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소망, 참된 소망 빌3:12~14 설교 2편 조합
◑엉뚱한 소망 / ‘사람’을 기억하려는 것
후대가 선대의 사람을 기억해 주면 좋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념관을 세워줄 수가 있고, 그를 위해 기념사업을 할 수는 있습니다.
노벨상처럼 돈이 있는 한, 또 그 이름을 따라 학교를 세우거나, 병원을 세워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카네기멜론 · 콜게이트 · 스텐포드 · 아산병원 이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산 사람이 “기억을 해 주어야” 유효합니다.
기억하는 사람이 사라져버리면 중지돼 버립니다.
사람이 기억을 살리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 직계 후손이라 하더라도,
아마 자기 증조, 고조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렵고,
증조할머니 이름은.. 더더군다나 어렵습니다.
▲간혹 가다가 아주 유명해서 수세기가 지나도 알려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시황이라든가 알렉산더대왕이라든가 이들은 운명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보존이 됐지요.
그렇다고 이들이 무덤 속에서 계속 말하느냐? 그건 아니에요.
클레오파트라가 유명하지만 영화 한편 보고나면 족합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해서 추가의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새로운 메시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입니다.
최근에 스티븐 잡스에 대한 영화가 새로 출시됐지만,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잡스가 살아있을 때, 이미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출시됐습니다.
거기에 무엇을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얘기가 그 얘기입니다.
▲국내 어느 유명한 ㅌㅇ교 종교지도자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그럼에도 아들이 뒤를 이어 그것을 하다가, 이제는 부인이 맡아서 하고 있지요.
그건 이상한 것입니다. 그것은 기득권과 세력을 유지하겠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도들은 그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따랐는데 죽었으니, 이제 문을 닫고 해산하는 것이 옳습니다.
찰리브라운과 스누피로 유명한 만화 <피너츠>의 저자 슐츠가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만화를 접었습니다. 중단했습니다. 더 이상 그 만화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붕괴한 다음에, 아직도 공산주의에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무엇을 얻겠다고, 무엇을 이루겠다고
이제 와서 공산주의가 무너졌는데 그것을 붙들고 있겠습니까?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누가 호응을 하겠습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주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도 공산주의와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입니다.
한때는 인기를 누렸으나 실패한 실험이 돼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명분은 없었을 것입니다. 미련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효험이 없어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누렸던 그 영화를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행체제로 운영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떠나갔다면, 과거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다시 그물질을 했던 것입니다.
무슨 호강을 하겠다고 그 자리에 연연하겠습니까?
북한의 김일성이 죽은 후에 북한은 여전히 뭐라고 주장하느냐면
‘수령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이것은 우상화의 극치에요. 죽은 김일성이 무슨 지시를 한다는 얘기입니까?
무슨 말을 한다는 얘기입니까? 무슨 도움을 준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체제유지를 위한 연극일 뿐이에요.
◑참된 소망/ ‘천국’을 현실감 있게 소망하는 것 ↔◑1. 사람
▲너무너무 뜨겁게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있어요.
그런데 애인이 회사에서 미국으로 1년 연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피치 못하게 1년 동안 헤어지게 됩니다.
공항에서 여자가 펑펑 웁니다, 남자가 게이트로 들어가고 나자
“만약에” 이랬다 합시다.
여자는, 눈물이 싹 걷히고, 수첩에 1년 뒤에 만날 날짜를 기록해놓고,
그 동안은 까마득하게 다 잊어버려요.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다가, 1년 후 수첩을 보니, 내일 애인이 돌아옵니다.
그 메모를 보면서, 다시금 애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고,
애인을 좋아하기 시작한다면.. 그런 애인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연인관계가 아니죠, 연인인 척 했던 거지요.
지금 천국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도들이, 천국을 소망하며 산다고 하는데..
위의 예화에 나오는 여자처럼.. 그런 식으로 천국을/주님을 ‘사모’합니다.
그건 사모하는 게 아니고, 소망하는 게 아니지요.
진짜 사랑하고, 진짜 소망하는 사람은,
연인이 공항 게이트로 들어가서, 눈에 안 보이자마자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연수기간인 1년 동안 내내 보고 싶습니다,
분명히 1년 뒤라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1년이라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아는데도, 지금 보고 싶은 거예요.
지금 만난다는 게 불가능한데도 지금 보고 싶은 거예요, 간절히 보고 싶어요.
‘지금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가서 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라는 겁니다.
