로 이 말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제 폴 워셔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여러분도, 그렇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복음을 복음답게 전한다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논란과 말거리(스캔들)로 삼아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위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을, 비방할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 복음전파자가

그렇게 당하는 수모를 피하기 위해서

복음을 좀 시대상황에 적절하게 고치고 각색해서 전파한다면..

그는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 자, 거짓선지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If you try to make it less of a scandal, you no longer preach the gospel.

 

 

◑그리스도의 복음이, 당시 로마사회에 얼마나 부적절했는지..

당시의 고대문헌을 통해서, 한 번 알아보십시다.

 

바울은, 이런 사회적 수모와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꿋꿋이 복음을 전했다니까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역사책에서 '젊은 플리니'로 알려진 사람의 기록입니다.

“두 노예 소녀 크리스천을 고문하며, 그들의 신앙을 조사해 보니,

전혀 터무니없고, 과도한 미신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불신자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극렬한 미신’으로 치부한 것입니다.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는, 자신의 <대화록>에 당시 크리스천들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들의 예배의식은, 범죄를 저지르고 십자가 형틀에 달린 한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라고 조롱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크리스천들은 역겨운 망상, 무감각하고 미친 미신적 신앙을 내세우면서,

모든 기존의 참된 종교를 파괴하려 한다” 라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이 듣기 싫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교회성장 전략들은

제가 방금 읽은 이 일들(조롱, 수치들)을 ‘피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서에는, 자기 부인이 기독교 신앙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아폴로 신의 신탁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

계속해서 헛된 망상을 하고, 재판관들의 옳은 판결로 정죄 받고,

청춘기에 철에 묶여 최악의 죽음으로 처형된,

망상 속에 죽어간 한 신에 대해 슬퍼하며 노래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라.”

 

고대의 볼테르(안티 기독교인)로 여겨지는 루시아누스는

그의 작품 <페레그리누스의 죽음>에서, 크리스천들을

‘그리스의 신들을 거부하고, 대신 십자가에 달린 궤변가를 숭배하며

그의 법에 따라 사는 가련한 악마들’이라고 조롱합니다.

 

오리겐의 문서 <셀수스에 대항하여>에서, 셀수스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잠재우기 위해, 횡설수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술 취한 노파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일들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 기독교는, 이렇게 심하게 비방과 멸시를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수모를 무릅쓰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 조롱은 과거에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원색적인 복음은,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에게 불쾌하게 여겨집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인본주의 등 우리 문화의 모든 ‘(인본주의)교리’와 ‘주의’에 대해

복음은 여전히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상들을 잠시만 살펴봅시다.

 

1) 우리는 상대주의 relativism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바로 그 ‘절대적 확신(상대주의)’ 위에 세워진 신앙 체계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을 칭송하면서도, (위선적인 칭송입니다.)

정작 진리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개처형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상대주의 때문이죠.

 

2)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중세와 같은) 영적 암흑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영적 상태가, 중세의 암흑시대와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캄캄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이죠.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자연인은 타락한 피조물이며,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스스로 가만 놔둬도, 제 발로 지옥을 향하여 가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현대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의 법이, 자신이 죄인임을 드러내고, 자기가 저지르고 싶은 죄악을 자꾸 태클 걸며,

자기 양심을 찌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진리, 즉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능한 자기로부터 멀리 밀어내고 싶어 합니다.

 

 

◑현대에도, 복음을 원색적으로 전하면..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성경적 절대)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며,

그리하여 심지어는 마치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주의 유행)

혹은 존재하더라도.. 진리는 사람이 알 수 없거나, (불가지론)

우리 삶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이신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숨는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다’ 라고요.

 

상대주의, 불가지론, 이신론 등은.. ‘하나님이 숨어서 안 보인다’고 말하지만,

복음은 오히려 .. ‘사람이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독교 신앙을.. 너무 지성적 intellect 으로만 접근하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날 의지 will 가 있느냐?’

 

성경은 ‘무신론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 성경은

그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그들은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아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롬1;21)’ 고의로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코뿔소가 자기에게 돌진해 올 때,

자기 머리를 모래에 쳐박는다고, (코뿔소가 안 보인다고) 그걸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자기 양심을 억지로 잠재우고,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다가올 심판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부인하면서

의로우신 하나님과, 도덕적 절대성(성경 기준)을 거부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상대주의와 그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일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은, 사람들을, 자기들 스스로 청한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타락상과 반역성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자치권을 반납하고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에는 나름 진리가 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진정한 진리(성경)를 끝장내는 신념 체계인

오늘날 가장 유행하는 ‘다원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이 진리일 때는,

즉 참 진리에, 정반대로 모순되는 진술까지도, 모두 진리라고 명명될 때,

참 진리나, 반대 진술이나.. 둘 다 모두가 진리가 될 때,

절대 진리는 사라집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제 말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처음 몇 세기 동안 살았던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로마 신에 대한) 무신론자라고 낙인찍히고, 박해 받았습니다.

 

오늘날 21세기에, 진정한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낙인찍히고, 박해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크리스천들은, 현대인들이 섬기는

다원주의, 불가지론, 이신론, 상대주의, 물질주의 등의 우상을.. 전혀 섬기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 나라에서 만약에, 참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런 이방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될 때

초대교회 시절처럼,

참 성도들은, 감옥에 가게 되고, 핍박을 받는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써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을 둘러싼 세상 문화는, 유신론theism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이성주의가 장악했던 18~20세기를 지나서

      20세기 후반부터는, 다시 영적 세계로, 사람들이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신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고,

      종교는 급속히 발전하는 사업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화적 현상이, 뉴에이지 운동 등, 다시 영적인 문화로 뒤바뀌고 있습니다.

      문제는, 각종 이방 종교, 우상의 신들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우상 종교, 이방 신앙에 대해서도, 관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신을, 상대방의 신과 서슴없이 교환swap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모으는 야구 카드(딱지)를 자기 친구들과 바꾸듯이.. 말입니다.

 

기독교가 나타나 손으로 조각해서 만든 우상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전체 종교 체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시저와 그에 대한 숭배를 부인하고

다른 소위 신들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하였으며

예수님만이 만유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크리스천들은 오히려 ‘무신론자’라고 낙인찍혔던 것입니다.

 

온 세상은, 그 크리스천들의 엄청난 오만함을 보고는,

그들에게 분노를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을 전혀 관용하지 않는 그들에 대해서,

그리스-로마인들은,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