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4

4459 십자가의 원수

LNCK 2014. 3. 4. 17:29

◈십자가의 원수                  빌3:17~21                        출처, 편집

 

 

빌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현실> 관련글 모음

 

◑‘십자가의 원수’는, 교회 안에 있습니다.

 

본문에,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는 받아들이는 방식이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든지,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 신앙으로 살든지..

아니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고, 그저 십자가를 머리로만 알고 있으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요..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될 일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즉 아예 십자가를 한 번도 받아들여보지 못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자기들의 처지인 멸망의 그늘 아래 머물러서

십자가와 무관하게 살고 있는 것이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않습니다.

 

    누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냐 하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면서도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또, 기독교를 탄압한다고 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그냥 그들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놓여있던 멸망의 자리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르면서 악을 행하는 것뿐입니다.

 

누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합니까?

십자가를 아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취미가 <우표수집>이었습니다.

제법 두꺼운 앨범 7, 8권에 우표가 가득할 정도로 많이 모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가 베트남전쟁이 있던 때인데,

베트남에 가서 사시는 동네 어른들이 계시면, 그분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표를 좀 보내달라고도 하고,

 

또 친척들이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동네 친구들에게, 손발이 닳도록 빌어서

그 친척들에게 우표를 보내달라고 하는.. 그런 열심을 가지고서 우표를 모았습니다.

 

그때는 제 눈에, 우표밖에 안 보였어요.

 

근데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우표수집 앨범’들을 잘 보관해두고, 가끔 한번씩 꺼내서 우표들을 쭉 구경해봅니다.

 

점점 앨범을 꺼내서 보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이제 앨범에 먼지가 쌓이기 시작합니다.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우표를 다 나눠주기 시작해서

나머지 줄 수도 없는 시시한 우표들은.. 나중에 다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또한 어린이만 그런가요? 물론 아닙니다.

이 과정을 가만 보면, 사람 사는 게, 애나 어른.. 아니, 다 똑같이 반복되는 거예요.

 

자기 마음을 쏟으면, 그 마음을 쏟는 대상이,

내 마음의 첫 번째 가장 중요한 "현실"이 됩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을 떼면, 그렇게도 중요한 "현실"이었던 것이,

먼지가 쌓이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내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삶의 현실에서, 완전히 제거돼버리고 맙니다.

어릴 때 수집하던 ‘우표 앨범’처럼 말입니다.

 

밍크코트의 예를 들어 봅니다.

한참 ‘밍크코트’가 유행할 때는, 밍크코트가 여성들에게 “현실”(의 우선순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행이 지나가고 나니까, 딱 걸어놓고 입지를 않아요.

누가 밍크코트 입고 다녀도, 사람들이 쳐다봐 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고 나서기를 주저합니다.

밍크코트.. 무스탕.. 모직코트 하다가.. 금년에는 ‘패딩 점퍼’가 유행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자기 “현실”(의 우선순위)입니다.

그래서 사업이나, 자기 직장을 아주 거룩하고 신성하게 여길 정도로,

자기 마음을 다 쏟고 있습니다.

 

누가 ‘사업’을 “현실”이라고 했습니까?

죄송하지만, 우표수집이나, 밍크코트와 같은 것입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내가 왜 옛날에 그렇게 사업에 몰두했을까?’ 하며,

스스로 기이하게 여길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기독교인은요, “현실”(의 우선순위)이 영생이요, 천국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항상 동문서답입니다.

서로 핀트가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영생의 관점>에서 바라보시고, 말씀하시고

유대인들은 <3차원적 세속적 삶>의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저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죠.

 

또 예를 들어 볼까요? 최근 뉴스에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팽팽한 긴장이 감돌고 있습니다.

크림반도(흑해에 위치한 우크라이나 지역)에, 전운이 일촉즉발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에게는,

그런 뉴스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크림반도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아이스크림은 관심이 있겠죠.

 

오늘은 <십자가의 원수>라는 주제로, 본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십자가의 삶’이, 내 매일 삶의 “현실”(의 우선순위)이 되지 않으면요,

사실은 ‘십자가의 원수’인 것입니다. 신앙에 중간지대, 회색지대는 없습니다.

 

제/ 태목사가 십자가복음의 설교를 하는 중에,

청취자들의 반응이

‘설교가 인간 세상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에게 묻습니다,

‘정말 그런 것 아냐?, 혹시 내가 잘못 가르치는 것 아닌가?’

 

당장 먹고 살아야 되고, 자식 키우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돈 많이 벌 수 있다, 자식 잘 키울 수 있다’ 이런 얘기 하나도 없이

그냥 십자가복음만 얘기하는 게 옳은가 하는 의문을, 나 자신에게도 스스로 해봅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 있어요.