1년 내내 한 달 30일, 1주일 7일, 하루 24시간을 보고 싶은 겁니다.
이게 연인이에요.
이게 애인에 대한 마음이고, 이게 소망입니다
▲근데 문제는, 우리가 다 천국으로 갈 소망을 갖고 산다고 얘기하지만
우리 마음의 소망은
-내일 돈 버는 것,
-5년 뒤에 내 자식이 서울대학 들어가는 것입니다.
-10년 뒤에 내가 큰 아파트로 바꾸는 거예요.
-내년쯤에는 외제차 한 대 사는 겁니다.
내년쯤에는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하는 겁니다.
진짜 좋아하는 걸 소망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진짜 좋아하는 걸 바라게 돼있어요.
그리고 이 소망은 연기될 수가 없어요, 유보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다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실은 천국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 천국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언젠가는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마지못해서, 그리고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니까
죽은 다음에 천국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죽음이 가까이 와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죽어가는 순간에 천국을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천국을 소망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공항 게이트로 들어간 애인, 1년 뒤에나 봐요,
1년 뒤에나 본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부터 보고 싶어요.
천국,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가 언제일지 몰라요.
그게 백년 뒤인지 이백 년 뒤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진짜 좋아한다면 지금부터 보고 싶은 거예요.
지금부터 보고 싶어야.. 천국을 진짜 소망하는 거라 이겁니다.
근데 우리는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진짜 천국을 좋아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알았어요, 베드로도 알았고.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변화하신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깜짝 놀란 정도가 아니라
현 세상의 모든 소망이 다 사라져버립니다.
이 땅에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만 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계실 때에 있을 법한 그런 빛의 모습으로 접하자마자
이 세상에서의 그 위대하고 원대한 소망과 꿈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살자고 해요.
사도바울도 이걸 느낀 겁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주님, 하늘에 계신 하늘아버지를 진짜 좋아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씀하기를, 내가 행한 모든 뒤의 것은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빌3:13
자기 인생의 가치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면,
회심한 뒤에 지금 로마감옥에 갇히기까지
지금 사도바울의 사역의 기간이 마무리져가고 있는데,
이 기간 동안 얼마나 위대한 일을 많이 했습니까? 근데 다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하늘에 있는데, 그 하늘은 어차피 성령님께서 자기를 붙잡아서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면서 이루어진 일이므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고,
내 인생의 평가는, 내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느냐 쳐다보지도 않고
내 관심은 오직 천국에서 아버지하나님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
영원히 함께 사는 것, 주님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이다..
거기에는 아브라함도 모세도 있을 것이고, 난 그 사람들 만나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산 겁니다.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건, 진짜 사도바울이 하나님을 좋아했구나,
진짜 사도바울이 천국을 좋아했구나, 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죽은 지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아직 재림을 안 하셨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위 예화에 나온 ‘연인’처럼, 그렇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2000년 전의 사도바울은, 지금 보고 싶다고 하면서, 천국을 산 거예요.
지금 보고 싶다고 하면서.
그래서 사도바울이 얘기하십니다.
‘나는 내가 이 땅에서 이룬 것 아무것도 내 인생의 업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나는 무조건 지금 부활해서 천국에서 아버지와 주님과 함께 살 그날만을 향해서 가고 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위에서 너 올라와서 같이 살자고 부르시는, 그 상만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
사도바울은 어쩌면 이렇게
그 하늘아버지와 주님을 보고 싶어 하고 진짜 좋아하셨을까요?
우리도 그런 현실감을 갖고 살아가자.. 이겁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 확 바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짜 천국을 좋아하면서 사도바울 같은 소망에 찬 사람으로 살다 죽읍시다.
천국을 소망하다가 죽읍시다.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날마다 순간마다 십자가 붙잡고,
자꾸 이 세상에 대해서 소망을 갖게 하고,
그럼으로써 그 관점으로 세상에서 이룬 것들을 대단하게 여기는 이 마음,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으로써
내 마음을 계속해서
하늘의 푯대를 향하여 갈 수 있도록 재촉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소망에 차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소망, 소망’ 말은 잘해요.
근데 뭘 소망한다는 겁니까?
위 예화의 '연인'처럼,
그저 죽고 나서, 천국에 가서 주님과 사랑하며 지낼 것을, 소망하십니까?
진정한 신앙,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것을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 좇아가는 것,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을 암송하며
그렇게 고난 중에도,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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