 

제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설교를 하는 게 아니라,

저한테 그렇게 묻는 사람들의 "현실감" 자체가 문제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것이, 자기들의 현실인데..

그게 결국은 ‘우표수집, 밍크코트’와 같은 것이라니까요.

 

아직 젊어서 그렇지, 연세가 80, 90세 되어 보십시오.

현역에서 은퇴하고, 집에서 지내보십시오.

그때는 ‘우표 앨범’버리듯이.. ‘사업도, 밍크코트’도 다 버리게 됩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면, 밍크코트도 딸이나 친척이 다 챙겨서 가져가 버립니다.

 

요한1서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러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게 뭘까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려는데, 내 마음이 돈을 쥐고 있고,

사업을/ 가정을/ 승진을/ 명예와 권력을 꽉 쥐고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좋으련만

대개의 경우, 우리들은 그 성취를 통해서, 자기가 영광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취를 위해서,

주님이 ‘버리라’고 말씀한 것들을, 우리는 오히려 더 ‘움켜쥐고’ 살아갑니다.

 

우리 마음은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의해서 빼앗겨서 갑니다.

 

예를 들어, 사업에 마음이 다 빼앗긴 상태로,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는 것,

이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사업을 버리는 것이요, 사업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진짜 사업을 팽개치라는 뜻은 아니고요,

사업에 대해 자유한 것입니다. 사업에 대한 자기 야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었으니까요.

 

그게 사업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살아서, 부활해서’ .. 사업이 더 알차게 되는 면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업이 우상인 상태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사업을 떠받들고 살아갑니다.

 

젊은 청년이 ‘자기 애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기도하는 것과 똑 같죠.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 드려지도록 하는 것인데,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를 그대로 묵과한 채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이게 바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겁니다.

즉, <십자가 신앙>이 전혀 없고, 거기에 오히려 역행하는 신앙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완전히 의미가 바뀌어져버린 거예요,

교회에서 복음의 의미가 바꿔져버린 거예요.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으로 바꿔졌는데,

이건 진짜 ‘십자가의 원수 중에 대원수’입니다.

세상의 일이 평강하고 형통하게 될 것이다.. 큰일 낼 사람들이에요.  ↙

 

◑‘십자가의 원수’의 4가지 특징

 

빌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래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 어떻게 되느냐..

즉 ‘십자가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고요?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

 

그 멸망이라고 하는 의미의 성경적 정의, 가장 본질적인 정의는

하나님과 끊어지는 겁니다.

 

끊어져봤자지..

여러분 한 번, 주님과 관계가 끊어져 보세요.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얼마나 지겹고, 힘들고,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괴롭게 살다가, 나중에 최후의 마침은, 영원한 멸망 입니다.)

 

     어떻게 끊어집니까?

     내가 마음을 떼기 시작하면서.. 우표앨범들에 먼지가 쌓입니다.

 

     우표앨범은 있어요, 존재하고 있어요,

     그러나 마음이 떨어지면서.. 내 “현실”이 아닌 게 돼버려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으면.. 끊어집니다.

 

그 다음에 우리 마음이, 돈에/ 사업에/ 가정에/ 성공에/ 형통에 가 있으면서

하나님을 찾을 때,

그 하나님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찾았던 그 만군의 주 여호와가 아니에요.

그냥 종교에서 찾는 신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상시해버리는 거예요.

 

절대로 여호와하나님 하늘의 아버지는,

내 마음이 가장 먼저 드려지지 않고는, 관계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골리앗 앞에서, 사울왕의 경우는 골리앗이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사업과 직장이 “현실”인 것과 같죠.)

여호와하나님의 이름도 알고 있고,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자기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골리앗이 자기 “현실”입니다.

 

왜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만군의 주 여호와 살아계신 그분과 지금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첫 번째 자기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십자가가 “현실”인 것과 같죠.)

 

골리앗은 마음이 전혀 가지 않은 비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골리앗 앞에서.. 떨었습니다. 패배했습니다.

이게 멸망이라는 거예요.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사울 왕처럼 하나님에 대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과 지금 연결이 안 돼 있는 거예요. 그 관계의 단절이, 벌써 '멸망'입니다.

 

사업문제가 골리앗이 돼가지고.. 그 사업문제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어요.

자식문제 건강문제가 골리앗이 돼가지고.. 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어요.

이 자체가 벌써 멸망이에요.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이 돼있는데 내 몸에 문제가 생겼다면

사도바울처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픈 동안에 뭔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가 있다고 믿는 겁니다.

 

2. ‘그들의 신은 배’ 입니다.

 

우리 말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또한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 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십자가로 살지 않은 신자는,

즉 ‘십자가의 원수’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들의 神은 배’입니다. 빌3:19

 

그들의 신은.. 주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신은.. 자기를 배불리 먹여주는 자입니다.

 

그들의 신은..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요,

그들의 신은.. 배 belly 가 된 것입니다.

 

위에서 예를 든 바,

아이 때 신은.. 우표수집이요, 과자와 장난감이요,

청년 때 신은.. 연인이요, 결혼이요.

중년 때 신은.. 사업이요, 승진이요,

노년 때 신은.. 명예요, 존경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은.. 주님이요, 십자가 신앙인 것입니다.

그 삶에만.. 영생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천국/ 만족/ 기쁨/ 후회 없음/ 감사 충만이 있습니다.

 

▶3.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어요.

 

이 세상의 영광은, 1등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돈, 건강, 승진, 권력, 좋다고 하는 것들을 갖는 경쟁에서

1등하기를 원하며,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렇게 1등 해서 얻은 영광이..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요.

 

그러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은 누굽니까?

이 세상에서 1등하는 영광이 아니라

이 세상 자체를 이겨버리는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에요.

 

누구보다도 돈 많이 벌려고 하고, 공부에서 누구보다도 1등 하려고 하고,

승진하려고 하고, 1등 하려는 자에게.. 결국 부끄러움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 성공한 것은

결국은 모두 <부끄러움>의 결과로 결판납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살지 않고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나중에 보십시오. 그의 사후에.. 반드시 ‘부끄러운’ 일들이 속출합니다.

아니, 그의 노후에 벌써 ‘부끄러운’일들을 겪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살지 않고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면서 이룬.. 

세상적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십자가 복음으로가 아니라, 다른 어떤 방식으로

목회적 성공을 거두었다..

나중에 그 결과를 한 번 보십시오.

반드시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다’는 말씀이 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유일한 성공의 길이요, ‘반석위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거둔 성공, 이룬 업적은

모두가 ‘모래 위에 지은 성공’입니다.

결국은 ‘부끄러움’으로 결판날 것입니다.

 

▶4.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오늘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정 구원 받은 사람과/ 신자이지만, 아직 못 받은 사람의 차이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인지,

‘하늘, 천국, 영생의 일을 생각하는 자’인지..

그의 말, 행동, 라이프스타일을 보면.. 결국 분별됩니다.

 

천국을 생각하는 사람은요,

그렇게 이 땅에서, 큰 집에 살려고 연련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천국에 가면, 더 크고 으리으리한 집에 살게 될 터이니까요.

 

너무 세상에서 ‘돈, 돈’ 하면서, 돈 때문에 사람들과 다투지 않습니다.

자기가 천국에 가서, 영원히 영화롭게 살 것이라고.. 진짜 “현실”로 믿으면,

이 세상에서 좀 너그럽게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억만장자 아들이, ‘돈, 돈’ 하겠습니까?

극빈자는, 버스를.. 울며 겨자 먹기로 탑니다만,

억만장자 아들은, 똑같은 버스를.. 재미로 탑니다.

 

정말 천국과 영생을 “현실감”있게 느끼는 사람은요,

‘돈, 돈’ 안 합니다. 매사에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 돈’ 하는 분들이, 또 크게 부자로 사느냐? ..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그저 ‘돈, 돈’ 하면서 수전노 소리나 듣지, 실질적 이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존경심을 다 잃어버리고요,

 

이렇게 땅의 일만 생각하는 ‘신자’가 바로

<십자가의 원수>인 것입니다.

 

자기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고,

그런 게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내 십자가의 죽음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19:2절 패러디

 

▶십자가에서 죽은 목회자의 예

그는, 성도들을,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목회자들이 아무리 훌륭해도

‘나는 말씀의 기름부음과 은사를 강하게 받았다.

나는 아주 성경을 잘 가르칠 수 있다.’ 하더라도..

성도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합니다. "자기를" 따르라고 하지 마십시오.

 

어떤 목회자들은 ‘나는 아주 강력한 신유의 기름부음이 있다.

나는 내적 치유에 강한 기름부음이 있다.’ 그러나 다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은사도, 그가 가지고 있는 기름부음도

그의 사역도.. 다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완전하게 채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든지 자기의 기름부음과 사역을 통해서

성도들의 필요한 어떤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채워주려 하는데요.

성도들의 필요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은사, 내 기름부음, 내 사역을 통해서

단순히 성도들을 섬기고 사역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주님께서 성도들을 만지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직접 나아가서, 주님의 사역(만지심)을 받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성도들을 가장 풍성하게, 가장 복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냐 아니냐, 어떻게 구분한다고요?

 

“현실성”에 기준을 갖고 구분합니다.

내 현실의 우선순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현실이냐, 이 세상이 더 앞선 현실이냐?

..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내 “현실(의 우선순위)”이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그래야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이 현실로 느껴집니다.

그런 자아의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넓은 아파트, 고급 승용차, 명품 백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보고, 그것 달라고 조르게 됩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인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삶이 그림자조차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